다크 판타지 독립적인 단편 소설

황량한 바람이 뼛속을 파고들었다.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겁게 짓눌려 있었고, 부서진 콘크리트 잔해들 사이로 먼지가 춤을 추듯 휘돌았다. 세하는 낡은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녹슨 철근을 붙잡았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삭막한 정적을 깨뜨렸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이 폐허에 살아있는 것은 세하 자신뿐이거나, 아니면 더 이상 살아있다고 볼 수 없는 것들뿐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한때 ‘도시’라고 불렸던 것의 처참한 잔해였다. 고층 빌딩들은 뼈대만 남은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도로들은 갈라지고 파괴되어 흉터처럼 늘어져 있었다. 잿빛 먼지가 모든 것을 뒤덮었고, 색깔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세하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지독한 건조함이 목을 태웠지만, 물은 이제 금보다 귀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세하는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탁했다. 일주일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다. 등에 짊어진 낡은 배낭은 텅 비어가는 중이었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 바 조각 하나와 반쯤 비어있는 물통이 전부였다. 그녀의 발걸음은 터벅거렸다. 사방에 널린 죽음의 냄새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지만, 가끔은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져 구역질이 올라왔다.

목표는 간단했다. 살아남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늘도 그 목표를 위해 쥐 죽은 듯 조용한 이 폐허를 뒤지고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허물어진 상점 건물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금이 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내부는 어둠에 잠겨 있었고, 어딘가 섬뜩한 분위기를 풍겼다. 이런 곳은 종종 ‘아귀’들의 은신처가 되곤 했다.

아귀.

인간의 형체를 어렴풋이 간직한 채 극도로 뒤틀리고 일그러진 생명체들. 온몸의 살은 썩어 문드러지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으며, 눈은 시력을 잃은 대신 작은 소리에도 미친 듯이 반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끊임없이 배고파했다. 살아있는 모든 것을 갈구하는 존재. 이 재앙이 시작된 후, 가장 흔하고 잔혹한 위협이었다.

세하는 허리춤의 칼자루를 꽉 쥐었다. 녹슬었지만 날카로운 칼이었다. 이 칼은 수없이 많은 아귀의 목을 땄고, 수없이 많은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었다. 그녀는 숨을 죽이고 건물 안으로 발을 들였다.

내부는 예상했던 대로 엉망진창이었다. 상품 진열대는 쓰러져 부서졌고, 찢어진 종이 조각과 먼지, 그리고 정체 모를 잔해들이 바닥에 뒹굴었다. 코를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비릿한 악취가 뒤섞여 역겨움을 유발했다. 세하는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었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지만, 부서진 유리 조각이라도 밟을까 봐 신경이 곤두섰다.

“흐읍… 후우…”

낮게 밭은 숨을 쉬며 주변을 살피던 세하의 눈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벽에 기댄 채 엎어져 있는 마네킹… 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낡은 작업복을 입은, 분명 사람의 형체였다. 세하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죽은 시체. 분명 그럴 터였다. 이 정도 폐허라면 살아있는 사람은커녕 죽은 사람의 흔적조차 쉽게 찾아보기 어려웠다. 어딘가에서 아귀가 냄새를 맡고 왔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칼을 뽑아 들었다. 혹시 모를 일이었다. 이 세계에서는 죽음조차 종종 속임수였다. 시체는 때때로 움직이는 함정으로 변했고, 절망은 가장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왔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시체를 발로 살짝 건드렸다. 움직이지 않았다. 세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 순간, 바닥에 뒹굴던 캔 하나가 그녀의 발에 차이며 쨍그랑, 하고 소리를 냈다.

정적.

그리고 이어진 섬뜩한 침묵. 세하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쉬이익… 쉬이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네킹처럼 엎드려 있던 시체 뒤편, 더 깊은 어둠 속에서였다. 세하는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아귀. 분명했다.

순간,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붉은 눈동자가 섬광처럼 번뜩였다. 갈라지고 뒤틀린 입이 찢어지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악!”

쇠 긁는 소리 같은 비명이 상점 내부를 가득 채웠다. 아귀였다. 그것은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 기어 나왔다. 앙상한 팔다리는 기형적으로 길었고, 등은 활처럼 휘어 있었다. 살이 모두 썩어 문드러져 뼈와 근육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썩은 살점들이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세하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퇴로는 이미 아귀에게 막혀 있었다. 놈은 세하를 향해 굶주린 눈빛을 번뜩이며 돌진해왔다. 느린 것 같으면서도 놀랍도록 빠르게.

“하!”

세하는 칼을 휘둘렀다. 놈의 앙상한 팔을 노렸다. 챙! 하는 소리와 함께 칼날이 놈의 뼈에 부딪혔다. 예상보다 단단했다. 놈은 개의치 않고 다른 팔을 휘둘러 세하를 후려쳤다. 세하는 간신히 피했지만, 옷자락이 찢어지고 옆구리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놈은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세하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 싸움에 집중했다. 발소리, 숨소리,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놈의 기형적인 몸을 피해 좁은 공간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팔다리가 너무 길어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순간을 노렸다.

결정적인 순간, 아귀가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세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모든 힘을 실어 칼을 놈의 목에 박아 넣었다. 뼈와 살이 찢기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놈의 몸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푸더덕거리며 경련하던 놈은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썩은 피가 바닥에 흥건히 퍼졌다.

세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비틀거렸다.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욱신거렸다.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작은 상처 하나도 치명적일 수 있었다. 파상풍, 감염, 열병… 모든 것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젠장… 젠장!”

그녀는 주저앉아 찢어진 옷자락을 부여잡았다. 배낭을 뒤져 겨우 작은 소독약과 붕대를 찾아냈다. 서툰 솜씨로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로 감았다. 쓰라림에 눈물이 찔끔 나왔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울 시간은 없었다.

몸을 추스르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아귀가 있던 곳은 원래 상품 보관실이었던 듯, 낡은 선반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던 무언가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이번에는 마네킹도 시체도 아니었다. 선반 구석에 놓인 낡은 상자.

세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흙먼지에 뒤덮인 오래된 통조림 몇 개와… 그리고 물통 하나였다. 새것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물이 가득 차 있는 묵직한 물통이었다. 세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물통을 집어 들었다. 그녀의 손이 떨렸다.

“물…”

감격에 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물통을 열어 물을 마셨다. 차갑고 깨끗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감각이었다. 살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통조림도 소중하게 배낭에 넣었다. 이 정도면 며칠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간신히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제 이 상점을 떠나야 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위험했다. 아귀의 비명 소리가 다른 위험을 불러올 수도 있었다.

문득, 아까 시체인 줄 알았던 그 ‘마네킹’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죽은 사람은 아니었다. 사람의 형체는 분명했지만, 조금 전 아귀가 있었던 곳과는 다른 곳에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혹시 하는 마음에 다시 다가갔다.

이번에는 시체를 건드리는 대신, 조심스럽게 귀를 기울였다. 미약하지만,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세하의 심장이 다시 한번 격렬하게 뛰었다. 이 폐허에서 살아있는 사람을 만난 것은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기쁨보다는 경계심이 먼저 들었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아귀보다 더 잔혹할 수 있었다.

그녀는 칼을 다시 고쳐 쥐었다.

“누구야?”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쓰러져 있던 인물은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세하는 숨소리가 약간 더 빨라지는 것을 감지했다.

“일어나. 나쁜 짓 할 생각 없어. 그냥… 사람이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녀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상대방에게 위협을 주지 않으려 노력했다. 조용히 숨어있던 인물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더럽고 찢어진 옷을 입은,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여성이었다. 얼굴은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피곤에 지쳐 있었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는 듯했으나, 세하를 응시하는 순간 작은 불꽃이 일었다.

“너는… 뭐야?”

갈라진 목소리가 겨우 흘러나왔다. 그녀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세하를 노려봤다. 한 손에 들린 칼을 보며 몸을 움츠렸다.

“난 세하. 그냥… 이 주변을 떠도는 사람이야.” 세하는 칼을 내렸다. “너는? 왜 혼자 이런 데 있어?”

“혼자가 아니야.” 여성은 겨우 입을 열었다. “일행이 있었는데… 아귀들이 덮쳤어. 나 혼자 겨우 숨었지. 그들도… 아귀한테 잡아먹혔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절망이 깃들어 있었다. 세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 세계에서 흔한 이야기였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 어쩌면 더 잔혹한 운명이었다.

“이름은?”

“리아.”

리아는 세하의 눈을 피하며 바닥을 응시했다. 마치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죄책감을 느끼는 듯했다.

“물 있어?” 리아의 목소리는 갈증으로 갈라져 있었다.

세하는 잠시 망설였다. 물은 생명이었다. 그녀도 겨우 얻은 귀한 물이었다. 하지만 리아의 눈빛에서 자신과 같은 절박함을 보았다.

“반 병 정도 줄 수 있어. 그 이상은 안 돼.”

세하는 물통을 꺼내 들었다. 리아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물통을 받아들었다. 한 모금, 한 모금, 조심스럽게 물을 마셨다. 그녀의 목울대가 움직이는 것을 세하는 지켜봤다. 갈증이 해소되자 리아의 얼굴에 미약하지만 생기가 돌았다.

“고마워…” 리아는 겨우 말했다.

“이젠 어떻게 할 거야?” 세하가 물었다.

리아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몰라… 갈 곳도 없고, 더 이상 혼자서는 못 버틸 것 같아.”

폐허 속에서 텅 빈 눈동자를 한 리아를 보며 세하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어쩌면 자신도 저런 모습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했다.

“나와 같이 갈래? 확실한 건 없어. 하지만 혼자보단 나을지도 몰라.”

세하는 무심하게 말했다. 그녀는 리아를 동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적으로, 이 잔혹한 세상에서 혼자보다 둘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귀를 상대할 때도, 먹이를 찾을 때도, 둘이라면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올라갈 터였다.

리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흔들림이 있었다. 경계심과 의심, 그리고 간절한 희망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녀는 세하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했다. 세하는 아무 말 없이 리아의 결정을 기다렸다.

시간이 흘렀다. 정적 속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바람 소리만이 폐허를 가득 채웠다.

마침내 리아가 입을 열었다.

“…어디로 갈 건데?”

세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기쁨의 미소가 아닌, 그저 생존에 대한 지독한 결심을 드러내는 미소였다.

“모르지. 아마도… 또 다른 폐허겠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곳.” 세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우린 계속 갈 거야. 숨이 붙어있는 한.”

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빛에는 아직 절망이 남아 있었지만, 이젠 그 안에 아주 작은, 꺼질 듯한 불꽃 하나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였다.

두 여인은 서로를 의지한 채, 폐허가 된 상점의 출구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밖은 여전히 잿빛 하늘 아래 절망적으로 펼쳐져 있었지만, 이제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지독한 여정은 계속될 터였다. 어쩌면 내일도, 또 그 다음 날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