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망각의 성채’를 향해 섰다. 잿빛 하늘은 핏빛 석양을 토해내고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은 마치 고통받는 영혼처럼 비명을 지르는 듯 흔들렸다. 성문은 거대한 짐승의 입처럼 닫혀 있었고, 그 위에 새겨진 수많은 칼자국과 마법 흔적들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참혹한 역사를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아셀은 그 거대한 문 앞에 섰다. 그의 얼굴은 차가운 그림자에 가려져 있었으나, 굳게 다문 입술과 이글거리는 두 눈에서 강렬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손에는 검은 금속과 뼈로 이루어진 검, ‘그림자 칼날’이 쥐어져 있었다. 칼날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는 아셀의 분노와 닮아 있었다.
“루카스… 네가 서 있던 그 자리, 이제 내가 찢어발겨 주마.”
낮게 읊조린 목소리는 살기로 가득했다. 그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리며 형체를 이루는 듯했다. 그것은 아셀이 망각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힘이자, 복수를 위한 잔혹한 도구였다.
* * *
성문이 굉음과 함께 열렸다. 안은 예상대로였다. 거대한 홀은 어둠과 타락으로 가득 차 있었고, 뼈와 가죽으로 만든 깃발들이 천장을 장식하고 있었다. 중앙의 옥좌에는 루카스가 앉아 있었다. 과거의 순진했던 미소는 간데없고, 비열하고 오만한 표정이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 명의 강력한 기사가 철통같은 갑옷을 입고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 아셀. 감히 여기까지 올 줄이야. 네가 아직 살아있다는 게 나에게는… 꽤나 불쾌한 소식이었다.”
루카스는 비웃듯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권능이 실려 있었다.
“불쾌하다고? 네가 내게 선사했던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아셀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고통? 아, 그 쓸모없는 계약 말인가? 네가 너무 순진했던 탓이다. 친구? 그런 허황된 감정 따위, 내게는 방해물일 뿐이었어. 네 존재는 그저 내가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징검다리에 불과했지.”
루카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그의 손에서 짙은 보라색 마나가 피어올랐다. 홀의 어둠이 그의 마나에 반응하여 더욱 깊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감히 내 영역을 침범했으니, 이번에는 확실히 끝내주지. 기사들, 저 자의 숨통을 끊어라.”
좌우에 서 있던 기사들이 동시에 움직였다. 거대한 검이 허공을 갈랐고, 무거운 발걸음이 대리석 바닥을 울렸다. 그들은 망각의 성채를 지키는 최정예 전사들이었다.
아셀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주위로 검은 안개가 더욱 짙게 피어올랐다. 그의 발밑에서부터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기사들을 향해 뻗어나갔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라, 루카스. 네가 날 배신했을 때, 난 죽지 않았다. 단지… 다시 태어났을 뿐이지.”
검은 안개가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기사들이 검을 휘두르며 돌진했지만, 그들의 시야는 검은 안개에 완전히 가려졌다. 갑옷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어둠 속에서 울렸다.
“크윽!”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한 명의 기사가 쓰러졌다. 그의 갑옷에는 검은 칼날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날은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며 그의 심장을 꿰뚫었다. 다른 기사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아셀은 이미 그의 등 뒤에 있었다. 그림자 칼날이 번개처럼 번뜩이며 그의 목을 갈랐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성채의 굳건한 벽을 붉게 물들였다. 두 기사는 바닥에 피를 뿌리며 차갑게 식어갔다.
루카스의 얼굴에서 비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경악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쓸모없는 녀석이… 이 정도 힘을 얻었을 리가 없어!”
아셀은 피 묻은 그림자 칼날을 어깨에 메고 천천히 루카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자국마다 검은 그림자가 따라붙는 듯했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루카스의 보라색 마나가 침식되어가는 것이 보였다.
“네놈이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을 때, 난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곳에서… 네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을 얻었지.”
아셀의 눈빛은 마치 심연 그 자체였다. 그의 눈동자에선 핏빛 섬광이 번뜩이는 듯했다.
“네놈이 내 손으로 죽인 줄로만 알았던 ‘그’의 힘을… 내가 모두 흡수했다. 네가 비웃었던 그 어둠 속에서, 나는 새로운 주인이 되었다.”
루카스는 뒷걸음질 쳤다. 그 얼굴에는 분명한 공포가 서려 있었다.
“거짓말 마라! ‘그’는 완전히 소멸했어! 네가 그런 힘을 다룰 리가 없어! 불가능해!”
“소멸? 아니.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다.”
아셀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주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춤을 추듯 일렁였다. 홀 전체를 지배하던 루카스의 보라색 마나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셀의 그림자가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천장의 깃발들이 찢어지고, 벽에 걸린 뼈 장식들이 검은 재로 변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네가 그를 배신하고 나를 이용했듯, 나도 그를 이용했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무너뜨리기 위해.”
아셀이 손을 뻗자, 바닥에서 검은 그림자 촉수들이 솟아올라 루카스의 발목을 휘감았다. 루카스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지만, 그림자 촉수는 더욱 단단히 죄어왔다. 그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보라색 마나가 검은 그림자에 의해 질식당하는 듯했다.
“크아악! 놓아라! 이 빌어먹을 자식! 네놈이 감히!”
“놓을 리가. 네놈은 아직 할 일이 많다. 내가 너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줄 수 있는지, 이제부터 직접 체험하게 될 거야.”
아셀의 손에서 그림자 칼날이 솟아올라 루카스의 목덜미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이 피부에 닿는 순간, 루카스의 몸이 전율했다. 그의 눈동자가 광기 어린 두려움으로 일그러졌다.
“네가 내 모든 것을 앗아갔듯, 나도 네 모든 것을 천천히, 아주 천천히 빼앗을 것이다. 네 권력, 네 명예, 네 추종자들… 그리고 마지막엔 네 목숨까지. 내가 이 자리에서 너를 죽이는 건 너무 쉬운 일이야. 그건 네게 베풀어지는 자비와 다름없지.”
칼날이 그의 피부를 살짝 베었다. 핏방울이 흘러내리며 루카스의 옥좌에 떨어졌다. 그 옥좌는 이제 피로 더럽혀졌다.
아셀은 칼날을 거두지 않고, 루카스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목소리는 죽음의 찬가처럼 들렸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루카스. 네가 나에게 선물했던 절망을, 이제 내가 너에게 돌려줄 시간이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될 거야.”
그림자 촉수가 루카스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셀을 노려봤지만, 그의 눈빛은 이미 패배자의 것이었다. 아셀은 망각의 성채 홀을 뒤로하며 천천히 걸어나갔다. 그의 발자국 뒤로, 어둠이 더욱 깊게 깔렸다. 루카스가 앉아 있던 옥좌는 이미 그림자에 잠식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복수의 서막이, 비로소 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