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짙게 깔린 비룡산 현무곡.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길게 뻗은 흑염각은 핏빛 등불을 내걸고 있었다. 등불은 흔들릴 때마다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그 그림자들은 마치 무덤 속에서 기어 나온 망령들처럼 흑염각의 검은 기와지붕을 휘감았다. 내일이면 이곳에서 천명무도회가 시작된다. 천하의 운명을 건다는 거창한 이름 아래, 목숨을 걸고 칼날을 마주할 살육의 축제.
단호는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앉아 명상에 잠겨 있었다. 눈을 감았지만, 그의 시야는 오히려 더 선명했다. 지난 며칠간 그와 함께 흑염각에 모여든 무림 고수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만년한철처럼 차가운 눈빛의 마교 소교주 ‘혈영’ 혁월. 거대한 도끼를 등에 짊어진 채 묵묵히 서 있던 서역의 역왕 ‘파천’ 강산. 그리고 언제나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지만, 그 미소 뒤에 어떤 칼날을 숨기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남궁세가의 장손 ‘벽옥검’ 남궁휘.
그들 모두는 천하 무림에서 한 획을 그은 절대 고수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단호에게는 모두 의심스러운 존재들이었다. 이 무도회가 단순히 무술의 겨룸일 리 없었다. 대회의 공표문에는 ‘천지가 뒤틀리고, 혼돈의 기운이 창궐하니, 천명(天命)을 받아 세상을 구원할 단 한 명의 영웅을 찾는다’라고 쓰여 있었지만, 그 거창한 명분 뒤에는 언제나 피비린내 나는 욕망과 비열한 술수가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단호의 검, 흑영(黑影)은 그의 옆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검집 안에 잠들어 있는 흑영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지만, 단호는 그 안에서 끓어오르는 검기(劍氣)를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주인의 불안을 읽고 함께 격동하는 심장처럼.
“불안한가, 흑영아.”
단호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차가운 검자루에서 희미한 떨림이 전해져 오는 듯했다. 그 떨림은 단호 자신의 것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냉철함을 유지하려 애썼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며칠 전, 흑염각의 총책임자인 ‘구천노인’이 모든 참가자들을 불러 모아 말했다. “이번 천명무도회는 일반적인 비무대회와 다르다. 승자는 천하를 구원할 ‘천명지기(天命之氣)’를 얻을 것이며, 패자는… 패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가져갈 뿐.”
그 말의 의미는 명확했다. 패자는 죽는다. 혹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었다. 구천노인의 눈빛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 같았다. 그 속에서 단호는 섬뜩한 광기를 엿보았다. 그 광기는 단호에게 속삭이는 듯했다. *너희 모두는 이 게임의 말이자, 동시에 먹잇감이다.*
단호는 눈을 떴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달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섬뜩하리만치 창백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섰다. 흑염각 마당에서는 몇몇 참가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오직 낮은 목소리의 대화와 가끔씩 터져 나오는 신경질적인 한숨만이 밤공기를 갈랐다. 그들의 얼굴에는 긴장감과 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누구도 다른 이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분위기.
그때,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술잔을 기울이는 모습이 보였다. ‘취검’ 백무진이었다. 그는 항상 술에 취해 있었고, 그 술기운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검술을 펼쳤다. 단호는 백무진의 술잔 속에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다. 취한 척 위장한 광기, 혹은 광기를 술로 다스리려는 처절한 몸부림.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단호는 본능적으로 허리에 손을 얹었다. 흑영의 검자루가 손바닥에 닿는 순간, 그의 몸은 전투 태세로 변했다. 문 앞에는 작은 체구의 여인이 서 있었다. 흑염각의 시종 중 한 명인 ‘은하’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단호 고수님, 구천노인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단호는 그녀의 눈빛 속에서 두려움을 읽었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눈빛이었다. 어쩌면 이 흑염각 자체가, 혹은 이 무도회 자체가 그녀를 공포에 떨게 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알았다. 앞장서라.”
단호는 흑영을 다시 내려놓고 은하의 뒤를 따랐다. 복도는 길고 어두웠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등불만이 흔들리며 벽에 괴상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마치 미로 속을 헤매는 듯했다. 그의 발걸음은 고요했고, 심장은 차분하게 뛰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다. *이곳은 안전하지 않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믿지 마라.*
구천노인이 있는 방은 흑염각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별실이었다. 문이 열리자, 짙은 향냄새가 코를 찔렀다. 방 안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오직 방 한가운데 놓인 작은 찻상 위에 놓인 촛불만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촛불 주위에는 오색찬란한 연기가 맴돌고 있었다.
“왔는가, 단호.”
어둠 속에서 구천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모습은 그림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촛불은 흔들렸고, 그의 그림자도 함께 기괴하게 춤을 추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단호는 예를 갖추었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내일이면 대회가 시작되지.” 구천노인의 목소리는 낮고 묵직했다. “천명지기(天命之氣)… 그것은 세상을 구원할 힘이자, 동시에 세상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이다. 자네는 그것을 다룰 자격이 있는가?”
“자격은 제가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천하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면, 저 단호는 피하지 않을 뿐입니다.”
“하하하… 훌륭한 답이군. 하지만 기억하게. 대회가 시작되면, 너희는 모두 적으로 변한다. 서로를 믿지 마라. 심지어 자신의 그림자조차 의심해야 할 것이다.”
구천노인의 웃음소리가 어둠 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웃음은 차갑고 비웃음 같았다. 단호는 구천노인의 눈빛을 찾으려 했지만, 짙은 그림자 속에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다만, 촛불이 순간적으로 크게 일렁이며 방 안에 섬뜩한 그림자를 드리웠을 때, 그는 구천노인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하게 빛나는 무언가를 보았다. 아주 작고, 은밀하며, 날카로운 무언가.
그것은 칼날이었다. 손톱보다도 작은, 그러나 치명적일 수 있는 칼날.
“노인장, 혹 저에게 따로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단호는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아니. 그저… 내일의 대회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구천노인은 찻상 위의 찻잔을 들었다. 찻잔에서 김이 피어 올랐다. 그는 찻잔을 천천히 기울여 향기로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자네가 만약 이 대회를 통과한다면, 그때는 진정한 천명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패한다면… 자네의 혼백마저 이 흑염각의 어둠 속에 영원히 갇히게 될 게야.”
그의 마지막 말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섬뜩한 저주처럼 단호의 귓가에 박혔다. 단호는 말없이 구천노인을 응시했다. 차분해 보이려 노력했지만, 그의 심장은 경고음을 미친 듯이 울리고 있었다. *이 노인, 무언가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다.*
단호는 몸을 돌려 방을 나왔다. 문이 닫히자, 짙은 향냄새와 구천노인의 싸늘한 시선이 등 뒤에서 쫓아오는 듯했다. 복도를 걸으며 그는 아까 보았던 작은 칼날의 잔상을 떠올렸다. 구천노인은 어째서 그런 것을 숨기고 있었을까? 그리고 그가 말한 ‘패자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복도를 걷던 단호는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흐느끼는 소리였다. 은은하지만 분명한, 여인의 흐느낌. 이 깊은 밤, 흑염각의 고요를 깨뜨리는 그 소리는 단호의 심장을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은하의 목소리였다. 아까 자신을 안내했던 그 시종의 목소리.
흐느낌은 점점 더 커졌고, 이내 단말마적인 비명으로 변했다. 짧고, 날카로우며, 피를 토하는 듯한 비명.
단호는 전광석화처럼 몸을 날렸다. 소리가 들린 곳은 구천노인의 별실이 있는 층의 아래층, 시종들이 머무는 방 쪽이었다. 그가 복도를 꺾어 돌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피. 붉은 피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그리고 그 피웅덩이 한가운데, 은하가 쓰러져 있었다. 그녀의 목에는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듯한 끔찍한 상처가 선명했다. 이미 숨은 끊어진 듯, 그녀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단호의 심장이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방금 구천노인의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구천노인의 손가락 끝에서 보았던 작은 칼날. 그것이 은하의 상처와 너무나도 흡사한 모양이었다.
누가? 왜?
단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직 자신과 은하의 시신, 그리고 사방을 잠식하는 듯한 핏비린내만이 존재했다.
이것은 시작이었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도회는, 이미 피로 그 서막을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피는 단순히 무인들의 결투에서 흐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 치명적인 심리전의 첫 희생이었다.
*누가 이 여인을 죽였을까? 구천노인?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단호는 핏빛으로 물든 복도를 응시하며, 조용히 검자루를 쥐었다. 흑영이 희미하게 떨렸다.
이제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마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