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현실 게임 (VRMMO)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가, 마치 물 위로 떠오르듯 가볍게 솟아올랐다. 흐릿했던 시야가 순식간에 선명해지며, 귓가에는 싱그러운 바람 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선명하게 와닿았다. 몸은 가벼웠고, 발끝에서부터 느껴지는 숲의 흙냄새는 너무나도 생생하여 코끝을 간질였다.

이곳은 가상현실 게임, <엘더리아 크로니클>의 세계. 유진은 언제나 이 순간을 사랑했다. 현실의 팍팍한 그림자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는 순간.

“후으읍, 하아.”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이마를 짚었다. 살짝 붉은 기가 도는 금발 머리카락이 어깨를 스쳤다. 거울이라도 있다면 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아르테미스’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푸른 숲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엘프족 사냥꾼이었다. 날렵하고 유려한 활솜씨로 명성이 자자한 플레이어…가 되고 싶은 초보 모험가.

퀘스트 창을 스윽 훑었다. [심장부 숲의 붉은 이끼 채집 (0/10)]이라는 단순한 내용. 붉은 이끼는 약초 제작에 필요한 재료로, 초반 레벨업의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심장부 숲은 이름처럼 푸른 심장 숲의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고, 이 숲의 깊은 곳은 미지의 생물들로 가득했다. 조심해야 했다.

장궁을 등에 메고, 유진은 부드럽게 숲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엘프족 특유의 사뿐한 걸음걸이는 낙엽 한 장 건드리지 않을 듯 섬세했다. 숲은 그 자체로 거대한 생명체 같았다.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아름드리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었고, 햇빛은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바닥에 황금빛 조각들을 만들었다. 멀리서 흐르는 계곡물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고, 어디선가 영롱한 빛을 내는 나비 떼가 군무를 추며 지나갔다.

“와아….”

저절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수십 번을 들어와도 질리지 않는 풍경이었다. 현실의 스트레스가 사르르 녹아내리는 기분.

정신없이 숲의 아름다움에 심취해 걷던 중, 유진은 문득 이질적인 냄새를 맡았다. 흙과 이끼의 향기 사이에 스며든, 희미하지만 분명한 철분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에 와닿는 듯했다.

“여기는… 심장부 숲 가장자리인데.”

맵을 확인했다. 분명 심장부 숲의 경계 부근이었다. 이곳까지 위험한 몬스터가 내려오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긴장감에 활시위를 확인했다. 나무와 가죽으로 정성스레 만들어진 장궁이 손에 익숙하게 감겼다. 화살통에서 화살 하나를 뽑아 시위에 걸었다.

발걸음을 최대한 죽이고 덤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철분 냄새는 점점 짙어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소리. 마치 낡은 쇠붙이가 부딪히는 듯한, 혹은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불쾌한 소리였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가자, 작은 공터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유진의 눈이 커졌다.

공터 한가운데에, 인간형의 그림자가 서 있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라 희미했지만, 그 윤곽은 분명했다. 검은색 로브를 뒤집어쓴 채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 자세히 보니, 로브 아래로 드러난 피부는 병적으로 창백했으며, 손가락은 길고 앙상했다. 그리고 등 뒤로는, 짐승의 뼈를 연상시키는 기묘한 형태의 날개가 접혀 있었다. 날개에는 깃털 대신 마치 얇은 가죽이 덧대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그림자가 무언가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섬뜩하게 빛나는 검은 칼날. 칼끝에서는 검붉은 액체가 한 방울씩 떨어져 땅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이 피라는 것을 직감한 유진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림자는 공터 중앙에 쓰러져 있는, 이미 숨이 끊어진 야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털이 거칠고 송곳니가 날카로운 몬스터였다. 강인한 근력을 자랑하는 심장부 숲의 토박이, ‘숲의 흉포한 늑대’. 혼자서는 상대하기 버거운 중급 몬스터였다. 그런데 저 그림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쓰러뜨린 것이다.

공격해야 하나? 게임 시스템상, ‘어둠의 종족’은 대부분 적대 NPC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엘프족과 대립하는 세력이었고, 선공 시 바로 전투 태세로 돌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자는 공격 태세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공터의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유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림자를 응시했다. 그때, 그림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마치 유진의 존재를 눈치챈 것처럼.

“…!”

심장이 발악하듯 뛰어올랐다.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검은 로브 아래 드리워진 그늘진 얼굴이 천천히 유진을 향했다. 유진은 활시위를 더욱 강하게 당겼다. 언제든 화살을 날릴 준비를 마쳤다. 경고 메시지가 머릿속을 스쳤다. [경고: 적대 종족 발견. 선제공격 시 PvP 가능성 있음.]

로브 속 얼굴은 그림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 단순한 시스템 NPC의 시선이 아니었다. 어떤 깊이와 감정이 담긴, 살아있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림자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마치 무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유진은 화살을 날리지 못했다.

그림자는 더 이상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검은 눈동자만으로 유진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정적. 그리고 불현듯, 그림자가 허공으로 스르륵 몸을 녹이듯 사라지기 시작했다. 마치 안개가 흩어지듯, 잔상만을 남기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남겨진 것은 흉포한 늑대의 시체와, 땅에 스며든 검붉은 피, 그리고 유진의 심장 속에 남은 기묘한 떨림뿐이었다.

유진은 천천히 화살을 거두고 장궁을 내렸다.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방금 그건… 대체.”

퀘스트 창을 다시 열었다. [심장부 숲의 붉은 이끼 채집 (0/10)]. 이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뇌리에는 오직 검은 로브와, 뼈 날개, 그리고 자신을 꿰뚫어 보던 차가운 시선만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하나가 눈앞에 깜빡였다.

[업적: 금지된 조우 달성!]
[숨겨진 퀘스트: ‘어둠의 그림자를 쫓는 자’가 활성화됩니다.]

유진은 화면을 멍하니 바라봤다. 금지된 조우. 어둠의 그림자.
숲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이전과는 다른 이질적인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이제 숲은 더 이상 단순한 사냥터가 아니었다. 그녀는 방금, 숲의 경계를 넘어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제 막 시작된 미지의 이야기의 첫 페이지를 연 것처럼.

가슴 속에서, 묘한 설렘과 함께 작은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저 그림자의 정체를 알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온몸을 지배했다.

다음에 만난다면, 그때는 과연 어떤 이야기를 하게 될까? 그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자신의 <엘더리아 크로니클>이, 이제 막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뿐이었다.

유진은 늑대 시체 옆에 떨어진 검은 칼날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을 타고 온몸으로 퍼졌다. 칼날은 아직 미약하게나마 이계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칼날을 로브 속으로 숨겼다.
그리고, 숲의 더 깊은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금지된 그림자를 쫓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