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가라앉은 도시의 잔해 사이로, 김민준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소리는 죽은 듯이 가벼웠고, 시선은 날카롭게 주변을 훑었다. 무너진 고층 빌딩의 뼈대 사이로 부는 바람은 썩은 쇠와 말라붙은 피 냄새를 실어 날랐다. 세상은 죽었고, 그는 홀로 살아남아 그 죽음 속을 헤매는 유령 같았다.
허기진 위장이 거칠게 경련했다. 마지막으로 멀쩡한 음식을 먹은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가물거렸다. 이제는 썩지 않은 것이나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도 감사하게 여겨지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오늘은 기필코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낡은 방탄 조끼는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고, 허리에 찬 칼집 속 식칼은 녹슬어 있었다. 그의 유일한 무기이자, 친구였다. 등 뒤에 짊어진 배낭은 텅 비어가는 희망만큼이나 가벼웠다.
민준은 한때 거대한 쇼핑몰이었던 건물의 앙상한 입구를 노려봤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 날카로운 이빨처럼 튀어나와 있었고, 철골 구조물은 거인의 뼈대처럼 위태롭게 서 있었다. 저 안 어딘가에, 그는 작은 약국이 남아있기를 바랐다. 약이 필요했다. 열흘 전부터 왼쪽 팔의 상처가 곪아가고 있었다. 단순한 찰과상인 줄 알았는데, 고열과 함께 욱신거리는 통증이 그를 좀먹고 있었다.
“빌어먹을 세상.”
낮게 읊조리자 입술이 바싹 말라붙었다. 침을 꿀꺽 삼켰지만, 갈증은 가시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입구로 다가갔다. 폐허가 된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야생으로 변해버린 생물들이나 흉측하게 변이된 ‘괴물’들이 아니었다. 가장 위험한 것은 바로 인간이었다. 탐욕과 절망에 잠식된 인간.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무너진 간판이 바람에 흔들렸다. 민준은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밟지 않으려 애쓰며 어둠 속으로 발을 들였다. 플래시를 켰다. 미약한 불빛이 거대한 어둠을 갈랐다. 한때 화려했던 진열대는 텅 비어 부서져 있었고, 옷가지와 잡동사니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다. 곰팡이 냄새와, 썩은 살덩이의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역겨운, 고인 피 냄새.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먼지 쌓인 침묵만이 공간을 지배했다.
약국은 쇼핑몰 3층 구석에 있었다. 한때 안내 표지판이 있던 곳은 이제 녹슨 철골만 남아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민준은 본능에 의지해 움직였다. 층계를 오르는 발걸음은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절박했다. 팔의 통증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의식을 잃기라도 하면, 그대로 끝이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약한 존재는 살아남을 수 없었다.
3층에 다다랐을 때, 그는 인기척을 느꼈다. 쿵, 쿵, 쿵. 불규칙적이고 무거운 발걸음 소리. 심장이 발밑으로 곤두박질쳤다. 괴물인가? 아니면… 다른 생존자인가?
민준은 재빨리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식칼을 움켜쥔 손에 땀이 배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렌턴 불빛 아래, 한 남자가 약국 입구를 막고 서 있었다. 등 뒤에 짊어진 커다란 배낭, 익숙한 형태의 소총. 그리고 무엇보다 익숙한 뒷모습.
“이지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찢어질 듯한 고통과 함께 과거의 악몽이 의식을 파고들었다.
* * *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밤이었다.
폐허가 된 학교 건물. 이미 식량은 바닥났고, 며칠째 굶주림에 시달리던 우리는 지쳐 있었다. 창문은 깨졌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다. 밖에는 굶주린 괴물들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민준아, 더 이상은 못 버티겠어. 나가서 뭔가 찾아야 해. 아니면 다 같이 굶어 죽어.”
지훈이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당시 지훈은 내 유일한 친구이자, 마지막 동료였다. 우리는 함께 이 지옥에서 버텨왔다. 서로의 등 뒤를 지키며,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알아. 하지만 지금 나가면 위험해. 저 소리 들려? 최소 서너 마리는 되는 것 같아.”
“그럼 언제까지 기다려? 그냥 앉아서 죽으라는 거야?”
지훈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그의 눈빛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굶주림과 공포가 그를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의견 충돌 끝에 위험을 무릅쓰고 폐기된 마트에 가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트 진입로에서 괴물들에게 둘러싸이고 말았다. 압도적인 수.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림자들.
“젠장, 퇴로가 없어! 민준, 어떡하지?”
지훈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미끼가 될게. 네가 저 반대편으로 도망쳐서 지원 요청해. 다른 생존자들 있을 거야!”
그때만 해도 나는 순진했다. 지훈이 망설이는 줄 알았다. 그가 잠시 흔들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미 나를 버리려는 결심이 서 있었다는 것을, 나는 너무 늦게 알았다.
“민준아….”
그가 부르는 내 이름은 마치 비웃음처럼 들렸다. 내가 괴물들에게 달려들려는 순간, 그의 손이 내 등 뒤를 강하게 밀쳤다. 휘청이는 내 몸은 그대로 괴물 떼 한가운데로 굴러떨어졌다.
“이… 이지훈!”
절규하듯 외쳤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뒷모습은 어둠 속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괴물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내 몸을 할퀴고 찢었다. 살점이 뜯겨나가는 고통 속에서도, 내 머릿속을 채운 것은 오직 그의 배신이었다. 그 친구의 차가운 눈빛과, 내 등을 밀치던 비정하고도 힘없는 손길.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 배신감은 육체의 상처보다 더 깊이 영혼을 갉아먹었다. 살아남은 이유. 그것은 오직 하나였다.
복수.
* * *
“이지훈… 네놈이 왜 여기에….”
민준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고열로 흐릿했던 정신이 또렷해지는 동시에, 팔의 통증 따위는 잊힐 만큼 거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배신자. 내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그놈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지훈은 약국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의 배낭이 묵직해 보이는 걸로 보아, 이미 꽤 많은 물건을 챙긴 모양이었다.
민준은 숨죽이며 지훈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봤다. 소총은 그의 등에 매달려 있었고, 손에는 묵직한 가방이 들려 있었다. 약탈한 약품들이겠지.
지훈이 약국 카운터 뒤편으로 사라졌다. 민준은 기회를 노렸다. 지금이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이런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민준은 칼을 고쳐 쥐고 그림자처럼 약국 입구로 향했다. 삐걱이는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냄새와 함께 약품 특유의 향이 코를 스쳤다.
“젠장, 이거밖에 없어?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잖아!”
안쪽에서 지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그가 약품들을 뒤지는 소리. 플라스틱 통이 바닥에 굴러떨어지는 소리.
민준은 한 걸음 한 걸음 조용히 발을 옮겼다. 그의 눈은 복수심으로 이글거렸다. 과거의 상처가 고통스러운 환상처럼 눈앞을 아른거렸다.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그 순진한 김민준이 아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이 그를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었다.
코너를 돌자, 지훈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진열장을 뒤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등 뒤에 매달린 소총이 희미하게 빛났다. 완벽한 기회였다.
민준은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발소리는 바닥에 쌓인 먼지조차 깨우지 않을 만큼 조용했다.
“이지훈.”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
지훈의 어깨가 움찔했다. 그는 천천히, 마치 굳어버린 로봇처럼 몸을 돌렸다. 플래시 불빛 아래 드러난 그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지만, 민준의 기억 속 그 배신자의 모습 그대로였다.
지훈의 눈동자가 민준을 발견하는 순간, 경악과 함께 공포로 물들었다.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김… 김민준… 네가… 어떻게…?”
민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칼을 든 손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의 눈빛은 지옥에서 온 망령처럼 차가웠고, 그 안에는 잊지 못할 배신감과 처절한 복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궁금하다고? 네놈에게 물어볼 말이 많다, 이지훈.”
그의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뼛속까지 스며드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지훈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졌다. 그는 뒤늦게 등 뒤의 소총을 잡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민준은 지훈의 어깨를 붙잡고 벽으로 거칠게 밀어붙였다. 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먼지가 피어올랐다. 지훈의 손에서 가방이 떨어져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것은 멸균 붕대, 항생제, 소독약 등, 민준이 그렇게 찾아 헤매던 귀한 약품들이었다.
팔의 고통이 다시 밀려왔지만, 민준은 개의치 않았다. 그의 눈은 오직 지훈만을 향했다.
“네가 나를 죽음으로 밀어 넣었을 때, 나는 네가 죽길 바랐어. 하지만 살아남았다. 오직 너를 찾아내 복수하기 위해서.”
민준의 식칼이 지훈의 목에 닿았다. 차가운 쇠붙이의 감촉에 지훈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기억나냐, 지훈아? 네가 날 배신했던 그날 밤의 빗소리.”
그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지훈을 노려봤다.
이 지옥에서, 살아남은 악몽들이 마침내 서로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시작은, 바로 지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