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독립적인 단편 소설

차가운 바람이 무심하게 뺨을 스쳤다. 수백 길 아래로 낭떠러지가 아득하게 펼쳐진 깎아지른 바위산 정상. 운현은 비틀거리는 몸으로 겨우 균형을 잡았다. 찢어진 소매 사이로 드러난 맨살에는 흉측한 상흔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굳은살 박힌 손가락을 타고 바위 틈새로 스며들었다.

검은 하늘 아래 홀로 선 그의 눈빛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망령처럼 이글거렸다. 손에 쥐인 검은 한때 명가의 보검이라 불리던 것이었으나, 이제는 날이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검신마저 뒤틀려 있었다. 허나, 운현의 손에 들린 그 검은 천근추처럼 무거웠고, 그의 삶의 유일한 의미였다.

“도강….”

삭풍에 섞여 나간 이름이 메아리쳤다. 그 이름 석 자에는 피눈물과 저주, 그리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원한이 서려 있었다.

2년 전, 운현은 태화문의 촉망받는 재성이었다. 사형 도강과는 의형제를 맺고 피를 나눈 형제나 다름없었다. 그들은 함께 강호를 누비며 정의를 외쳤고, 무림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운현은 도강의 올곧은 성품과 뛰어난 지략을 존경했고, 도강은 운현의 천재적인 검재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세상은 그들을 ‘태화 쌍벽’이라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교의 사악한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두 사람은 깊은 산중으로 향했다. 열흘 밤낮을 사투 끝에 마교의 흑막을 밝혀냈을 때, 운현은 심장이 찢어지는 배신을 경험했다.

“운현아, 미안하다.”

싸움에 지쳐 겨우 몸을 지탱하던 운현의 등 뒤로 도강의 검이 깊숙이 박혔다. 따뜻하다고 믿었던 검신은 차가운 얼음처럼 심장을 관통했다. 운현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자신을 조롱하듯 내려다보는 도강의 싸늘한 눈빛이었다.

“이것은 모두 너를 위함이다, 운현아. 네 검재는 뛰어나지만, 심성이 너무 물러. 강호는 그런 너를 감당하기에 너무나 험난한 곳이다. 내가 널 대신해 이 모든 짐을 짊어질 테니, 편히 쉬어라.”

도강은 마교의 잔당들이 미처 수습하지 못한 증거들을 운현의 품에 넣어두고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후, 운현은 마교의 앞잡이가 되어 태화문의 기밀을 팔아넘긴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도강은 운현이 남긴 거짓 증거를 들고 나타나 정의로운 협객 행세를 했다. 분노와 절규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온몸의 기혈이 역류하고 내장이 파열된 상태에서 운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진 그의 몸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하지만 운현은 죽지 않았다. 죽지 못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그는 오직 복수만을 갈망했다. 부러진 팔다리는 스스로 붙이고, 뒤틀린 기혈은 억지로 바로잡았다. 살아남기 위해, 복수하기 위해 그는 인간이 아닌 귀신이 되었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흘렀다.

“후우….”

긴 숨을 내쉰 운현은 눈을 감았다. 상상 속에서 도강은 이미 수백 번은 그의 검에 베이고 피를 토했다. 이제는 현실에서 그 환상을 실현시킬 때였다.

그의 소식을 들었을 때, 도강은 이미 태화문의 장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흑막을 파헤친 영웅이자, 뛰어난 검재로 추앙받으며 강호의 새 지배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운현이 모든 것을 잃은 사이, 도강은 모든 것을 얻은 것이다.

운현은 깊은 산속에서 내려와 강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는 곳마다 도강의 영웅담이 그의 귀를 찔렀다. 사람들은 도강을 칭송하며 그의 검술을 흉내 냈다. 그럴수록 운현의 마음속 복수의 칼날은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다.

어느 날, 운현은 한 객잔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우연히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그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자네들, 태화 장문 도강 대협께서 이번에 삼협연맹 총좌를 맡으신다는 소식 들었는가?”
“오호, 역시 도강 대협이시지! 그분이라면 강호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을 거야.”
“하긴, 2년 전 마교의 대대적인 침투를 막아내고 배신자 운현을 처단한 것도 도강 대협의 공이었지 않나!”

운현은 들고 있던 술잔을 꽉 쥐었다. 나무로 만든 술잔이 그의 손아귀에서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파편들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했다. 이미 그의 육신은 고통에 무뎌진 지 오래였다.

“운현… 이 배신자 놈이 아직도 살아남아 객잔에서 술이나 퍼마시고 있다니!”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운현은 고개를 돌렸다. 덩치 큰 사내가 검을 뽑아 들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내는 2년 전, 운현의 친우라 자처하던 위명이었다. 그는 도강의 심복이자, 운현을 배신자로 몰아세우는 데 앞장섰던 자였다.

“위명….”

운현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저 차갑고 메마른 바람 소리 같았다.

“네놈이 감히 살아있었을 줄이야! 도강 대협께서 얼마나 노심초사하셨는지 아느냐? 당장 나를 따라 태화문으로 가자. 네 죄를 고하고 단죄를 받아야 마땅하다!”

위명은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그의 검술은 과거에도 그리 뛰어나지 않았고, 지금은 운현의 눈에 한없이 느리고 서툴게 보였다. 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위명의 검이 그의 심장을 향해 맹렬히 파고들었다. 검끝이 그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 운현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팟!

그의 손은 마치 강철 집게처럼 위명의 검날을 낚아챘다. 쨍그랑! 맑은 쇳소리가 객잔을 울렸다. 위명은 자신의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운현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어렸다.

“죄… 단죄….” 운현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네놈이 감히 그 말을 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그의 손에 쥐인 검날이 위명의 손목을 그대로 꿰뚫었다. 비명조차 지를 새도 없이, 위명의 손에서 힘이 풀리고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운현은 검을 뽑아낸 후, 피가 솟구치는 위명의 손목을 걷어찼다. 위명은 비명을 지르며 객잔 바닥을 굴렀다. 객잔 안의 모든 시선이 운현에게 꽂혔다. 경악과 공포, 그리고 분노가 뒤섞인 시선들이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전해라. 내가 살아 돌아왔다고. 그리고 태화문 장문 도강에게 전해라. 2년 전, 그가 나에게 선사한 고통을, 이제 내가 돌려줄 때가 되었다고.”

운현은 바닥에 뒹구는 위명을 지나쳐 객잔 문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술렁거리는 강호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자는… 저자는 정말 운현인가?”
“살아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찌 저리 변했단 말인가!”
“끔찍한 살기였다… 저 정도라면 태화 장문도….”

운현의 등장은 강호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다. 그의 복수를 향한 행보는 거침없었다. 도강의 심복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옛날의 배신에 대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의 손에 스러져간 자들은 하나같이 경악과 후회에 찬 얼굴로 죽어갔다. 사람들은 운현을 ‘귀신 검마’라 부르며 공포에 떨었다.

마침내, 운현은 태화산 입구에 섰다. 웅장하고 위풍당당한 태화문의 정문은 2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화려했다. 입구에는 수많은 문도들이 삼엄하게 경계를 서고 있었다.

“누구냐! 태화문에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없다!”

수십 명의 문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운현은 그들을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도강을 불러라. 2년 전, 나에게 죽음을 선물했던 것처럼, 이제 내가 그에게 죽음을 선사할 차례이니.”

운현의 말에 문도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들은 운현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의 싸늘한 눈빛과 비참한 몰골에서 흘러나오는 살기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꼈다.

“건방진 놈! 당장 물러서지 않으면…!”

운현은 더 이상 그들의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그의 몸이 한 줄기 섬광처럼 움직였다. 쨍그랑! 챙! 콰앙!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비명, 그리고 바닥에 쓰러지는 육중한 소리들이 뒤섞였다. 운현의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문도들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그의 검은 더 이상 태화문의 정교하고 유려한 검술이 아니었다. 살의로 가득 찬, 오직 적을 죽이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대련장을 지나, 운현은 태화문의 중심부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수많은 태화문의 고수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비단 옷을 걸친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위엄 있고 단정한 모습, 강호의 지배자다운 기품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도강이었다.

도강의 얼굴에는 차분함과 냉정함이 감돌았다. 운현을 발견한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깊고 푸른 바다 같았다.

“운현… 살아있었구나.”

도강의 목소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한 어조였다. 허나, 운현의 귀에는 그 모든 것이 위선과 조롱으로 들릴 뿐이었다.

“그래, 살아 돌아왔다. 너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운현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네 덕분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 가족도, 문파도, 그리고 내 이름마저. 하지만 덕분에 배웠다. 강호의 진정한 얼굴이 어떤 것인지. 친구의 가면을 쓴 배신자의 칼날이 얼마나 잔혹한지.”

도강은 고개를 저었다. “여전히 과거에 갇혀 있구나. 운현. 나는 너를 위했던 것이다. 너는 너무 순수했고, 너무 강직했어. 그런 너로는 강호를 이끌 수 없었다. 나는 너의 희생을 발판 삼아 이 강호를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마교의 잔당을 완전히 소탕했고, 강호에 평화를 가져왔지. 네 희생은 헛되지 않았어.”

운현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휩싸였다. 그가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돌아온 것은 저런 역겨운 변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개소리! 나의 모든 것을 빼앗고, 나의 이름을 더럽힌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지껄일 수 있느냐! 네놈의 추악한 야망을 포장하기 위한 역겨운 변명일 뿐!”

운현은 기다리지 않았다. 그의 검이 섬광처럼 도강을 향해 날아들었다. 치열한 접전이 시작되었다. 태화문의 고수들이 운현을 막아서려 했지만, 운현의 검에는 그 어떤 자비도 없었다. 그는 그저 도강에게 가닿기 위해, 오직 그를 베어버리기 위해 움직였다.

도강은 태연하게 운현의 검을 받아냈다. 그의 검술은 2년 전보다 더욱 노련하고 강해져 있었다. 운현이 과거의 모든 것을 잃고 새로운 길을 걸어왔다면, 도강은 운현의 배신으로 얻은 힘으로 더욱 견고한 탑을 쌓은 것이었다.

“네 검은 여전히 날카롭구나, 운현. 허나, 분노만으로는 나를 이길 수 없어. 분노는 너를 눈멀게 할 뿐이다.”

도강은 여유롭게 운현의 맹렬한 공격을 막아냈다. 그의 검은 마치 바람처럼 부드러웠고, 때로는 폭풍처럼 강렬했다. 운현의 검과 도강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굉음이 태화산 전체를 뒤흔들었다.

운현은 숨을 헐떡이며 잠시 물러섰다. 손목이 저릿했다. 도강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검이 운현의 심장을 향해 꿰뚫고 들어왔다. 죽음을 각오한 일격이었다.

“지금처럼 물렀던 네 심성이 결국 너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구나!”

그 순간, 운현의 눈빛이 번뜩였다. 그는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발 더 나아갔다. 도강의 검이 그의 왼쪽 어깨를 꿰뚫었다. 피가 솟구쳤지만, 운현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오른손에 쥐인 검이 도강의 복부를 향해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콰직!

살을 찢고 뼈를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강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당황과 고통이 스쳤다. 운현의 검은 그의 복부를 깊숙이 꿰뚫고 있었다.

“하아… 하아… 네놈에게… 내가… 물렀다고…?”

운현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그의 왼쪽 어깨에서는 피가 철철 흘렀지만, 그의 눈빛은 승리의 광기로 빛났다. 그는 도강의 복부에 박힌 검을 더욱 깊이 쑤셔 넣었다.

“이것이… 너를 향한… 내 답이다….”

도강은 무릎을 꿇었다. 손에서 힘이 풀려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눈으로 운현을 바라보았다.

“운현… 너는… 괴물이… 되었구나….”

“괴물?” 운현은 검을 뽑아낸 후, 피투성이 검을 도강의 목에 댔다. “날 이렇게 만든 것이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너의 손에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은 내가, 그 고통을 되갚아주러 왔을 뿐이다.”

“크흐읍….”

도강은 고통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숨을 쉬려 애썼다. 그의 눈에는 뒤늦은 후회와 절규가 스쳐 지나갔다. 운현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과거, 자신을 존경하던 그 눈빛이 아니었다. 증오와 공포에 젖은, 비참한 눈빛이었다.

“편히 쉬어라, 도강아. 이제 내가… 너 대신… 이 모든 짐을… 짊어질 테니.”

운현의 입에서 2년 전 도강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운현의 마지막 자비이자, 가장 잔혹한 저주였다. 그의 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스윽.

따뜻한 피가 검신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강의 몸이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눈은 허공을 응시한 채 굳어 있었다. 태화문의 장문, 강호의 지배자로 군림하던 도강은 그렇게 운현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정적이 흘렀다. 태화문의 모든 문도들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는 경악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 뒤섞여 있었다.

운현은 뒤틀린 몸으로 겨우 서 있었다. 그의 온몸은 피투성이였고, 왼쪽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솟구쳤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더 이상 분노도, 증오도 없었다. 오직 공허함만이 가득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검은 하늘은 여전히 무심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2년 전, 그날처럼.

복수는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토록 갈망했던 복수는, 그의 영혼을 더욱 깊은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을 뿐이었다.

운현은 텅 빈 눈으로 도강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는 뒤돌아섰다. 그의 발걸음은 힘없이 휘청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피 묻은 검을 든 채 홀로 태화산을 내려갔다.

복수는 끝났지만, 그의 삶은 이제 어디로 향해야 할까. 운현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람만이 그의 찢어진 소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에게 남은 것은, 복수가 남긴 깊고 거대한 상처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