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은 가물고 하늘은 잿빛이었다. 뫼골 마을의 허리끈처럼 굽이진 논두렁은 생기 없이 메말라갔고, 갈라진 흙은 농민들의 거친 손처럼 거북이 등껍질 같았다. 스물 남짓한 한강은 쪼그려 앉아 마른 볏대 끝을 만졌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푸릇한 기운으로 가득했던 이곳은 이제 희망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다.
“한강아, 그만하렴. 이제 저 볏단으로는 새 한 마리도 못 먹여 살릴 거다.”
등 뒤에서 쉰 목소리가 들렸다. 촌장 박 노인이었다. 그의 주름진 얼굴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한숨이 깃들어 있었다. 흉년은 익숙한 손님이었지만,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가혹했다.
“알아요, 촌장님. 그래도… 혹시나 해서요.”
한강은 체념 섞인 목소리로 답하며 일어섰다. 그의 등에는 거친 삼베 옷 위로 땀 얼룩이 선명했다. 그의 몸은 농사일로 다져져 단단했지만, 그 어떤 근육도 메마른 대지에서 양식을 쥐어짜낼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말발굽 소리가 흙먼지 속에서 울려 퍼졌다. 뫼골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저 소리는 늘 불길한 소식과 함께 찾아왔다.
“제국군이다!”
누군가 외쳤다. 마을 어귀에서 번쩍이는 창날과 붉은 제복이 모습을 드러냈다. 선두에 선 자는 비단 도포를 입은, 배가 불룩한 관리였다. 백수령이라는 자였다. 그는 언제나처럼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마을을 훑었다. 그의 뒤에는 열 명이 넘는 제국군 병사들이 서슬 퍼런 칼을 차고 위압적으로 서 있었다.
백수령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외쳤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 세금은 준비되었느냐? 황제 폐하께 바칠 곡식이 어디 있느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떨구었다. 낼 곡식이 없었다. 모두가 알았다.
박 노인이 겨우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섰다.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간청했다. “백수령 나리… 소인들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허나 올해는 정말… 정말 너무 가물어서…”
“가물어서? 그래서 황제 폐하의 곳간을 비워두겠다는 말이냐!” 백수령은 코웃음을 쳤다. “변명은 역적의 핑계일 뿐! 당장 내어놓아라! 정해진 대로 곡식을 바치지 못하면, 그대들의 피로 그 값을 치르게 될 것이다!”
병사들이 웅성거리던 마을 사람들을 향해 창을 겨눴다. 살기 어린 위협이었다. 아이들은 어미의 치마폭으로 숨어들었고, 노인들은 공포에 질려 떨었다.
한강의 주먹이 저절로 쥐어졌다. 작년에 여동생을 잃었다. 병에 걸렸지만 약을 살 돈도, 의원을 부를 돈도 없었다. 제국은 세금만 거둬갈 뿐, 백성들의 죽음에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곡식이 없으면… 밭을 뺏어라!” 백수령이 턱짓으로 명령했다. “집을 뒤져 가치 있는 것은 모두 가져오너라! 내 오늘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병사들이 마을로 들이닥쳤다. 노인들이 애써 모아둔 보잘것없는 재산을 빼앗고, 울부짖는 여인들의 품에서 갓난아이를 떼어놓으려 했다. 억장이 무너지는 광경이었다.
“이놈들! 이럴 수는 없다!”
한강이 참지 못하고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져 있었지만, 또렷하게 울렸다. 병사 하나가 그를 노려보며 다가왔다.
“어디 감히 평민 따위가 주둥이를 놀리느냐? 네 놈 목숨이 아깝지 않은 게냐!”
병사는 한강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었다. 한강은 그를 노려봤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체념한 농민의 것이 아니었다. 불길이 일렁이는 맹수의 눈빛이었다.
“당신들이… 황제 폐하의 이름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한강이 내뱉었다.
“뭣이! 이 역적 놈을 당장 끌어내라!” 백수령이 격노했다.
병사들이 한강에게 달려들었다. 한강은 순간적으로 몸을 틀어 멱살을 잡았던 병사의 손목을 비틀었다. 농기구를 다루던 힘과 밭을 일구던 끈기가 순간적으로 무술의 움직임으로 변모했다. 병사는 고통에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밭을 갈던 쇠스랑이 들려 있었다. 녹이 슬고 낡았지만, 그의 손에 들리자 마치 날카로운 창처럼 위협적으로 보였다.
“감히 대들 생각인가!” 또 다른 병사가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한강은 쇠스랑을 휘둘렀다. 밭을 고르던 익숙한 동작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병사의 칼이 쇠스랑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한강은 이어서 쇠스랑 손잡이로 병사의 복부를 찍었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병사는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마을 사람들은 경악했다. 한강이 제국군 병사를 쓰러뜨렸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저놈을 죽여라! 당장 죽여버려라!” 백수령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남은 병사들이 일제히 한강에게 달려들었다. 한강은 뒷걸음질 치며 쇠스랑을 단단히 잡았다. 그는 무술을 배운 적 없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매일 몸을 움직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는 뫼골의 흙먼지와 땀방울, 그리고 억눌린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는 쇠스랑으로 병사들의 칼을 막고 쳐냈다. 농기구는 칼날처럼 날카롭지 않았지만, 그의 팔 힘과 끈기는 그 어떤 숙련된 병사 못지않았다. 번뜩이는 쇠스랑이 병사들의 무릎과 정강이를 겨냥했다. 병사들은 고통에 신음하며 물러났다.
“한강아! 우리가 돕겠다!”
박 노인이 옆에 서 있던 노인의 손에 쥐여 있던 괭이를 빼앗아 들고 외쳤다. 그의 뒤로 마을 사람들이 몽둥이, 쇠스랑, 낫 등 손에 잡히는 대로 무기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굶주림과 멸시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의 눈빛에, 한강이 일으킨 작은 불꽃이 옮겨붙고 있었다.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이들에게는 오직 분노만이 남았다.
“이… 이 미개한 놈들이… 감히!” 백수령은 말을 더듬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의 얼굴에는 오만함 대신 공포가 번졌다.
병사들은 갑자기 달려든 수십 명의 농민들 앞에서 잠시 당황했다. 한 명 두 명 쓰러지는 병사들을 보며, 백수령은 다급하게 외쳤다.
“후퇴! 후퇴하라! 본대에 연락해라! 역적 놈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의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한강이 던진 쇠스랑이 그의 말 다리 앞에 박혔다. 말은 놀라 날뛰었고, 백수령은 그만 안장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나뒹굴었다.
“나리! 괜찮으십니까!” 병사들이 그를 부축하려 달려들었다.
한강은 쇠스랑을 다시 움켜쥐고 그들을 노려봤다. “다시는 이곳에 발붙일 생각 마라! 황제의 이름으로 이 땅을 유린하려 한다면… 그때는 이 쇠스랑이 너희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다!”
패배한 병사들은 백수령을 부축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그들이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사라지고, 마을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마을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봤다. 그들의 얼굴에는 승리의 환희와 동시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교차했다. 그들은 제국군을 물리쳤다. 하지만 그 대가는 무엇일까?
그때, 멀리서 타오르는 불길이 보였다. 병사들이 도망치며 마을 어귀의 헛간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불길은 빠르게 번져갔고, 마른 볏단과 초가집을 삼키기 시작했다.
“불이야!”
누군가 외쳤다. 마을 사람들은 필사적으로 불을 끄려 했지만, 불길은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수준이었다. 한강은 망연히 불타는 헛간을 바라봤다. 그들의 보잘것없는 재산과 얼마 남지 않은 식량이 연기 속에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 어떡해야 합니까, 한강아?” 박 노인이 눈물을 글썽이며 물었다.
한강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했다. 재와 연기 속에서도 희미하게 빛나는,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를. 그것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이자,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는 자들의 맹세와 같았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습니다, 촌장님.”
한강의 눈빛은 불길처럼 이글거렸다. 그는 쇠스랑을 다시 단단히 쥐었다. 그 끝은 이미 제국을 향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뫼골의 농민이 아닙니다.”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는 천둥처럼 거대했다.
“우리는… 반란군이다.”
불길은 하늘을 붉게 물들였고, 뫼골 마을의 어둠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새벽은 그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이름 없는 영웅들의 시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