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푸른 검, 붉은 피**
운령산맥의 푸른 장막이 걷히고 첫 새벽이 찾아올 때였다. 골짜기마다 서린 안개가 물러나며 태고의 암석들이 그 웅장한 자태를 드러냈다. 류청은 해묵은 고목의 가지에 앉아 먼 산을 응시하고 있었다. 스무 해를 갓 넘긴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동자에는 세파를 겪은 듯한 깊은 고뇌가 서려 있었다. 청운검문(靑雲劍門)의 촉망받는 제자로서 그는 언제나 흔들림 없는 푸른 소나무 같았다. 하지만 오늘, 그의 검집에 매달린 푸른 끈처럼, 류청의 마음속에도 작은 파동이 일렁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산맥 깊은 곳에서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기운도, 맹수의 기운도 아닌, 이질적인 무엇이었다. 장문인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류청을 비롯한 몇몇 수제자들에게 정찰을 명했다. 류청은 이른 새벽부터 운령산맥의 험준한 산세를 따라 이동하며 그 기운의 근원을 찾고 있었다.
“크윽…!”
정적이 흐르던 숲속에서 날카로운 신음과 함께 섬뜩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류청의 심장이 순간 얼어붙었다. 맹수의 울음소리도, 인간의 비명도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비단이 찢기는 듯, 아니, 맑은 옥구슬이 깨어지는 듯한 처연한 소리였다.
류청은 망설임 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날렸다. 나뭇가지 사이를 짐승처럼 빠르게 헤치고 나아가자, 이내 시야가 트인 작은 암석 지대가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광경에 류청은 숨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다섯 명의 사내들이 한 여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사내들은 허름한 차림에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들의 손에는 녹이 슨 칼과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류청의 시선이 꽂힌 것은 사내들이 아니었다. 그들이 포위하고 있는 여인이었다.
여인은 흡사 밤하늘의 은하수를 머금은 듯한 신비로운 푸른빛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다. 숲의 모든 생명이 그녀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듯, 그녀의 피부는 마치 비단처럼 매끄러웠고, 그 위로 아주 미세한 은빛 비늘이 햇빛에 반짝였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마치 태고의 숲이 응축된 것처럼 영롱했으며, 동시에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서는 거대한 날개가 찢겨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붉은 피가 은빛 비늘 사이로 솟아나와 하얀 옷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하하! 이봐, 이 귀한 것을 어디다 쓰려고 했지? 어디 팔아먹으려다가 걸렸어?”
“흥! 이 요망한 것들… 인간 세상에 나타나 우리 곡식을 망치더니, 잡히니 고작 이런 모습이냐?”
사내들은 여인을 조롱하며 칼끝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여인은 상처 입은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 흐르지 않았지만, 그 모습은 류청의 심장을 찢는 듯했다. 인간 세상에서 ‘요물’이라 불리며 금기시되는 존재들, 바로 ‘숲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청운검문에서도 늘 그들에 대한 경계와 섬멸을 가르쳐왔다. 인간과 다른 존재는 위협이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하지만 류청은 차마 눈을 감을 수 없었다. 그녀의 모습은 그 어떤 요사스러움도 아닌, 그저 상처 입은 존재의 처절한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그의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솟구쳤다. 이성으로 누르려 해도, 본능적으로 터져 나오는 의협심을 막을 길이 없었다.
“멈춰라.”
류청의 목소리는 칼날처럼 날카롭게 정적을 갈랐다. 사내들의 시선이 일제히 류청에게 향했다. 류청은 어느새 그들 앞에 당당히 서 있었다. 허리에 찬 푸른 검은 아직 뽑지 않았으나,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만으로도 사내들은 움찔했다.
“어… 어느 문파의 어르신이신지?”
“내 누군지는 중요치 않다. 당장 그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사라져라.”
류청의 푸른 눈동자가 사내들을 꿰뚫었다. 사내들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숫자를 믿고 덤벼들었다.
“젠장! 어디서 굴러온 놈이 끼어드는 거야? 우리가 먼저 발견했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류청의 검집에서 푸른 검이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쉭! 쉭! 하는 파공성과 함께 사내들의 손에 들린 칼과 몽둥이가 허공으로 솟구쳤다. 그들의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검기가 스쳐 간 붉은 선이 그어져 있었다. 류청의 검은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정확히 그들의 무기만을 노렸다.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마라. 산맥의 존재들은 그대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류청의 목소리는 싸늘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를 담고 있었다. 사내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속으로 도망쳤다.
정적이 다시 찾아왔다. 류청은 검을 칼집에 넣고 천천히 여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인은 여전히 그 자리에서 류청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에는 더 이상 분노나 슬픔이 없었다. 대신, 깊은 경계심과 함께 미묘한 호기심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류청은 조심스럽게 한 발짝 다가섰다.
“괜찮으시오…?”
그의 목소리는 예상보다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여인은 답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의 찢겨진 날개를 감싸 쥔 채, 류청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이었다. 류청은 그녀의 날개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피를 보았다. 인간의 피와는 다른, 묘한 빛을 띠는 붉은색이었다.
“다쳤소. 내가… 치료를…”
류청이 손을 뻗으려는 순간, 여인의 몸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더욱 강렬하게 빛나더니, 작은 나뭇가지들이 그녀를 감싸는 듯 솟아올랐다. 거부의 의사가 명확했다.
류청은 순간 멈칫했다. 그녀는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인간 자체를 경계하는 것일까?
그때, 여인의 굳게 닫혔던 입술이 가늘게 벌어졌다. 소리 없이, 하지만 류청의 귓가에는 명확하게 들려오는 듯한 속삭임.
‘…인간.’
그 한마디에 류청은 온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았다. 인간으로서, 그리고 아마도 그녀의 종족에게는 적대적인 존재로서. 하지만 그 속삭임 속에는 적의 대신, 형용할 수 없는 깊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류청은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무한한 밤하늘과 별들이 담겨 있는 듯했다. 그는 이전에 느껴본 적 없는, 강력한 이끌림을 느꼈다. 금기된 존재, 종족을 뛰어넘어 마주한 첫 만남에서, 류청의 푸른 검은 이미 붉은 피를 흘리는 이의 편에 서 있었다.
여인은 더 이상 도망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류청을 응시할 뿐. 류청은 문득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청운검문이 아닌, 태초의 숲 한가운데임을 깨달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무협의 정의도, 인간 세상의 질서도 초월하는, 그 어떤 이야기의 서막이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 만남이 그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변화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임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