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밤, 숨 막힐 듯한 정적만이 흐르는 대학 도서관의 깊은 곳. 낡은 책 냄새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눅눅한 기운이 뒤섞인 ‘제한된 자료실’은 언제나 나 이준의 안식처였다. 다른 학생들은 퀴퀴한 냄새가 난다며 피했지만, 나는 이곳의 잊힌 역사와, 감춰진 이야기들이 좋았다. 특히, 폐쇄된 지 오래된 동관 자료실은 나만이 아는 비밀의 방이나 다름없었다.
“젠장, 또 이거야?”
오래된 나무 사다리를 삐걱이며 올라서자, 손에 잡힌 것은 얇은 가죽으로 엮인 책 한 권. 제목도, 저자도 없는 무미건조한 표지. 이미 지난주에 정리해 두었던 구획인데, 이 책만은 자꾸만 제자리를 벗어나 엉뚱한 곳에 꽂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숨기려 애쓰는 것처럼.
이상했다. 이곳의 모든 책은 목록화되어 있었고, 내 손으로 직접 정리했다. 그런데 이 ‘무명’의 책은 단 한 번도 전산 목록에 뜬 적이 없었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짜증 섞인 호기심에 책을 빼들었다.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낡은 가죽 표지는 얼룩덜룩했고, 손에 닿는 감촉은 묘하게 차가웠다. 책등을 돌려 제대로 꽂아 넣으려던 순간, 손끝에 작은 홈이 느껴졌다. 자세히 보니, 책꽂이 뒤편, 벽면과 책장 사이에 얇은 틈새가 보였다.
‘설마.’
호기심은 이성을 압도했다. 손을 틈새로 밀어 넣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것은 딱딱하고 매끄러운 무언가였다. 책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그것을 끌어냈다.
손에 들린 것은 한 뼘 남짓한 크기의 검은 상자였다. 흑요석처럼 매끄럽고 윤이 났지만, 그 빛은 흡수하는 듯 깊고 어두웠다. 아무런 문양도, 장식도 없었다. 마치 하나의 거대한 검은 돌덩이를 깎아 만든 것처럼 완벽한 직육면체였다. 상자에는 연결 부위나 경첩 같은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열어야 할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 상자를 쥐는 순간, 손끝에서부터 오싹한 냉기가 퍼져나왔다. 단순한 차가움이 아니었다.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한 한기였다. 동시에, 내 의식 속으로 낯선 소리가 파고들었다.
*…존재…*
속삭임이었다. 분명히 내 귀가 아닌, 내 머릿속에서 울리는 소리였다. 짧고, 깊고, 아득한 음성. 환청인가? 너무 피곤해서 그런가?
상자를 자세히 들여다봤다. 손가락이 닿았던 부위에, 아주 희미하게, 검은 표면 아래에서 푸른 빛이 깜빡이는 것을 보았다. 문신처럼 섬세하고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이었다.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환각이 아니었다.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도서관의 쥐 죽은 듯한 정적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이곳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착각이 들 정도로. 나는 상자를 꽉 움켜쥐고 서둘러 자료실을 빠져나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
기숙사 방은 도서관만큼이나 적막했다. 창밖으로는 인적 드문 캠퍼스의 가로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책상 위에 상자를 올려두었다. 방금 전까지 손바닥에 느껴지던 냉기가 아직도 잔상처럼 남아있었다.
상자는 꼼짝 않고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여전히 검고 매끄러웠다. 어디를 봐도 여는 방법은 알 수 없었다.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가장자리를 따라 틈이 있는지, 누르면 들어가는 부분이 있는지.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하나의 완벽한 검은 덩어리였다.
*…길…*
다시, 그 소리. 이번엔 조금 더 길고 명확했다. 분명히 내 머릿속이었다. 심장이 다시 한번 쿵, 하고 떨어졌다. 공포였다. 알 수 없는 미지의 존재가 내 머릿속에 말을 걸고 있었다.
상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홀린 듯이 손을 뻗어 상자의 표면을 만졌다. 아까와 같은 냉기가 전해졌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이 닿은 부위에서 푸른 문양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선명하게, 잠시 동안 지속되었다. 복잡하게 얽힌 선들과 점들. 그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세포처럼 미묘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홀린 듯 손가락을 문양 위로 스치듯 움직였다. 문양은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빛을 뿌리는 듯했다. 차가운 상자에서 온기가 느껴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대체 뭐야.”
혼잣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이 상자는 분명히,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문양의 복잡한 형태를 무심코 따라가던 손가락이, 문양의 중심부에 있는 작은 돌기를 눌렀다. 너무나 미세해서 그 전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딸깍!*
작은 기계음이 고요한 방을 갈랐다.
상자는 열리지 않았다.
대신, 흑요석처럼 검고 매끄러웠던 상자의 표면이, 마치 물결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일렁이는 것이 아니었다.
상자 표면의 모든 푸른 문양들이 일제히 빛을 발하며, 상자 자체가 거대한 숨을 쉬는 듯 부풀어 오르는가 싶더니, 이내 서서히 갈라지기 시작했다.
*지이이잉…*
낮게 깔리는 진동음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짓눌리는 듯했다. 숨쉬기가 버거웠다. 목구멍 안에서 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갈라진 틈 사이로, 빛을 *흡수*하는 듯한, 절대적인 어둠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시야를 왜곡시키는, 공간 자체를 집어삼키는 듯한 공백이었다. 그 어둠은 마치 수천 년 동안 갇혀 있다가 이제 막 풀려난 짐승처럼 굶주린 듯 보였다.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은,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태초의 공포였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은 빛도, 형태도 없는 원초적인 악의 그 자체였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로 얼굴을 가렸다.
몸 안의 모든 에너지가 한꺼번에 빨려 나가는 듯한 극심한 피로감과 현기증이 몰려왔다. 피부가 따끔거리고, 근육은 축 늘어졌다. 마치 수십 년을 늙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다시…*
그때, 상자의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그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강렬하고, 더 직접적이었다.
나는 털썩 주저앉았다. 상자에서 새어 나오던 어둠은, 내가 주저앉는 순간, 마치 누군가 숨을 들이마시듯 순식간에 상자 안으로 도로 빨려 들어갔다.
*딸깍!*
다시 작은 기계음. 상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의 매끄럽고 검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갈라졌던 틈도, 빛나던 문양도 모두 사라졌다. 마치 모든 것이 꿈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내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극심한 피로와 현기증, 그리고 온몸을 휘감는 오한은 현실이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여전히 그 속삭임이 맴돌았다.
*…다시… 찾아라…*
나는 핏기 없는 얼굴로 상자를 노려보았다. 문득, 기숙사 창밖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긁적, 긁적.*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나는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상자를 열었을 때, 무언가가 깨어났다는 것을.
그리고 그 무언가는, 지금 내 방 창문 너머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 안의 알 수 없는 힘이, 깨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홀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아니, 내가 깨운 건지도 모른다.
세상에 감춰진… 무언가를.
나는 상자를 응시했다. 이 알 수 없는 힘의 근원을.
도망쳐야 할까?
아니면, 이 불가사의한 힘과 마주해야 할까?
문밖에서, 다시 한번, 길고 느린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