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잿빛 황야, 살아남은 자의 길

잿빛 하늘 아래, 앙상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무진은 갈라진 대지 위를 묵묵히 걸었다. 한때 위용을 자랑했을 거대한 도시는 이제 희뿌연 먼지와 검게 그을린 폐허의 그림자로만 남아 있었다. 철근이 뒤틀린 채 하늘을 찌르고, 이름 모를 기이한 식물들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 생존의 끈질김을 증명했다. 이곳은 죽은 자들의 땅이자, 살아남은 자들이 발버둥치는 황폐한 대륙의 일부였다.

무진의 낡은 가죽 갑옷은 여기저기 찢어지고 해져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희박한 영기(靈氣)가 실린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찔러왔다. 단전 속의 영핵(靈核)은 바닥을 드러낸 호수처럼 메말라 있었다. 며칠째 제대로 된 식량을 입에 대지 못해 몸은 한없이 무거웠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멈추는 순간, 죽음이 그림자처럼 덮쳐올 테니까.

그의 목적지는 도시의 서쪽, 한때 약재를 취급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점가였다. 소문에 따르면, 그곳 지하 저장고에는 아직 온전한 영초(靈草)나 최소한 먹을 수 있는 뿌리 채소라도 남아 있을지 모른다고 했다. 물론, 소문이란 대개 죽음을 부르는 미끼에 불과했지만, 무진에게는 희미한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할 절박함이 있었다.

사그락, 사그락. 붕괴된 건물 잔해를 밟는 발소리가 황량한 정적을 깨뜨렸다. 무진은 신경을 곤두세웠다. 이 폐허에는 그 혼자만 살아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재앙 이후 영기가 변질되어 태어난 괴수들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발톱과 이빨, 그리고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이한 힘으로 살아남은 자들을 위협했다.

한때 번성했던 거리가 형체도 없이 사라진 곳을 지나, 무진은 벽돌이 무너져 내린 지하 계단을 발견했다. 오래된 나무 문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흔적만 남았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함께 차가운 공기가 아래에서 올라왔다. 그의 눈이 어둠에 적응하며 계단 아래를 살폈다. 좁고 구불구불한 통로가 미궁처럼 이어져 있었다.

“젠장… 이런 곳에 뭐가 남아 있다고.”

낮게 중얼거렸지만, 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긴장으로 손에 땀이 맺혔다. 지하 통로는 생각보다 넓었다. 곳곳에 무너진 선반과 깨진 도자기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영안(靈眼)을 열자 희미하게 흐르는 영기의 흔적이 감지되었다. 무진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것은 단순한 소문이 아닐지도 몰랐다.

한참을 헤매던 무진의 시야에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푸른색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낡은 목제 상자들이 즐비한 한쪽 구석, 깨진 독 안에서 영초 한 뿌리가 희미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청심초(淸心草)’. 비록 대재앙 이전의 영초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이 척박한 시대에는 귀한 약재이자 최소한의 영양원이 될 수 있었다.

무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영초는 뿌리째 뽑아내자 그의 손에서 잔잔한 온기를 퍼뜨렸다. 살아있는 것을 손에 쥐는 것은 얼마 만인지.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때였다.

쉬이이익!

정적을 찢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무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가 방금 서 있던 자리에 거대한 독이빨이 박히며 흙먼지를 일으켰다.

“크윽!”

옆구리에 스치는 통증.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독특한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무진은 몸을 돌려 공격자를 노려봤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여덟 개의 붉은 눈. 거대한 거미의 몸통에 딱정벌레의 단단한 껍질을 지닌 괴수였다. 그것의 등에는 비정상적으로 발달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비행 독거미’. 이 폐허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였다.

괴수는 쉭쉭거리는 소리를 내며 무진을 향해 돌진했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빨랐다. 무진은 간신히 몸을 피하며 손에 쥔 청심초를 품 안에 넣었다. 그의 유일한 무기인 낡은 단검이 손에서 번뜩였다. 날이 많이 무뎌졌지만, 그의 생명을 지켜온 유일한 벗이었다.

“빌어먹을, 이런 곳에 이런 게 있을 줄이야!”

괴수의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무진은 낮은 자세로 파고들어 괴수의 다리를 노렸다. 그의 단전에서 희미한 영기가 끌어올려졌다. ‘파공술(破空術)’. 대재앙 이전, 하급 무인들이 사용하던 단순한 체술이었지만, 그의 모든 영기를 쏟아부으면 잠시나마 신체 능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

쉬이이잉!

단검이 공기를 가르며 괴수의 한쪽 다리를 스쳤다. 단단한 껍질에 흠집조차 내지 못했지만, 괴수는 순간 움찔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무진은 후방으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비행 독거미는 몸을 틀어 무진을 향해 끈끈한 거미줄을 뿜어냈다.

“쳇!”

거미줄은 벽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굳어버렸다. 피하지 못했다면 그대로 갇혀버렸을 것이다. 무진은 단검을 고쳐 쥐고 숨을 골랐다. 괴수는 지능이 높지 않지만, 본능적인 사냥꾼이었다. 그는 정면 대결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지금 그의 영기는 바닥에 가까웠고, 괴수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무진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무너진 선반, 깨진 독, 그리고 천장을 지탱하는 낡은 기둥들. 폐허는 적이지만 동시에 아군이 될 수도 있었다.

“죽기 살기로 버텨야 해.”

무진은 다시 괴수를 향해 돌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직접 공격하는 대신, 괴수 주위를 맴돌며 낡은 기둥을 향해 달렸다. 비행 독거미는 짜증스러운 듯 쉭쉭거리며 그를 쫓았다. 무진은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괴수는 거대한 몸으로 기둥을 들이받았다. 우지끈! 낡은 기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진은 숨을 고르며 기다렸다. 괴수가 다시 기둥을 들이받으려는 순간, 그는 기둥 뒤에서 뛰쳐나와 단검으로 괴수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번에는 영기를 최대한 끌어모아 단검에 집중시켰다.

끼이이익!

괴수는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껍질에 겨우 흠집을 냈을 뿐이었지만, 그 통증에 괴수는 몸을 움찔거렸다. 무진은 그 틈을 타 다시 기둥 뒤로 숨었다. 전략은 단순했다. 낡은 기둥을 부수게 유도하고, 그 혼란을 틈타 공격하는 것.

괴수는 격분한 듯 날개를 퍼덕이며 쉭쉭거렸다. 기둥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려는 듯, 날카로운 다리로 기둥을 마구 긁어댔다. 우드득, 우드득. 낡은 기둥이 비명을 지르며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먼지구름이 지하 통로를 뒤덮었다.

바로 이때였다. 무진은 망설임 없이 먼지 속으로 뛰어들었다. 괴수의 시야가 먼지로 인해 가려진 틈을 노린 것이다. 그는 단전 깊숙이 남아있던 마지막 영기까지 짜내어 단검에 주입했다. ‘파공술’의 마지막 일격.

“하아아앗!”

무진은 비명을 지르며 괴수의 배 아래, 약해 보이는 관절 부위를 향해 단검을 휘둘렀다. 끈적한 체액이 터져 나오며 독특한 비린내가 더욱 강하게 풍겼다. 괴수는 몸을 뒤틀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무진은 그 비명조차 듣지 못하는 듯, 미친 듯이 단검을 꽂아 넣고 빼기를 반복했다.

마지막 일격이 괴수의 움직임을 멈추게 했다. 거대한 몸뚱이가 쿵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흙먼지가 조금씩 가라앉자, 무진은 피범벅이 된 단검을 움켜쥔 채 숨을 헐떡였다. 온몸이 땀과 먼지로 뒤덮였고, 옆구리의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쓰러진 괴수에게 다가갔다. 완전히 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괴수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무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는 없었다. 이 폐허의 어둠 속에는 언제든 또 다른 위협이 도사리고 있으니. 무진은 단검으로 괴수의 껍질을 조심스럽게 갈랐다. 희귀한 괴수의 핵(核)은 아니었지만, 내장 깊숙한 곳에서 발견한 작은 영육(靈肉)은 며칠은 버틸 수 있는 귀한 식량이 되어줄 터였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영육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잠시, 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언제까지 이렇게 싸우고, 도망치고, 겨우 연명해야 할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그는 무의미한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품 안의 청심초에 닿자, 그의 눈빛이 다시 흔들리지 않았다. 이곳에 남아있던 작은 영초 한 뿌리, 그리고 그를 지키기 위해 벌였던 사투. 이것이 바로 그의 삶이었다.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살아있었다.

무진은 영육과 청심초를 챙겨 어둠 속에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폐허 밖의 잿빛 황야로, 또다시 내일을 향한 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그의 등 뒤로 무너진 지하 통로의 잔해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길은 언제나 피와 먼지로 뒤덮여 있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단지, 걸어가야 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