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소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프롤로그: 벚꽃 아래, 균열

“젠장, 또 지각이야!”

숨이 턱 막히도록 전력 질주했다. 흩날리는 벚꽃잎이 따스한 봄바람에 춤추듯 휘감겼다. 분홍빛 눈보라 속을 뚫고 달려가는 내 이름은 한유리. 평범한 고등학생, 아니, 평범을 가장한 ‘조금은 불운한’ 고등학생이랄까. 오늘도 어김없이 늦잠을 자버린 탓에 발은 아우성치고 폐는 터질 것 같았다.

“한유리! 이 느림보!”

저만치 교문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민지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시간에 등교하는 게 미덕인 모범생 친구. 나와는 달리 늘 완벽한 민지를 보면 내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 새삼 깨닫는다. 겨우 숨을 고르며 민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 때문에 벌점 받을 뻔했잖아. 쫌 일찍 좀 다니자, 응?”
“미안, 미안! 어제 마감 작업하다가….”

변명이었다. 마감 작업이라기엔 그냥 내가 좋아서 그리는 낙서에 가까웠지만. 웹툰 작가를 꿈꾼다는 말조차 어쩐지 부끄러워 늘 얼버무렸다. 별 볼 일 없는 재능으로 막연한 꿈을 좇는 것 같아 헛된 희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꿈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빨리 들어가자.”

민지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 순간,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맑고 푸르러야 할 하늘 한 귀퉁이가,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지직거리며 일렁였다. 마치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 그 너머의 풍경이 흐릿하게 왜곡되는 느낌. 기분 탓일까? 눈을 비볐지만, 여전히 그 이질적인 균열은 아른거렸다.

“뭐야? 유리 너 어디 봐?”
“아니, 그냥 하늘이 좀 이상해서…”
“이상하긴 뭐가 이상해. 눈곱이나 떼.”

민지는 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등을 떠밀었다. 착각이겠지. 너무 늦잠 자서 뇌가 덜 깬 모양이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교실로 향했다.

***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전히 벚꽃이 만발했지만, 아침과는 다른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거리의 활기찬 소음이 마치 필터라도 씌워진 듯 희미하게 들려왔고, 사람들의 표정에는 미묘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무거웠다.

‘기분 탓인가?’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이어폰을 꽂았다. 경쾌한 팝송이 귀를 채웠지만, 이상하게도 이 먹먹한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골목길에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휴대폰에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가 들리더니, 노래가 끊겼다. 동시에, 주변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바람 소리도, 나뭇잎 스치는 소리도, 멀리서 들려오던 자동차 경적 소리마저도. 마치 세상이 거대한 진공 상태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보았다.

골목 어귀,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에서, 희미하고 불분명한 형태가 일렁였다. 형체를 특정할 수 없는 검은 연기 같기도, 심연의 어둠이 스며 나온 것 같기도 한 존재.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꿈틀거리더니, 주변의 밝기를 빨아들이는 듯했다. 가로등 불빛마저 그 앞에서 흐릿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내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몸이 굳어버려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검은 형체가, 내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형체가 가까워질수록, 내 눈에는 그 안에서 수많은 눈동자들이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도… 도망쳐야 하는데….”

그때였다. 칠흑 같은 그림자 속에서 갑자기 빛줄기가 튀어나왔다. 한 줄기의 강렬한 은빛 섬광이 그림자를 꿰뚫는가 싶더니, 이내 그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그림자를 밖으로 밀어냈다. 섬광이 걷히자, 내 눈앞에는 손바닥만 한 작은 생명체가 떠 있었다.

반짝이는 은빛 털을 가진, 앙증맞은 토끼를 닮은 모습. 하지만 귀에는 보석처럼 빛나는 푸른 수정이 박혀 있었고, 투명한 날개가 등에 달려 있었다. 그 작은 생명체는 고양이처럼 푸른 눈을 깜빡이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드디어 찾았어! 빛의 계승자여!”

작고 앙증맞은 입에서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라움과 두려움에 나는 그 자리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너… 너 뭐야? 말하는 토끼…?”
“난 루나! 너를 돕기 위해 온 존재라고! 빨리! 저 어둠의 잔상들이 세상을 집어삼키기 전에 막아야 해!”

루나는 다급하게 날개를 파닥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눈앞의 상황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림자는 루나의 빛에 잠시 주춤하는 듯했지만, 이내 더욱 거대한 형태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어둠을 흡수하며 거대한 괴물의 형상을 갖추어갔다. 사람들의 불안감, 공포심을 먹고 자라는 듯했다.

“나… 내가 뭘 어떻게? 난 그냥 평범한….”
“평범하지 않아! 네 안에는 누구보다 강렬하고 순수한 빛의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이제 깨어날 때야!”

루나는 내 앞으로 날아와 푸른 수정을 박은 귀를 내밀었다. 그러더니 수정이 빛나며 내 심장을 향해 따뜻한 에너지를 쏘아 보냈다. 내 몸속 깊은 곳에서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반응하는 느낌.

“두려워 마! 마음속의 용기를 외쳐! ‘별빛이여, 나에게 힘을!’”

나는 루나의 말에 홀린 듯 중얼거렸다. 두려움 속에서도,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렸다.

“별빛이여… 나에게 힘을!”

그 순간, 내 온몸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왔다. 평범했던 내 교복이 찬란한 은빛과 푸른색이 어우러진 마법소녀 복장으로 바뀌었다. 머리에는 별 모양의 머리핀이 박혔고, 손에는 빛을 머금은 지팡이가 들렸다.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온몸이 따스한 에너지로 가득 차올랐다.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이… 이게 나라고?”

나는 눈앞의 거대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더 이상 예전의 한유리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용기가 그림자에 대한 두려움을 덮어버렸다.

“저것들이 이 도시를 위협하는군요, 루나.”
“그래! 빛의 계승자! 저들은 ‘칠흑의 잔상’! 이 세계의 균열을 통해 넘어와 사람들의 부정적인 감정을 먹고 자라는 존재들이야!”

나는 지팡이를 단단히 잡았다. 내 심장이 마치 우주의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내 눈앞에서 이 도시에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하게 할 거야!”

나는 지팡이를 휘둘러 빛의 검을 만들어냈다. 은빛 검이 칠흑의 잔상을 향해 날아가자, 잔상이 비명을 지르며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잔상은 더욱 거세게 발악하며 촉수를 뻗어왔지만, 나는 몸을 날려 피하고 검으로 베어냈다.

점점 더 잔상이 희미해졌다. 하지만 그 숫자는 끝없이 늘어나는 듯했다. 나는 지팡이를 땅에 박고 외쳤다.

“별빛의 방패여! 어둠을 가로막아라!”

투명한 푸른빛의 에너지 방패가 형성되어 잔상들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때였다. 저 멀리,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다른 ‘칠흑의 잔상’들과는 달랐다. 분명 그림자 속에서 걸어 나왔는데, 그에게선 검은 연기나 혐오스러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칠흑 같은 밤의 색을 닮은 긴 머리카락,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는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듯했다. 다른 잔상들이 기괴한 괴물의 형상이라면, 그는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모습이었다. 다만, 그의 눈빛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 너무나도 고독하고 슬퍼 보였다.

그는 어떠한 공격도 하지 않고, 그저 그림자 속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른 잔상들과 한패인 것 같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나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의 깊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의 눈빛 속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이 일렁였다. 경계심, 호기심, 그리고… 슬픔?

나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 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은 분명 위험했지만, 나는 묘한 끌림을 느꼈다. 그를 알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나의 심장이 다시 격렬하게 반응했다.

하지만 그때, 마지막 남은 칠흑의 잔상이 거대한 팔을 휘둘러왔다. 정신을 차린 나는 재빨리 빛의 검을 날려 잔상을 완전히 소멸시켰다.

“해냈어! 유리!”

루나가 기뻐하며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하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그림자가 있던 곳을 향해 있었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이다.

변신이 풀리고 나는 다시 평범한 한유리로 돌아왔다.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지만, 방금 전의 경험은 너무나 생생했다.

“그… 그는 누구지?”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루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누구 말하는 거야? 다른 잔상들은 전부 사라졌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검은 머리카락에… 인간처럼 생긴….”

루나는 내 말에 순간 경직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보지 말아야 할 존재였을 거야, 빛의 계승자. 그는 가장 위험한, 어둠의 심연에 가장 가까운 존재일 테니까.”

루나의 말은 내 머릿속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위험한 존재. 하지만 왜 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던 걸까? 왜 그의 슬픈 눈빛이 잊히지 않는 걸까?

밤하늘의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나는 밤이었다. 나는 가슴 한가운데에 새겨진 알 수 없는 이끌림과 함께, 새로운 나의 삶이 시작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이끌림의 중심에, 어둠 속에서 사라진 그가 서 있었다. 종족을 뛰어넘어, 금지된 운명으로 얽히게 될 이안이라는 존재가.

그때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와의 만남이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들 것이라는 것을. 나의 빛이 그의 어둠과 뒤섞여, 세상의 모든 규칙을 깨부술 사랑이 시작될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