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은 찢어진 먹구름 조각처럼 어두웠다. 도시의 불빛은 멀리 희미한 아지랑이처럼 번져 보일 뿐, 이곳, 폐허가 된 제17 구역은 짙은 그림자에 잠겨 있었다. 잿빛 빌딩 잔해 사이로 스며드는 달빛은 불길한 은빛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침묵을 찢어내며, 삐걱이는 쇳소리가 황량한 바람을 타고 울렸다. 무너진 공장 건물의 가장 높은 철골 위, 한 소녀가 서 있었다. 검붉은 망토가 바람에 격렬하게 펄럭였고, 그 아래로 드러난 몸에는 한때 순백이었던 마법소녀의 의상이 거칠게 변색되어 있었다. 찢겨나간 옷자락, 헤진 레이스,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슴팍에 박힌 검은 보석은 한때 빛을 상징하던 것이었으리라 짐작될 뿐이었다. 그녀의 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돌던 홍채는 이제 피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이세라. 한때 ‘성광의 세라’로 불리며 이 도시를 지키던 존재. 이제 그녀는, 복수를 위해 강림한 파괴의 화신이었다.
“찾았다, 이 비겁한 쥐새끼.”
낮게 읊조린 목소리는 폐허의 공기를 차갑게 얼렸다. 그녀의 시선이 아래, 으슥한 지하 주차장 입구를 향했다. 그곳에서 희미한 마력의 흔적이 감지되었다. 역겹도록 익숙한, 하지만 동시에 낯설어진 파장의 마력. 최유진, 그녀의 전(前) 친구, 그리고 배신자의 잔재였다.
쿵!
세라의 발밑 철골이 거대한 충격을 받아 휘청였다.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십 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중력 가속도를 무시한 채, 그녀의 몸 주위로 짙은 어둠의 기운이 휘감겼다. 그림자들은 그녀의 추락을 부드러운 깃털처럼 만들었다가, 땅에 닿기 직전 거대한 충격파로 변환하여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콰아앙!
지하 주차장 입구가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먼지와 잔해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세라는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로는 거대한 칠흑의 날개가 순간적으로 펼쳐졌다가 사라졌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나와.”
그녀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차가운 명령만이 울려 퍼졌다. 정적만이 흐르는 어둠 속에서, 움찔거리는 작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세… 세라?”
겁에 질린 목소리가 벽 뒤에서 흘러나왔다. 한때 세라와 유진과 함께 이 도시를 지켰던 마법소녀 중 한 명, ‘방패의 릴리’로 불리던 강하연이었다. 그녀의 방패는 이미 한쪽이 심하게 찌그러져 있었고, 작은 몸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하연이 너였구나. 설마 너도 그 마녀의 편에 서서 날 기만할 줄은 몰랐는데.” 세라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가. 유진이는 늘 너희를 이용하는 데 능숙했으니까.”
“아… 아니야! 난… 난 아무것도 몰랐어! 유진이가… 유진이가 그렇게 될 줄은…!” 하연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세라, 제발 진정해! 이건 오해야! 유진이는… 유진이는 원래 그런 애가 아니야! 뭔가 오해가 있었을 거야!”
오해? 세라의 붉은 눈이 더욱 강렬하게 타올랐다.
“오해? 그럼 내 심장을 꿰뚫고 이 도시에 파멸을 선사한 것이 오해라는 거니? 내가 모든 것을 잃고 이 어둠 속을 헤매는 것이 오해라는 거냐고!”
그녀의 분노가 마력으로 폭발했다. 주차장 바닥의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주위를 감싸던 그림자들이 살아있는 촉수처럼 꿈틀거렸다.
“유진이는… 유진이는 내가 쓰러진 후에 이 도시에 그림자 괴물들을 풀어놓았어! 사람들의 희망을 빨아먹는 괴물들을…! 그리고 너희는, 그저 지켜보고만 있었지! 아니, 어쩌면 즐거워했으려나?”
“아니야! 우리는 그럴 리 없어! 유진이가… 그녀가 마법소녀를 해치는 그림자 괴물들을 만들었을 리 없어! 그건 절대 유진이가 아니야!” 하연은 소리쳤다. 그녀의 눈에도 공포와 함께 혼란이 가득했다.
“그럼 누구겠어? 나는 너희와 유진이에게 배신당해 죽어가던 순간에도 그 괴물들이 유진이의 마력과 섞여 있다는 것을 느꼈어. 이 빌어먹을 마력을 말이야!” 세라의 손끝에서 칠흑 같은 빛줄기가 뻗어나와 주차장 기둥을 꿰뚫었다. 철근이 비명을 지르며 휘어졌고, 기둥은 순식간에 재가 되어 흩어졌다.
“이젠 변명도 듣기 싫어. 너는 유진이의 조력자였고, 아니었다고 해도 내 앞을 막는 방해물일 뿐이야.”
세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너무나 강력해서, 하연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녀는 급히 방패를 들어 올렸지만, 그 방패는 세라의 마력 앞에서는 종잇장처럼 연약해 보였다.
“세라! 제발 정신 차려! 넌… 넌 성광의 세라였잖아! 우리의 희망이었잖아! 복수는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 유진이를 찾아서 진실을…!”
“진실?” 세라의 붉은 눈이 싸늘하게 빛났다. “진실은 이미 내 심장에 새겨져 있어. 내 모든 것을 짓밟은 유진이의 칼날과, 그 칼날을 갈고 닦은 너희들의 침묵이 바로 진실이야.”
그녀의 오른손에 어둠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의 모든 별빛을 집어삼킨 듯한 칠흑의 구체가 서서히 형태를 갖추었다. 그것은 더 이상 마법이라기보다는, 순수한 파괴 에너지 그 자체였다.
“그리고 복수는…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거야. 너희가 내게서 빼앗아간 모든 것을.”
쉬이이잉!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칠흑의 구체가 하연을 향해 날아갔다. 하연은 이를 악물고 방패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황금빛 보호막이 펼쳐졌다. 한때 이 도시를 수많은 위협으로부터 지켜내던, 굳건한 방어의 마법이었다.
콰아아아앙!
어둠의 구체와 황금빛 방패가 충돌하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주차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콘크리트 바닥이 울리고, 천장의 파이프들이 떨어져 내렸다.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마력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고, 하연의 보호막은 비명 지르듯 찢겨져 나갔다.
“크아악!”
하연은 짧은 비명과 함께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녀의 방패는 산산조각 나 있었고, 몸을 감싸던 마력은 완전히 소진된 듯 했다. 몸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세라는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그 어떤 죄책감도, 후회도 없었다. 오직 차갑게 가라앉은 분노만이 맴돌았다.
“이것이… 유진이의 그림자 아래 숨어 있던 대가야.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
세라는 천천히 하연에게 다가갔다. 쓰러진 하연은 고통에 신음하며 겨우 눈을 떴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공포뿐만 아니라, 이해할 수 없는 슬픔이 어렸다.
“세라… 넌… 정말 이렇게까지… 변해버린 거니…?”
그녀의 말에 세라의 표정은 더욱 차갑게 굳어졌다.
“변했냐고? 그래, 변했어. 너희가 만들어낸 이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만 했으니까. 그리고 난… 그 지옥을 만든 자들을 똑같이 지옥으로 끌고 내려갈 거야.”
세라의 손이 하연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마력이 하연의 몸을 서서히 잠식해갔다. 하연의 얼굴에서 피가 빠져나가고, 그녀의 몸은 점차 차갑게 식어갔다.
“마지막으로 묻겠어. 유진이는 어디에 있지?”
하연은 마지막 힘을 쥐어짜내 세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그녀는… 이미… 너무 멀리… 갔어… 돌아올 수 없어… 세라… 멈춰…”
세라의 눈빛이 흔들리는 듯 했으나, 이내 더욱 잔혹하게 번뜩였다.
“멈추라고? 멈출 수 있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도 않았어.”
콰직!
하연의 목에서 뼈가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그녀의 몸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며 축 늘어졌다. 생명의 불꽃이 완전히 꺼지는 순간, 세라의 손에서 어둠의 마력이 폭풍처럼 뿜어져 나와 하연의 시신을 완전히 집어삼켰다. 한때 ‘방패의 릴리’로 불리던 마법소녀의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모든 것이 끝나자, 주차장은 다시 싸늘한 침묵에 잠겼다. 세라는 잠시 멈춰 서서 어둠 속에 홀로 서 있었다. 그녀의 숨결은 거칠었지만, 눈빛은 흔들림 없이 차가웠다.
‘유진. 네가 이 도시를 지키던 내 심장을 꿰뚫었을 때, 나는 네가 정말로 모든 것을 끝낼 줄 알았겠지.’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너진 천장 사이로 보이는 작은 달빛 조각이 그녀의 붉은 눈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어. 그리고 이제… 네가 내게 선사한 이 어둠 속에서, 나는 너를 찾을 거야. 네가 내게 했던 것보다 훨씬 더 처참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러.’
세라의 발밑에서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몸은 어둠과 함께 하나의 존재가 되어, 폐허 속으로 녹아들듯이 사라져갔다. 그녀의 다음 목적지는, 최유진이 숨어있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 도달하기 위해, 그녀는 그 어떤 희생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복수의 칼날은 이미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