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스름 속에서 피어난 균열
미명 시립 도서관의 특수 자료실은 언제나 고요했다. 창백한 형광등만이 간신히 빛을 뿜어내는 이곳은, 도시의 번잡함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시간마저 잊은 듯한 공간이었다. 김지훈은 퀴퀴한 먼지 냄새와 낡은 종이 냄새가 뒤섞인 이곳의 공기를 마시는 것을 좋아했다. 스물넷의 그는 대학을 중퇴하고 별 볼 일 없는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삶의 의미를 잃어가던 중이었다. 그에게 도서관은 현실의 덧없음을 잊게 해주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오늘도 그는 아무도 찾지 않는 구석, ‘미분류 고문서’라고 적힌 팻말 아래의 낡은 책장들을 훑고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바스러질 듯한 먼지투성이 책들이었고, 흥미를 끌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지훈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온 낡은 책등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책장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
단순히 책이 빠진 공간이 아니었다. 낡은 나무판자들이 덧대어진 벽면의 일부가 안쪽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그 뒤에 숨겨진 작은 틈새가 드러났다. 지훈은 호기심에 찬 눈으로 그 틈새를 들여다보았다. 희미한 어둠 속에서 무언가 검은 것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것은 책이었다.
여느 책과는 달랐다. 표지에는 아무런 글자도 인쇄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기하학적이면서도 어딘가 기괴한 문양이 음각되어 있었다. 마치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벌레의 형상 같기도 했고, 복잡하게 얽힌 별자리 같기도 했다. 검고 윤기 없는 표면은 가죽이라기엔 너무나 거칠고 딱딱했으며, 손가락으로 문지르자 미묘한 비늘 같은 감촉이 느껴졌다. 지훈은 알 수 없는 이끌림에 홀린 듯 그 책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책은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낡은 쇠 장식이 옆면을 굳게 잠그고 있었고, 장식에는 방금 본 것과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손톱으로 장식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묘한 열기와 함께 손가락 끝에 전기가 오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스쳤다. 마치 책 자체가 살아있는 생물인 양, 그를 거부하는 것 같았다.
“대체… 뭐야, 이건?”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는 우연히 장식의 특정 부분을 누르게 되었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쇠 장식이 풀렸다. 굳게 닫혀 있던 책이 서서히 벌어졌다. 안쪽에는 두툼하고 누런 양피지 같은 종이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종이 위에는 처음 보는 글자들이 불규칙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나라의 문자도 아니었고, 어떤 언어의 필체와도 닮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 혼란스러운 꿈속에서 끄적인 낙서 같기도 했고, 동시에 우주의 질서를 담은 정교한 설계도 같기도 했다.
지훈은 떨리는 손으로 첫 페이지를 넘겼다. 글자들은 검붉은 색을 띠고 있었는데, 그 색깔이 마치 말라붙은 피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그는 조용하고 인적 드문 곳에서 이 책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싶어졌다. 책을 품에 안고 특수 자료실을 나서는 그의 귀에, 아주 희미하게, 무언가 속삭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환청일까? 그는 고개를 저었다.
집으로 돌아온 지훈은 침대 위에 책을 펼쳐놓았다. 방 안의 어둑한 조명 아래, 책 속의 글자들이 더욱 기괴하게 빛나는 듯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글자들을 눈으로 훑었다. 어떤 페이지에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이 가득 채워져 있었고, 그 도형들은 서로 맞물리며 끊임없이 변형되는 착시를 일으켰다. 그의 눈이 그림들을 따라갈수록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한 도형에 멈췄다. 그것은 표지에 새겨진 문양과 비슷했지만, 훨씬 더 복잡하고 정교했다. 무언가에 홀린 듯, 지훈은 손가락을 뻗어 그 문양의 선을 따라 그리기 시작했다. 종이의 거친 질감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그의 손가락이 문양의 마지막 선을 긋는 순간이었다.
정적만이 가득했던 방 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겁게 짓눌러오는 것을 느꼈다.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압력이 폐를 짓눌렀고, 동시에 귓가에서 낮은 주파수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마치 심해 저편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깨어나는 듯한 소리였다.
지훈의 시야가 일렁였다. 낡은 벽지의 꽃무늬가 마치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고, 창밖의 어둠 속에서는 알 수 없는 형체들이 그림자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방 한구석에 놓인 낡은 스탠드 조명이었다. 갓에 새겨진 문양이 순간적으로 흐릿해지더니, 희미하게 빛을 냈다. 그것은 스탠드가 만들어낼 수 있는 빛이 아니었다. 어둡고, 검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은, 무(無)의 빛이었다.
“흐읍… 으윽…”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이건 현실이 아니었다. 꿈인가? 하지만 그의 온몸을 짓누르는 압력과 귓가를 때리는 웅웅거림은 너무나 선명했다. 그의 눈이 다시 책 속의 문양으로 향했다. 문양에서 희미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했다. 그리고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그의 손끝에서부터 발원한 듯한, 희미하고 투명한 선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치 혈관처럼, 보이지 않는 에너지가 그의 몸을 감싸고, 방 안의 모든 사물과 연결되는 것 같았다.
그는 문득, 자신이 무언가 엄청난 것을 깨워버렸음을 직감했다. 동시에, 저 웅웅거리는 소리의 근원이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딘가 먼 곳에서, 아주 거대한 존재가 숨 쉬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 지훈의 손에 들린 책을 통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순간, 방 안의 모든 기묘한 현상이 썰물처럼 사라졌다.
압력은 사라졌고, 웅웅거림도 멎었으며, 시야의 왜곡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스탠드 조명은 그저 낡은 조명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훈의 손바닥에는, 방금 문양을 따라 그린 흔적을 따라, 희미한 열기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심장 깊숙한 곳에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힘과의 연결감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책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평범한 모습으로.
그러나 김지훈은 이제 알았다. 이 책이, 그리고 그 안에 잠재된 힘이,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담고 있으며 동시에 그 모든 비밀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한 발 내디뎠다는 것을.
문득, 창밖의 어둠이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의 눈동자처럼, 끝없이 펼쳐진, 차갑고 무관심한 시선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