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운산맥의 가장 깊은 곳, 태초의 영기가 응결된 듯 웅장하게 솟아오른 봉우리들 사이. 명실상부 천하제일 문파로 불리는 ‘청룡신단(靑龍神壇)’의 본단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거대한 연무장에는 수만 명의 문도들이 운집해 있었고, 중앙의 비취색 연단 위에는 현 청룡신단의 단주이자 천하오선(天下五仙) 중 한 명으로 추앙받는 천무혁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가 걸려 있었으나, 눈빛 속에는 감출 수 없는 자만심과 권위가 번뜩였다. 그는 한 손에 영기(靈氣)가 서린 백옥잔을 들고 가볍게 흔들었다. 잔 속에는 태양의 정수가 응축된 듯 붉은 빛을 내는 영주(靈酒)가 담겨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현경(玄境)에 도달한 아홉 명의 신진 문도들을 축하하고, 더 나아가 무궁한 청룡신단의 미래를 기원할 것이다!”
천무혁의 목소리는 드넓은 연무장에 울려 퍼지며, 마치 천둥이 치듯 문도들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함성 소리가 하늘을 찔렀고, 환호성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의 옆에 선 장로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천무혁의 뛰어난 지도력과 무한한 잠재력에 감탄하는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연무장 가장자리에, 그림자처럼 드리워진 거대한 고목의 그늘 아래, 한 사내가 고요히 서 있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그의 존재는 기이할 정도로 존재감이 없었다. 마치 풍경의 일부인 양, 시선은 오직 연단 위의 천무혁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남자는 검은 도포를 걸치고 있었고, 갓 아래로 비치는 얼굴은 극도로 창백했다. 살아있는 이의 혈색이라기보다는, 차가운 달빛을 머금은 백옥 조각 같았다. 그의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처럼 어두웠고, 그 속에는 오래 묵은 피 같은 한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 있지 않았으나, 마치 천 번을 휘두르고 만 번을 닦아낸 듯한 보이지 않는 칼날의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었다.
환호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 남자가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발걸음은 흙먼지조차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 순간 연무장 전체를 감싸고 있던 축제 분위기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마치 고요한 호수에 작은 돌멩이가 던져진 듯, 아무도 감지하지 못하는 파문이 일었다.
천무혁은 그 미묘한 변화를 제일 먼저 알아차렸다. 그는 무수히 많은 위기를 겪으며 쌓아 올린 본능적인 감각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의 온화한 미소가 굳어졌다.
“……누구냐.”
그의 목소리는 낮았고, 주변 장로들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그 말에 담긴 압력은 무거웠다. 장로들이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이상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남자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는 연단 위로 시선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닿는 곳마다, 환호하던 문도들의 목소리가 멎고,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마치 전염병처럼 정적이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연단 근처의 문도들부터, 점차 연무장 전체가 고요해졌다. 수만 명의 인파가 만들어내는 침묵은 그 어떤 소음보다도 섬뜩했다.
천무혁은 그의 눈빛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고목 아래에서 걸어 나오는 그림자 같은 사내를 발견했을 때, 그의 심장이 발톱에 찢기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핏줄이 얼어붙는 듯한 한기가 전신을 감쌌다.
남자가 갓을 벗었다. 긴 흑발이 밤하늘처럼 흘러내렸다. 그 아래 드러난 얼굴은 분명 낯설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턱선, 깊어진 눈매, 살점 하나 없이 뼈만 남은 듯한 창백한 뺨. 하지만 그 얼굴 깊숙한 곳에 박힌 두 눈동자, 바로 그 눈동자는 천무혁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악몽 속에서 수없이 마주했던 그 눈빛이었다.
“무…… 진……?”
천무혁의 입에서 간신히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이름이 퍼지자, 정적은 더욱 깊어졌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 이름을 알지 못했으나, 천무혁의 목소리에 담긴 극심한 공포를 느끼지 못할 자는 없었다.
무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한 걸음씩 연단을 향해 다가섰다. 그의 걸음마다 땅이 울리는 환청이 들리는 듯했다. 주변의 문도들은 그의 살벌한 기운에 압도되어 뒷걸음질 쳤다. 몇몇은 아예 주저앉아 벌벌 떨기 시작했다.
천무혁은 재빨리 정신을 수습하려 애썼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그는 죽었어. 내 손으로 직접 나락에 떨어뜨렸는데.
“무엄한 자! 누구인가, 감히 단주의 대연회에 난입하는가!”
경비대장이 소리쳤다. 그의 뒤로 무장한 경비 무사 수십 명이 무진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다. 영기가 서린 검날이 번뜩였다.
무진의 시선이 잠시 경비대장에게로 향했다. 그 순간, 경비대장은 자신의 심장이 얼음 송곳에 꿰뚫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그는 겨우 목구멍에서 쉰 소리를 냈다.
“물러서라!”
무진의 목소리는 너무나 낮고 조용해서,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수만 명의 뇌리에 번개처럼 박혔다. 단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는 감히 거역할 수 없는 지독한 살기와 압도적인 위압감이 담겨 있었다.
경비대장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자신의 몸이 마치 무형의 힘에 의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그의 몸이 서서히 잿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한 줌의 먼지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그의 뒤에 있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고통에 찬 신음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마치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깨끗했다.
연무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영기가 강한 고수들도 무진의 압도적인 힘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천무혁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의 몸은 공포와 경악으로 굳어버렸다. 저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분명,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것이었다.
“무진…… 네놈이, 어떻게……”
그의 목소리는 떨렸다. 배신감과 후회,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뒤섞였다.
무진은 드디어 연단 바로 앞까지 걸어왔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천무혁과 눈을 마주쳤다.
“어떻게?”
무진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기쁨이나 즐거움의 미소가 아니었다. 오직 피와 복수를 갈망하는, 지옥에서 피어난 악귀의 미소였다.
“네가 던진 지옥에서, 네가 내리꽂은 칼날 위에서, 너를 찢어발길 힘을 키웠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증오가 담겨 있었다.
“기억하는가, 천무혁. 그날의 맹세를.”
무진의 시선이 천무혁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우리는 영원한 벗이라 했지.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설령 천지가 뒤집혀도 서로의 등을 지켜주리라 맹세했다.”
무진의 목소리가 한 옥타브 낮아졌다. 이제는 맹세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피로 얼룩진 과거를 되씹는 듯했다.
“하지만 너는, 내 가장 깊은 곳을 꿰뚫고, 내 영혼마저 찢어발겼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고, 나를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네놈의 손으로, 너의 야망을 위해, 네놈이 올라서기 위해, 나를 짓밟았다.”
무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것은 분노였고, 슬픔이었으며, 지울 수 없는 배신의 상흔이었다.
천무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피 한 방울 없이 창백했다.
“아니, 무진! 오해다! 나는 그저…… 어쩔 수 없었을 뿐이다! 그때는……!”
“변명은 필요 없다.”
무진이 천무혁의 말을 끊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올라갔다. 손바닥에는 검은 영기가 서렸다. 그것은 마치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듯한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네놈의 변명은, 내가 나락에서 수없이 씹어 삼킨 피 맛보다도 역겹다.”
“무진! 기다려라! 설마 나를 죽일 셈이냐! 우리에게 지난 세월이 있지 않은가!”
천무혁은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그의 뇌리에는 과거 무진과 함께 겪었던 수많은 모험과 생사의 고비들이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지금, 오히려 더욱 잔인한 칼날이 되어 그를 옥죄었다.
“세월?” 무진이 비웃었다. “네놈이 내 등을 칼로 꿰뚫고, 내가 죽음의 문턱에서 고통에 몸부림칠 때, 너는 어떤 세월을 떠올렸지? 네놈이 나의 모든 것을 찬탈하고, 나의 문파를 짓밟고, 나의 혈족을 멸문시킬 때, 너는 어떤 세월을 기억했지?”
무진의 목소리가 점차 격앙되기 시작했다.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연무장 전체를 집어삼키는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주변에 남아있던 장로들마저 무릎을 꿇고 엎드려 고통스러워했다.
“나는 네놈의 세월을 기억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피로 새긴 복수의 세월만을 기억한다.”
무진의 손이 천무혁을 향해 뻗어졌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기운이 뱀처럼 솟아올랐다. 그 기운은 천무혁의 심장을 겨냥했다.
천무혁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희미한 청색 방어막이 솟아올랐다. 청룡신단의 단주에게 허락된 최강의 방어 비술이었다.
하지만 무진의 검은 기운은 그 방어막을 스치듯 지나갔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크악!”
천무혁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는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심장이 꿰뚫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 안에 알 수 없는 검은 기운이 스며든 듯했다. 고통은 내면에서부터 치솟아 올랐고, 마치 뼈와 살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무진은 천무혁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죽음은, 너무나 값싼 대가다.”
무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것은 시작일 뿐이다, 천무혁. 네놈은 이제부터 매일 밤, 내가 너에게 선물한 어둠 속에서 고통받게 될 것이다. 네놈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고, 네놈이 붙잡고 있는 모든 것이 부서질 때까지, 나는 네놈의 그림자가 되어 따라다닐 것이다.”
그의 말이 끝나자, 무진의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연무장을 가득 채웠던 살기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천무혁은 고통 속에서 겨우 고개를 들었다. 무진의 모습은 이미 연무장 끝, 고목의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무진! 가지 마! 부탁한다! 제발……!”
그의 절규는 허공에 흩어졌다. 무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연무장에는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정적만이 남았다. 천무혁은 심장을 부여잡고 신음하며 쓰러져 있었고, 그의 주변에는 그의 권능에 압도되어 공포에 질린 문도들과 장로들이 얼어붙은 채였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줄 알았던 지옥의 그림자가, 비로소 천룡신단 위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피로 새겨진 복수의 서막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