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잿빛 도시, 붉은 흔적**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 그림자는 더욱 짙었다. 강민은 낡은 방독면 너머로 희뿌연 시야를 좁혔다. 발밑에 깔린 콘크리트 조각들이 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죽은 듯 고요한 이 도시에서 유일한 생명처럼 들렸다. 그의 오른손은 닳고 닳은 강철 단도를 꽉 쥐고 있었다. 손잡이 부분에 덧댄 천 조각은 이미 땀으로 축축했다.
“젠장, 아무것도 없군.”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방독면 안에서 먹먹하게 울렸다. 사흘째였다. 식량은 바닥났고, 물도 겨우 한 모금 남았다. 이대로라면 굶어 죽거나, 갈증에 시달리다 정신을 잃고 저 아래에서 기어 다니는 ‘이형체’들의 밥이 될 터였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기형적으로 솟아오른 철골 구조물을 응시했다. 과거에는 마천루라 불렸을 그것은 이제 거대한 괴물의 앙상한 뼈대 같았다.
강민의 발길이 멈춘 곳은 한때 대형 마트였던 잔해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 검은 아가리처럼 뻥 뚫려 있었고, 상품 진열대는 뒤집히거나 녹슬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이 황폐한 세상에서, 한때 사람들이 북적였던 곳은 여전히 찾아볼 가치가 있었다. 가끔, 아주 가끔, 운이 좋으면 통조림 하나라도 건질 수 있었으니까.
“윽… 냄새.”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방독면조차 뚫고 들어왔다. 피와 썩은 내, 그리고 금속이 타는 듯한 비린내가 뒤섞인 악취였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자세를 낮췄다. 이 냄새는 단순히 썩은 물건에서 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들’의 흔적이었다.
벽면에는 거대한 발톱 자국이 선명했다. 콘크리트가 깊게 파여 있었고, 핏자국이 검붉게 말라붙어 있었다. 오래된 흔적은 아니었다. 며칠, 아니 어쩌면 불과 몇 시간 전의 것일 수도 있었다. 강민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왜 하필 여기야.”
그는 발소리를 죽이며 내부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진열대가 쓰러져 만들어진 미로 같은 공간을 통과하자, 한때 신선 식품 코너였을 법한 곳이 나타났다. 다른 곳보다 천장이 낮고, 냉기를 유지하기 위해 만들었던 두꺼운 벽이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쪽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강민은 단도를 고쳐 쥐고 숨을 멈췄다. 폐쇄된 공간에서 빛이 새어 나온다는 건,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저 안에 있다는 뜻이었다. 인간이라면 경계해야 하고, 이형체라면 죽여야 했다.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굶주림은 용기를, 혹은 무모함을 안겨주었다.
천천히, 그는 벽에 등을 붙이고 모퉁이를 돌아섰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강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거대한 몸집의 이형체가 보였다. 짐승 같기도 하고, 인간 같기도 한 기괴한 형상. 비늘 박힌 피부는 검푸른 색이었고, 여섯 개의 팔은 제각기 다른 종류의 날카로운 무기로 변형되어 있었다. 눈은 없었지만, 머리 곳곳에 돋아난 더듬이들이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주변을 탐색하는 듯했다. 그 괴물의 심장이었던 자리에는 푸른빛을 띠는 수정 같은 물질이 박혀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 앞에는, 인간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 명, 두 명… 최소 세 명 이상이었다. 모두 처참하게 찢겨 있었고, 시신 옆에는 낡은 배낭과 녹슨 총기들이 흩어져 있었다. 분명, 그들 역시 이 마트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던 거다.
괴물은 꿈틀거리는 더듬이로 시신을 훑어내리고 있었다. 먹잇감을 확인하는 듯한 움직임에 강민은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것은 단순한 이형체가 아니었다. 뭔가 *특별한* 존재였다. 일반적인 이형체들은 이렇게 시체를 탐색하지 않았다. 그저 찢어발기고 삼키는 데 급급할 뿐이었다.
강민은 조용히 몸을 숨겼다. 이곳에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저 거대한 몸집과 예측 불가능한 움직임, 그리고 수정 핵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감은 강민의 모든 감각을 경고로 채웠다. 그는 싸움이 아닌 생존을 택해야 했다. 조용히, 이곳을 벗어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그가 발소리를 죽여 다시 미로 같은 공간을 빠져나가려던 찰나였다.
“…흐읍.”
희미한 신음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다. 강민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쿵, 하고 격렬하게 울렸다. 괴물의 발치에 널브러진 시신 더미 속에서, 아주 작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살아있는 인간. 그것도 어린아이의 작은 그림자였다.
괴물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여전히 더듬이로 다른 시신들을 탐색하고 있었다. 아이는 상반신이 벽에 기댄 채, 눈을 질끈 감고 이를 악물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팔을 감싸 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 괴물의 공격을 피하려다 다친 모양이었다.
강민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저 아이를 외면하고 그냥 갈 것인가? 아니면…
그는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이 잔혹한 세상에서, 한 명이라도 더 살아남는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기적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강민은 이미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그들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망설임은 짧았다. 이형체의 더듬이가 아이가 숨어있는 시신 더미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야! 거기 움직이지 마!”
그의 목소리가 튀어나오자마자, 괴물의 더듬이가 멈췄다. 여섯 개의 팔이 동시에 반응하며 강민 쪽을 향했다. 수정 핵에서 푸른빛이 더욱 강렬하게 번뜩였다. 괴물은 눈이 없었지만, 강민의 존재를 정확히 포착한 듯 보였다.
“크르르르…!”
괴물의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천장의 잔해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아이는 놀란 듯 눈을 뜨고 강민을 바라봤다. 그 작은 눈동자에는 공포와 희망이 뒤섞여 있었다.
강민은 이미 후회할 틈도 없었다. 한 번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단도를 고쳐 쥐고 괴물을 노려봤다.
“젠장…!”
그가 내뱉은 짧은 탄식과 함께, 괴물이 거대한 몸집을 이끌고 덮쳐들었다. 폐허가 된 마트 안에서, 피할 수 없는 전투가 시작되었다. 이 싸움에서 살아남는다면, 그 아이는 그의 짐이 될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 생각조차 사치였다. 오직 살아야만 했다. 아이를 살리든, 자신만 살든.
강민은 몸을 낮추고, 으르렁거리는 괴물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이 격렬하게 뛰었다.
잿빛 도시의 한구석에서, 붉은 피가 다시 흐를 참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