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재와 그림자 사이에서**
황무지는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잿빛 먼지가 시야를 가로막고, 무너진 고층 건물들의 뼈대만이 한때 문명이라 불렸던 것의 비극적인 증거로 서 있었다. 바람은 끊임없이 맴돌며 잊힌 비명을 실어 나르는 듯했다. 지훈은 낡은 방진 마스크를 고쳐 쓰며 축축한 입술을 씹었다. 짊어진 배낭의 무게는 어깨를 짓눌렀지만, 등 뒤에 매달린 수아의 작고 가벼운 몸만큼 소중한 것은 없었다.
“오빠… 목마르다.”
수아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녀의 작은 손이 지훈의 셔츠 자락을 약하게 잡아당겼다. 지훈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수아는 핼쑥한 얼굴에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잔뜩 지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시작된 열병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고, 남은 약은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조금만 더 버티자, 수아. 다 왔어.”
그는 거짓말했다. ‘다 왔다’는 말은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반복해 온 거짓말이었다. 사실 그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더 나은 곳, 안전한 곳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좇아 떠돌 뿐이었다. 그 희망조차 이제는 희미한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한때 번화했던 도시의 외곽이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잿더미와 폐허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뒤죽박죽 엉켜 있고, 뒤틀린 철골들이 기괴한 조형물처럼 하늘을 찔렀다. 발밑에는 깨진 유리 조각과 정체 모를 잔해들이 밟혔다.
“저기… 저 건물만 뒤져보자.”
지훈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반쯤 무너진 대형 상점이었다. 간판은 떨어져 나가고 뼈대만 남은 건물은 언제라도 주저앉을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지훈은 더 이상 선택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 버려진 물건이라도 찾아야 했다. 특히 수아의 열을 내릴 수 있는 약이 절실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입구는 거대한 콘크리트 파편과 녹슨 철근에 막혀 있었다. 지훈은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곡괭이를 꺼냈다. 땀과 먼지가 뒤섞인 채, 그는 끈기 있게 파편들을 들어내고 철근을 구부렸다. 옆에서 수아는 힘없이 주저앉아 그를 기다렸다. 가끔씩 그녀의 입에서 건조한 기침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참을 씨름한 끝에 겨우 사람이 드나들 만한 틈이 생겼다. 안은 외부보다 더 어둡고 음침했다. 썩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 지훈은 수아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낸 후, 자신이 몸을 웅크려 좁은 틈을 통과했다. 그의 손에 들린 랜턴의 빛이 칠흑 같은 어둠을 겨우 가르고 나아갔다.
“수아, 내 옆에 꼭 붙어 있어.”
폐허가 된 상점 내부는 마치 거인의 내장처럼 뒤틀려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려 있었고,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던 선반들은 모두 쓰러져 부서져 있었다. 잿더미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형체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오빠, 저게 뭐야?”
수아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작은 그림자를 가리켰다. 지훈은 본능적으로 라이플을 움켜쥐었다. 랜턴 빛을 그곳으로 향하자, 녹슨 쇼핑 카트와 그 안에 뒤엉켜 있는 마네킹 조각들이 보였다.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는 숨을 고르며 주변을 경계했다. 헛것이 보일 만큼 지친 상태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쓰레기.”
그는 수아의 손을 잡고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 의류 코너였던 곳을 지나, 생활용품 코너로 추정되는 곳에 이르렀다. 바닥에는 깨진 식기들과 찢어진 포장지들이 널려 있었다. 지훈은 허리를 굽혀 꼼꼼히 주변을 살폈다.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통조림이라도, 혹은 더 귀한 것이라도.
그의 시선이 한쪽 벽에 기대어진 낡은 진열장으로 향했다. 진열장은 아슬아슬하게 기울어져 있었지만, 그나마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훈은 희미한 희망을 품고 다가갔다. 먼지 쌓인 유리문 안쪽에는 몇몇 물건들이 보였다. 그중에는 오래된 구급상자가 있었다.
“찾았다.”
낮게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진열장 문을 열었다. 구급상자는 누군가 급하게 가져가려다 놓친 듯, 반쯤 열린 채 바닥에 놓여 있었다. 상자 안에는 말라붙은 붕대와 소독약, 그리고 기적처럼 작은 알약 통 하나가 들어 있었다. ‘해열 진통제’라고 흐릿하게 인쇄된 라벨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수아, 찾았어! 약이야!”
수아는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지훈은 서둘러 약통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건물이 섬뜩하게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바깥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 속에 기이한 울림이 들려왔다.
‘—…어…와….’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웅얼거리는 듯한, 알아들을 수 없으면서도 명확하게 들려오는 속삭임이었다. 소리는 마치 그의 뇌 안에서 직접 울리는 듯했다. 지훈의 등골에 한 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무너진 잔해들뿐이었다.
“오빠, 무슨 소리야?”
수아 역시 그 소리를 들은 듯했다. 그녀의 작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 지훈은 약통을 손에 쥔 채, 라이플을 다시 단단히 쥐었다. 그 소리는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그들을 위협하는 흔한 괴물들의 포효나 신음과는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존재해서는 안 될, 우주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듯한 소리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수아. 그냥 바람 소리야. 빨리 나가자.”
그는 애써 침착하게 말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알 수 없는 공포가 꿈틀거렸지만, 수아를 위해 내색할 수 없었다. 지훈은 약을 주머니에 넣고, 수아를 다시 등에 업었다. 서둘러 좁은 틈을 통해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세상은 이미 황혼에 물들어 있었다. 붉고 검은 구름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고, 땅거미가 내리자 무너진 건물들의 그림자가 기괴하게 길어졌다. 지훈은 서둘러 인적이 드문 골목길을 택해 걸었다. 폐허의 공기는 더욱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는 수아가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품속 깊이 안았다.
“우리… 어디로 가?”
수아의 목소리는 다시 희미해졌다.
“음… 음… 오늘은 괜찮은 곳에서 쉬게 해줄게. 오빠가 찾아놨어.”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며칠 전, 그는 폐허가 된 주택가를 수색하다가 비교적 안전해 보이는 지하실을 발견했다. 예전에는 아마 작은 도서관이었던 듯, 책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있는 곳이었다. 입구가 무너진 차량으로 가려져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어둠이 완전히 내린 후에야 그들은 지하실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차량을 밀어내고 좁은 입구를 통해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랜턴을 비추자 축축하고 차가운 공기가 그들을 맞았다. 한때 책꽂이가 빼곡했을 공간은 이제 텅 비어 있었고, 구석에는 먼지 쌓인 책 몇 권만 나뒹굴고 있었다.
지훈은 배낭을 내려놓고 작은 담요를 펼쳤다. 그는 조용히 수아를 내려놓았다.
“자, 이제 약 먹자.”
그는 작은 알약 하나를 수아의 입에 넣어주고, 남은 물을 조심스럽게 먹였다. 쓴 약을 삼키는 수아의 얼굴이 찡그려졌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열에 지쳐 잠이 든 수아의 얼굴을 보며 지훈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하실 입구에 앉아, 조용히 밖을 응시했다. 밤은 깊어지고, 멀리서 들려오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때때로 하늘에서는 알 수 없는 빛들이 번쩍였다. 그것은 번개도, 유성도 아니었다. 그저 알 수 없는, 거대한 존재들이 이 세상에 드리운 그림자일 뿐이었다.
지훈은 라이플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을 뻗어 약통을 만져보았다. 몇 알 남아 있지 않았다. 다시 약을 찾아 나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그들의 생존은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끝없는 탐색, 끝없는 도주, 그리고 끝없는 공포.
이 황폐해진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단순히 숨을 쉬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일 밤, 저 어둠 속에 도사린 존재들이 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그리고 동시에 언젠가 저 거대한 하늘의 균열이 완전히 벌어져, 그들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날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지훈은 침묵 속에서 차가운 총열을 어루만졌다. 내일은 또 어떤 재앙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까. 그의 눈빛은 짙은 어둠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작은 불씨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