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무거웠다. 찢어진 비닐하우스 지붕 사이로 스며드는 흙먼지 섞인 햇살은 희미했고, 눅눅한 공기는 퀘퀘한 곰팡이 냄새와 녹슨 쇠 냄새로 가득했다. 지혁은 녹슨 쇠 파이프를 쥐고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작업화가 으깨진 벽돌 부스러기를 밟을 때마다 거슬리는 소음이 터졌다.

오늘 목표는 폐허가 된 병원의 지하 창고였다. 소문으로는 아직 쓸만한 약품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그건 지겹도록 들어온 ‘소문’ 중 하나일 뿐이었지만, 당장 마을의 어린아이들에게 필요한 해열제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그는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젠장, 또 놈들 흔적이야.”

벽에 긁힌 검붉은 자국. 사람이 아닌, 어떤 짐승의 발톱 자국이었다. 거대한 맹수와는 달랐다. 분명 날카롭지만, 기이하게도 질서 정연한 선. 그것은 ‘변종’들의 흔적이었다. 예전 세상의 동물들이 바이러스에 잠식되어 흉측하게 변이한 괴물들. 그들은 그림자처럼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가장 취약한 순간을 노렸다.

지혁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지만,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다. 훈련받은 대로, 폐건물의 구조를 머릿속에 그리며 가장 안전한 길을 택했다. 복도를 지나 계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크르르르…*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울렸다. 지혁은 즉시 몸을 낮춰 옆 벽에 바짝 붙었다. 소리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적어도 두세 마리. 변종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더욱 위험했다.

손바닥에 땀이 흥건했다. 쇠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숨을 죽이고 그림자 속에서 기다렸다. 놈들의 육중한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썩어가는 고기 냄새가 역하게 코를 찔렀다. 놈들은 후각으로 사람을 쫓았다.

세 마리의 변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와 개의 중간쯤 되는 크기.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카로운 발톱과 송곳니, 그리고 온몸을 뒤덮은 시커먼 털 사이로 불규칙하게 솟아난 뼈 돌기들이 흉측했다. 특히 빛 없는 눈동자는 피에 굶주린 광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지혁은 움직이지 않았다. 변종들은 킁킁거리며 복도를 탐색했다. 놈들이 그를 지나쳐 갈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선두에 선 변종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허공을 향해 포효했다.

“크아아악!”

들켰다.

지혁은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날렸다. 선두에 선 변종의 목덜미를 쇠 파이프로 후려쳤다.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변종은 휘청거리며 쓰러졌지만, 곧바로 비틀거리며 다시 일어섰다. 놈들은 어지간한 타격으로는 죽지 않았다. 뇌를 직접 공격하거나, 치명상을 입혀야만 했다.

나머지 두 마리가 좌우에서 달려들었다. 지혁은 벽을 등지고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놈들의 발톱이 벽을 긁으며 섬뜩한 소리를 냈다. 한 마리가 그의 다리를 노리고 달려들었을 때, 그는 파이프를 휘두르며 점프해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한 마리의 변종이 그의 뒤를 노렸다.

*휘익!*

날카로운 발톱이 지혁의 등 뒤를 향해 뻗어왔다. 피할 수 없었다. 등 뒤에서 따가운 고통이 밀려왔다. 그는 비명을 삼키며 앞으로 굴렀다. 등에 깊은 상처가 났음을 직감했다.

“젠장…!”

변종들은 먹잇감을 발견한 굶주린 짐승처럼 그를 포위했다. 놈들의 눈은 붉게 번뜩였다. 이대로 끝인가. 지혁은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다. 놈들에게 찢겨 죽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마지막 발악을 준비하며 쇠 파이프를 고쳐 쥐었다.

바로 그때였다.

*쉬이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번개처럼 날아왔다. 섬광처럼 빛나는, 날카로운 파편. 그것은 선두에 서 있던 변종의 머리에 정확히 박혔다. 놈은 짧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게 굳어버린 채.

지혁은 눈을 깜빡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이해하기도 전에, 두 번째 파편이 날아왔다. 이번에는 다른 변종의 심장 부위. 놈은 발버둥 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남은 한 마리는 당황한 듯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이내 살기 어린 눈으로 어둠 속을 노려봤다. 지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은 파편이 날아온 곳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이 어둠에 물들어 있었고, 늘씬한 몸매는 밤색 가죽 옷에 싸여 있었다. 후드 아래 가려진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두 눈만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빛이 감도는 은색 눈동자. 차갑지만 어딘가 신비로운, 인간의 것이 아닌 눈동자였다.

‘황혼족…?’

지혁의 머릿속에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폐허 너머 숲 속에 산다는 이형의 존재들. 인간과는 다른 생김새, 다른 언어, 그리고 인간을 해친다는 소문이 자자한 존재들. 그들은 ‘황혼족’이라 불렸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움직였다.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부드러운 움직임. 남은 변종은 그 그림자를 향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었다. 마치 거대한 뱀이 먹이를 덮치듯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더 빨랐다. 그녀의 손에서 또 다른 파편이 번쩍였다. 이번에는 날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손에 쥐어진 채 그대로 휘둘러졌다. 변종의 목이 피를 뿜으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나머지 몸통은 힘없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싸움은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뛰었다. 공포와 경계, 그리고 미약한 경외감. 복합적인 감정이 그를 덮쳤다.

황혼족은 쓰러진 변종들을 한 번 훑어보더니, 천천히 지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후드 아래의 얼굴이 조금 더 드러났다. 창백한 피부, 날카롭게 뻗은 턱선. 그리고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은 은색 눈동자.

그녀의 시선이 지혁의 등 뒤에 난 상처에 닿았다.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이내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왔다.

“오지 마…!”

지혁은 쉰 목소리로 외쳤다. 쇠 파이프를 휘둘러 경고했다. 그녀는 그제야 멈춰 섰다. 차가운 은색 눈동자가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마치 그의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응시할 뿐. 고요한 침묵이 폐허를 가득 채웠다. 지혁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이형의 존재가 뿜어내는 알 수 없는 기운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그녀는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둠 속에 숨겨져 있던 무언가를 꺼냈다. 작고 투명한 유리병이었다. 안에는 푸른빛을 띠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녀는 병을 내밀었다. 지혁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봤다. 독인가? 함정인가?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처음 듣는 언어. 알아들을 수 없는, 하지만 어딘가 부드럽고 맑은 음성이었다.

“…이런, 상처에… 좋아.”

어눌했지만, 분명 한국말이었다. 띄엄띄엄 끊어진 단어였지만, 뜻은 명확했다. 그녀는 그의 상처를 치료해주려 하는 건가?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아는 건가?

지혁은 혼란에 빠졌다. 마을 사람들은 황혼족을 ‘괴물’이라고 불렀다. 인간을 해치고,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런데 이 황혼족은… 자신을 구해줬고, 심지어 치료제를 건네고 있었다.

그의 등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다. 상처는 점점 더 쓰라려왔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녀는 여전히 병을 내민 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은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 시선 속에는 위협이나 적의가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평온함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이게, 뭐야…?”

지혁은 겨우 입을 열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아픔, 사라져.”

아픔이 사라진다고.

지혁은 망설였다. 평생 들어온 경고와 지금 눈앞의 현실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빛 속에서, 그는 어떤 종류의… 호기심을 보았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스치는 순간, 차가운 온기가 전해졌다. 인간의 것과는 다른, 서늘하고 매끄러운 감촉이었다.

병을 받아든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약한 변화가 스쳤다. 후드 아래 가려져 있던 입술 끝이 아주 살짝 위로 올라가는 듯했다. 그건… 미소였다.

지혁은 병을 쥔 채,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인간과 황혼족. 그 금지된 경계가 흔들리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 자신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이름은?” 지혁은 묻고 싶었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질문을 이해한 듯, 아니면 그저 자신의 역할을 다 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둠 속으로 다시 사라질 준비를 하는 듯했다.

지혁은 다급하게 외쳤다.

“잠깐만! 당신…!”

하지만 그녀는 이미 몸을 돌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을 마주했을 때, 그녀의 은색 눈동자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둠 속의 별처럼.

그리고 그녀는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지혁은 홀로 남아, 핏자국이 선명한 복도와 손에 든 푸른빛 액체 병, 그리고 미지의 황혼족이 남긴 잔상을 응시했다. 심장이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쳤다.

새로운 세상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