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진짜. 이 함선 조종간은 왜 또 이 모양이야?”
저 먼 우주에서, 고작 자판기 커피 한 잔 뽑으려다 손가락을 데인 한유진이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그녀의 어깨너머로, 푸른빛이 감도는 광활한 우주가 창밖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캡슐 안에서 졸고 있는 듯한 ‘아틀란티스’ 호는 인류 역사상 가장 심오한 심우주 탐사선이었고, 그녀는 그 영광스러운 항해의 막내 연구원이었다. 물론, 지금 그녀의 가장 큰 임무는 엉망진창인 자판기와 씨름하는 것이었지만.
“한 연구원, 오늘도 지독한 아침을 맞이하는군.”
능글맞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이 함선에서 저런 느끼하고 재수 없는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바로 함장 대리이자 그녀의 직속 상사인 이강훈이었다. 이강훈은 늘 완벽하게 다듬어진 헤어스타일과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하고 나타났는데, 오늘따라 그 미소가 유독 거슬렸다.
“함장 대리님, 조종간이 또 고장 났습니다. 이거 벌써 세 번째입니다.”
유진이 뜨거운 컵을 흔들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강훈은 그녀의 옆으로 다가와 얄밉게도 완벽한 자세로 커피를 뽑아 들었다. 그의 커피는 언제나처럼 아무 문제없이 내려왔다.
“흐음, 기계도 사람을 가리는 모양이지. 유진 연구원은 너무 딱딱해서 기계도 놀라는 거 아닐까?”
“제가 딱딱하면 함장 대리님은 기름투성이시죠. 미끌거려서 잡히지도 않을 정도랄까요.”
유진이 대꾸하며 휙 돌아서자, 강훈의 낮은 웃음소리가 그녀의 등 뒤를 따라왔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두 사람은 시도 때도 없이 티격태격했다. 주변에서는 그런 그들을 보고 ‘결혼할 사이’ 아니면 ‘곧 터질 폭탄’이라고 수군거렸지만, 유진은 후자에 가까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녀가 함교로 들어서자, 오늘 아침 첫 번째 보고를 기다리고 있던 박사무엘 박사가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유진 연구원, 드디어 나타났군! 자네 없으니 뭔가 허전해. 이 우주선에서 자네만큼 깐깐하게 데이터를 쪼개보는 사람은 없어!”
박 박사는 인류 최고의 외계 문명 연구자였다. 그는 늘 세상의 모든 외계 종족과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낙천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박사님, 그냥 제가 자리를 자주 비워서 그렇겠죠.”
유진이 대충 대꾸하며 자신의 콘솔에 앉았다. 이 광활한 우주에서 그녀의 임무는 탐사선이 수집하는 모든 종류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상 징후를 감지하는 것이었다.
“다들 자리에 착석. 일일 보고 시작한다.”
강훈의 목소리가 엄격하게 울려 퍼졌다. 그는 일단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빈틈없는 함장 대리였다. 모든 승무원이 각자의 자리에서 화면을 응시했다.
“어제까지의 항해 경로 정상. 탐사 구역 D-17 완전 스캔 완료. 특이 사항 없음.”
조종사 김민준 대위의 보고가 이어졌다. 민준 대위는 과묵한 성격이었지만, 조종 실력만큼은 우주 최고였다. 그는 늘 미간을 찌푸린 채 어딘가 불만이 있는 듯 보였다.
“통신 상태 양호. 지구와의 주기적인 링크도 문제 없습니다.”
통신관 아라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라는 이 딱딱한 함선에서 유일하게 싱그러운 기운을 뿜어내는 존재였다. 그녀는 늘 긍정적이고 밝았으며, 유진에게 “유진 선배, 강훈 선배랑 너무 싸우지 마요. 두 분 사실은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같은 말을 서슴없이 던지는 발랄한 후배였다.
“박 박사님, 외계 생명체 반응은 없습니까?”
강훈이 박 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박 박사는 눈을 반짝이며 화면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하지만 이 우주는 넓고, 미스터리는 언제나 우리를 기다리고 있지!”
그때였다. 유진의 콘솔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삐이익- 삐이익-!’ 평소에는 듣기 힘든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무슨 일이지?” 강훈의 목소리에 날카로움이 묻어났다.
유진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리며 화면을 응시했다. “강한 에너지 시그널이 감지되었습니다. 이전에는 없던 패턴입니다.”
“에너지 시그널? 혹시… 외계 생명체?” 박 박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뇨, 생명체 반응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에너지는 매우 독특해요. 마치 어떤 규칙적인 주파수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속도가 너무 빨라서 현재까지의 탐사 기록에는 없는 물질 같습니다.”
유진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섞였다. 그녀는 수십 년간 축적된 인류의 모든 과학 데이터베이스를 탐색했지만, 이런 패턴의 에너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위치 확인해.” 강훈의 명령이 떨어졌다.
“현재 아틀란티스 호에서 약 32만 킬로미터 전방. 초고밀도 소행성대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민준 대위가 즉시 경로를 확인하며 보고했다.
“소행성대라고? 그곳은 스캔으로도 침투가 어려울 텐데.”
“정확히 그렇습니다. 이 에너지 시그널은 소행성대의 방해 전파를 뚫고 오고 있어요. 최소한 엄청난 출력이거나, 아니면… 우리 기술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특수한 성질을 가진 에너지일 겁니다.”
유진은 손에 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평화롭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했던 심우주 탐사선에 드디어 뭔가 ‘사건’이 터진 것이다.
“방향 전환. 민준 대위, 최대 출력으로 접근한다. 아라, 함선 전체 비상 대기 상태 전환. 박 박사님, 탐사 장비 최대로 가동 준비해 주십시오. 유진 연구원, 계속 에너지 패턴 분석해.”
강훈의 지시는 빠르고 정확했다. 그는 역시 유능한 함장 대리였다. 유진은 그 순간만큼은 그의 느끼하고 재수 없는 면모를 잊고 그의 리더십에 집중했다.
아틀란티스 호는 굉음을 내며 방향을 틀었다. 거대한 함선이 텅 빈 우주를 가로질러 미지의 에너지원을 향해 돌진했다. 창밖으로는 별들이 선처럼 길게 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곧이어 화면에는 우뚝 솟은 검은 바위들이 빼곡한 소행성대가 나타났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함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유진 연구원, 거리!” 강훈이 외쳤다.
“10만 킬로미터, 5만, 1만… 젠장, 사라졌습니다!”
유진의 다급한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그녀의 화면에는 방금까지 붉게 번쩍이던 에너지 시그널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졌다고? 대체 무슨 말이지?” 강훈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쳤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감쪽같이 사라졌어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잔여 에너지 파동은 감지됩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특정 지점에 집중되어 있어요!”
유진은 황급히 좌표를 계산했다. “저기입니다! 소행성대 한가운데, 가장 밀집된 지역의 빈 공간입니다!”
“빈 공간…?”
민준 대위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레이더에는 그저 암석과 먼지만 가득한 곳이었다.
“강훈 함장 대리님, 탐사 소형 비행정을 출동시켜야 합니다! 육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박 박사가 흥분해서 말했다.
강훈은 잠시 망설였다. 미지의 에너지원이 사라진 곳에, 그것도 위험한 소행성대에 탐사정을 보내는 것은 분명 무모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은 과학자들의 숙명이었고, 탐사선 승무원들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알겠다. 민준 대위, 탐사정 출격 준비. 조종은 내가 한다. 유진 연구원, 동행해서 직접 패턴을 분석해.”
“네? 제가요?” 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그 위험한 곳에 강훈과 단둘이 가라고? 그녀는 순간 거절하려 했지만, 이내 눈빛이 바뀌었다. 이 미스터리를 직접 풀어낼 기회였다. 게다가, 강훈이 조종하는 탐사정에 탄다면, 그가 얼마나 능숙하게 운전하는지 지켜볼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물론 그녀는 그의 운전 실력에 대해 끊임없이 트집을 잡을 예정이었다.)
***
“벨트 꽉 맸나, 유진 연구원? 내 조종 실력에 홀딱 반할지도 모르니 조심하라고.”
좁은 탐사정 안에서 강훈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탐사정 ‘하이에나’ 호는 아틀란티스 호의 보조선으로, 소형 탐사용으로 특화된 기체였다.
“제발 추락만 하지 마세요. 홀딱 반할 겨를도 없이 저 세상으로 갈 테니.”
유진이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안전벨트를 단단히 조였다. 탐사정은 아틀란티스 호의 격납고를 빠져나와 거친 소행성대로 진입했다. 수많은 암석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강훈의 손은 조종간 위에서 유려하게 움직였다. 그는 작은 암석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가며 하이에나 호를 능숙하게 몰았다. 유진은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의 조종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었다.
“좌표로 진입 중. 충돌 가능성 70%.” 민준 대위의 경고음이 무전기를 통해 들려왔다.
“괜찮다. 내가 누군데.” 강훈은 여유롭게 대답하며 기체를 더욱 깊숙이 몰아붙였다.
곧이어 유진의 화면에 잔여 에너지 파동이 가장 강하게 감지되는 지점이 표시되었다. 그곳은 소행성대가 빽빽하게 들어찬 곳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한가운데는 텅 비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공간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바로 저기입니다!” 유진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가리켰다.
강훈은 하이에나 호를 그 빈 공간으로 부드럽게 진입시켰다. 그리고 모두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소행성들 사이에 홀로 떠 있는 것은… 검은색의 매끈한 구체였다. 농구공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고, 어떤 금속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지구상의 어떤 문자나 문명에서도 본 적 없는 기하학적인 패턴이었다. 그리고 그 구체는 아주 미약하게, 푸른색과 보라색 빛을 뿜어내며 주기적으로 ‘웅-‘ 하는 낮은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세상에…!”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이것이… 그 에너지원의 정체였단 말인가.” 강훈의 목소리에도 경외감이 서렸다.
이것은 인류가 우주에서 최초로 발견한 명백한 외계 문명의 흔적이었다. 그것도 지구로부터 수십만 광년 떨어진,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심우주에서.
“유진 연구원, 스캔!”
유진은 재빨리 탐사정의 모든 센서를 구체에 집중시켰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스캔 불가능합니다. 어떤 센서도 이 구체의 내부를 읽어낼 수 없어요. 마치 모든 전파를 흡수하는 것 같습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을 만큼 견고한 재질인가?”
“아뇨, 표면은 아주 매끄러워 보입니다. 마치… 만지면 부드러울 것 같은 재질입니다.”
강훈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심스럽게 탐사정을 구체에 더욱 가까이 접근시켰다. 이제 구체는 유리창 바로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 순간, 구체에서 뿜어져 나오던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푸른색과 보라색이 뒤섞이며 현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이내, 구체의 표면에 홀로그램 영상이 투영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흐릿한 형체였으나, 곧 선명해졌다.
화면에는… 우주선 아틀란티스 호의 승무원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강훈은 눈을 크게 떴다. “이게… 무슨?”
구체가 보여주는 영상은 단순한 승무원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첫 번째 영상은 주먹을 꽉 쥐고 뭔가에 잔뜩 짜증 내는 유진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젓고 있었고, 그 옆에는 느끼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놀리는 강훈의 모습이 홀로그램으로 떠 있었다.
유진은 자신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다음 영상이 이어졌다. 이번에는 민준 대위가 조종석에서 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옆에는 아라가 몰래 다가와 그의 머리에 낙서를 하는 모습이 펼쳐졌다.
“으악! 아라!” 민준 대위의 목소리가 무전기를 뚫고 비명처럼 들려왔다.
그리고 이내 구체는 새로운 영상을 띄웠다. 이번에는 박 박사가 외계인 봉제 인형을 품에 안고 행복하게 잠든 모습이었다.
모두가 경악했다. 이 구체는 어떻게 아틀란티스 호 승무원들의 이런 사적인 순간들을 알고 있는 것인가? 더군다나, 방금 막 일어난 일처럼 생생하게.
“이게 뭐야…! 도대체 이 구체의 정체가 뭐냐고!” 유진이 소리쳤다.
구체는 유진의 외침에 반응하듯, 마지막 영상을 띄웠다.
이번에는 강훈과 유진이 탐사정 안에서 티격태격하다가,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서로에게 밀착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마치… 키스라도 할 것처럼.
“읍-!”
유진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녀는 얼른 강훈을 쳐다봤다. 강훈 역시 당황한 얼굴로 구체를 바라보다가, 이내 뜨거워진 얼굴로 유진을 흘끗 쳐다봤다.
갑자기, 하이에나 호 안에는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마치 우주 공간처럼 넓고 깊었다.
“이, 이건… 조작된 거야! 그래! 외계인이 우리를 농락하려는 거라고!”
유진은 더듬거리며 외쳤다. 강훈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했지만, 그의 귀 끝은 이미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그럴 리가. 외계 문명이 이런… 이런 영상을 왜 보여주겠나.”
강훈이 허둥지둥 변명하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구체의 마지막 영상은 그들의 심장에 비수를 꽂아 넣은 후 사라졌고, 이내 다시 푸른빛과 보라색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며 조용히 떠 있었다.
이 미지의 외계 유물은, 인류의 지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들의 가장 은밀한 순간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앞으로 이 심우주 탐사선에 탑승한 이들의 관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방금 전 구체가 보여준 마지막 영상이었다.
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저 느끼하고 재수 없는 함장 대리랑… 키스할 뻔한 모습이라니! 최악의 악몽이었다.
강훈은 슬그머니 유진을 쳐다봤다. 그녀의 빨개진 귀 끝을 보니, 그의 얼굴도 다시금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헛기침을 하며 조종간을 잡았다.
“일단… 회수하자. 박 박사님께 보고해야겠군.”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건조했다. 그리고 유진은 확신했다. 이 알 수 없는 구체가 아틀란티스 호에 실리는 순간, 심우주 탐사선 ‘아틀란티스’ 호의 평화는 영원히 깨질 것이라고. 그리고 그 중심에는… 자신과 이강훈 함장 대리가 있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1챕터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