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모래바람이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를 할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으로 쇠 부스러기가 섞인 흙먼지가 파고드는 듯했다. 하준은 낡은 마스크를 더욱 단단히 고쳐 썼지만, 그 방어막은 이미 허울뿐이었다. 수명이 다한 필터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매캐한 냄새가 필터를 뚫고 코끝을 찔렀다.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온통 잿빛과 붉은색의 혼합이었다. 한때 번화했던 도시는 거대한 무덤이 되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젠장….”
갈라진 목소리가 마스크 안에서 맴돌았다. 벌써 삼 일째였다. 이 빌어먹을 도시 폐허를 헤집고 다녔지만, 마실 만한 물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마지막 남은 정화 필터는 이미 바닥났고, 플라스크 바닥에는 흙탕물 같은 것이 겨우 흔적처럼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온몸의 근육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갈증은 그의 뇌를 갉아먹는 듯했다. 환영처럼 아른거리는 차가운 물줄기를 따라가다 몇 번이나 헛된 희망에 속았다.
그는 삐걱거리는 금속 소리를 내며 무너진 상점의 잔해를 넘어섰다. 한때 슈퍼마켓이었을 곳. 녹슨 쇼핑 카트가 먼지구덩이에 박혀 있었고, 진열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쓰레기 더미로 변해 있었다. 과거의 번영은 이제 조롱거리가 되어 그의 발밑에 뒹굴었다.
“하다못해… 먹을 거라도.”
하준은 절망적인 기분으로 중얼거렸다. 물도 물이지만, 며칠째 입에 넣은 것이라고는 건조하고 딱딱한 비상식량 조각 몇 개뿐이었다. 그것마저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굶주림은 인간의 존엄성을 갉아먹고, 짐승으로 만들었다. 그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지독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눈을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거대한 구멍이 뚫린 천장 너머로 붉은 하늘이 보였다. 끝없이 펼쳐진 먼지 구름과 그 사이로 희미하게 빛나는 태양.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바스락거리는 모래먼지로 돌아갈 것처럼 보였다. 그는 이 황폐한 세상에서 혼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남은 이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은 친구보다는 언제 등 뒤를 칠지 모르는 적에 가까웠다.
문득, 코끝을 스치는 퀴퀴한 냄새 속에서 희미하게 뭔가가 느껴졌다. 아주 미세한, 하지만 분명한 인공적인 냄새. 통조림 캔이 부식될 때 나는 금속성 비린내와는 달랐다. 혹시…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에 그의 심장이 미약하게나마 고동치기 시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낡은 방사능 측정기가 허리춤에서 조용히 낮은 경고음을 내고 있었다. 이 정도 수치는 일상적이었다. 더 이상 놀랍지도 않았다. 냄새가 이끄는 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선반과 깨진 유리 조각들이 널려 있는 곳. 한때 냉동식품 코너였을 법한 곳의 잔해였다.
그곳에서 그는 완전히 무너져 내린 진열대 아래, 간신히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작은 창고 문을 발견했다. 두꺼운 강철 문은 녹이 슬어 있었지만, 다른 곳처럼 완전히 부서지지는 않은 채 굳게 닫혀 있었다. 그 문 너머에서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지만, 신선한 무언가의 기운이.
하준은 조심스럽게 문에 다가섰다. 손잡이를 잡아보니, 뻑뻑하게 움직였지만 잠겨 있지는 않았다. 그는 온몸의 힘을 모아 문을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쇳소리가 폐허에 울려 퍼졌다. 붉은 먼지들이 한 차례 쏟아져 내렸다. 마침내 문이 겨우 팔꿈치만큼 벌어졌다.
어둠 속에서 눅눅하고 서늘한 공기가 훅 끼쳐 나왔다. 그리고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분명히, 아직 상하지 않은 무언가의 냄새였다. 침이 고였다. 그는 주저 없이 좁은 틈새로 몸을 밀어 넣었다. 안은 완전한 암흑이었다. 손전등을 꺼내 조심스럽게 주위를 밝혔다.
창고 내부는 예상보다 훨씬 깨끗했다.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바깥의 황폐함과는 사뭇 달랐다. 선반에는 녹슬지 않은 통조림 캔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전부 다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는 플라스틱 병에 담긴 물통들이 보였다.
“세상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멍하니 그것들을 바라봤다. 기적이었다. 이 지옥 같은 폐허 속에서 이런 것을 찾을 수 있을 줄이야. 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통조림 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라벨은 알아볼 수 없게 훼손되었지만, 캔 자체는 멀쩡했다. 그리고 물통. 한 병을 집어 들어 흔들어보니, 찰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갈증과 굶주림에 지쳤던 몸에 순식간에 활력이 돌았다. 그는 허겁지겁 물통 마개를 열었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순간, 온몸의 세포들이 환호하는 것 같았다. 폐허 속에서 맛보는 한 모금의 물은 어떤 낙원의 샘물보다 달콤했다. 그는 연이어 두 병을 비웠다. 뱃속이 물로 가득 차자,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통조림 하나를 뜯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육류 통조림이었다. 비록 기름기가 굳어 있었지만, 상하지는 않았다. 그는 급하게 숟가락도 없이 손가락으로 내용물을 퍼먹었다. 짜고 기름진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며칠간 맛보지 못했던 진정한 ‘음식’의 맛이었다.
이대로라면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을 터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통조림과 물통 몇 개를 가방에 챙겼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에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런 곳에는 항상 무언가가 뒤따르는 법이었다. 너무나 완벽한 보물은 언제나 함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손전등을 비춰 창고 내부를 꼼꼼히 살폈다. 선반의 맨 안쪽, 가장 구석진 곳에 작은 금고 같은 것이 보였다. 녹슬었지만 단단해 보이는 금고. 열쇠 구멍은 없었고, 오래된 다이얼식 잠금장치만 보였다. 아무리 돌려도 열릴 기미는 없었다.
“이런 게 왜 여기….”
하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통조림과 물이 있는 곳에 왜 이런 금고가 있을까? 단순한 재고 창고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는 금고를 포기하고 다시 주변을 살폈다. 선반 뒤편, 금고와 벽 사이의 좁은 틈새에 그의 눈길이 닿았다.
거기에는 아주 작고 희미한 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마치 기계의 대기 신호처럼, 느리게 푸른빛이 명멸했다. 그는 손전등을 그곳에 비췄다. 벽돌이 무너져 생긴 좁은 균열이었다. 그 균열 너머에서 푸른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빛은 인공적이었다. 규칙적이고 차분한 그 빛은 폐허 속에서 홀로 살아있는 심장처럼 보였다.
궁금증이 솟구쳤다. 이 폐허의 심장부에 무엇이 있을까? 또 다른 생존자? 아니면 과거의 유물? 그는 망설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 얻은 물과 식량을 가지고 안전한 은신처를 찾는 것이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푸른빛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균열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고요함 속에서 푸른빛만이 그를 유혹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균열의 가장자리를 더듬었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성 느낌이 닿았다. 일반적인 시멘트나 벽돌은 아니었다.
균열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는 손전등을 균열 속으로 찔러 넣어봤다. 빛이 닿는 곳은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었다. 그리고 아주 멀리, 더 깊은 곳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다시 한번 명멸하는 것이 보였다.
하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본능은 경고했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호기심이 그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폐허 속에서 발견한 보물 같은 물과 식량은 그에게 짧은 여유와 함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용기를 주었다. 그는 결심했다.
“한번… 가보는 거지, 뭐.”
그는 작은 망치를 꺼내 들고 조심스럽게 균열 주변의 벽을 두드렸다. 부서진 벽돌과 시멘트 조각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희미하게 푸른빛이 그의 눈앞에서 더욱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 미지의 통로가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지루하고 절망적인 생존 속에서, 그것은 처음으로 그에게 던져진 ‘의미’ 있는 질문이었다. 하준은 망치로 벽을 내리치며, 푸른빛이 이끄는 어둠 속으로 한 걸음 내딛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