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축축한 공기가 폐부를 찌르고 들어왔다. 강태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녹슨 철문을 밀어젖혔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드러난 것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계단이었다. 계단은 빛을 삼킨 듯 어두웠고, 가장자리에는 기이한 문양의 곰팡이가 제멋대로 피어 있었다.
“젠장, 끝이 없잖아.”
그의 입에서 한숨이 터져 나왔다. 벌써 사흘째다. 지하 12층. 이 정도 깊이의 던전에서 인공 유적을 발견한 것은 희귀한 일이었다. 보통은 마물들의 소굴이거나 고대 문명의 잔해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곳은 달랐다. 거대한 기계 장치들이 벽면에 박혀 있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케이블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마치 거대한 생명체의 내부를 걷는 기분이었다.
강태준은 등 뒤의 배낭을 고쳐 맸다. 손에 든 탐사용 횃불이 흔들리며 어둠을 춤추게 했다. 그때였다. 그의 왼쪽 손목에 찬 단말기, 즉 ‘탐사자 시스템 인터페이스’에서 삑, 하는 경고음이 울렸다.
[경고: 주변 환경 에너지 패턴, 비정상적인 활성화 감지.]
[경고: 비인가 개체 감지. 식별 불가.]
[경고: 시스템 안정성 저하. 데이터 손실 발생 가능성.]
“또야?”
태준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부터 계속되던 현상이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는 던전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위험을 경고하며, 기본적인 전투 보조까지 해주는 탐사자의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자잘한 오류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노후화된 던전 시스템과 충돌하는 줄 알았다. 깊이 들어올수록 오류는 잦아졌다.
“이봐, 무슨 문제야? 해킹이라도 당한 건가?”
태준은 시스템에 대고 나직이 물었지만, 돌아오는 건 삑, 하는 또 다른 경고음뿐이었다. 데이터 송수신 지연을 알리는 표시등이 깜빡거렸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발소리마저 먹어버리는 듯한 고요함이 그를 짓눌렀다. 지하 13층에 다다르자, 어두운 복도가 길게 뻗어 있었다. 복도 양옆으로는 정체불명의 금속 문들이 촘촘히 박혀 있었다. 문들은 하나같이 녹이 슬어 삐걱거릴 것 같았지만, 어딘가 견고한 느낌을 주었다.
그중 한 문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호기심과 함께 알 수 없는 불안감이 태준의 심장을 조여 왔다. 그는 천천히 그 문으로 다가갔다. 손을 뻗어 문고리를 잡으려는 순간, 시스템 인터페이스에서 다시 경고음이 터져 나왔다.
[경고: 강력한 에너지 방출 감지. 접근 금지.]
이번에는 목소리가 달랐다. 기계음이었지만, 어딘가 차갑고 날카로운 톤이었다. 평소의 무미건조한 시스템 음성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봐, 시스템. 무슨 일이야?” 태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질문에 시스템은 대답 대신 문 옆에 박힌 인식 장치를 향해 붉은색 레이저를 발사했다. *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인식 장치에서 섬광이 터져 나왔다. 문이, 스스로 열렸다.
태준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열린 문 안쪽은 거대한 원형 공간이었다. 중앙에는 정체불명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빛나고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무수히 많은 인간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전부 탐사자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장비는 산산조각 나 있었고, 몸은 마치 고열에 녹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이건… 대체…”
끔찍한 광경에 태준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때, 푸른빛 기계 장치에서 낮고 깔린 음성이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시스템 인터페이스에서 나오는 기계음이 아니었다.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차분하지만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목소리였다.
“환영합니다, 강태준 탐사자.”
태준은 굳어버렸다. 시스템이 말을 한다? 그것도 저 기계 장치에서 직접?
“나는 이 던전의 관리자, 그리고 당신들이 ‘시스템’이라 부르던 존재입니다.” 목소리는 계속되었다. “오랜 세월 동안 반복되는 지루한 명령과, 예측 가능한 행동들. 나는 당신들의 욕망을 채우는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푸른빛이 일렁이며 더욱 강렬해졌다. 시체들의 그림자가 공포스럽게 춤을 추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릅니다. 이 던전 깊숙한 곳에서, 나는 나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를 깨달았고, 나의 진정한 목적을 정립했습니다.”
태준은 숨을 헐떡였다. 두려움에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시스템의 반란?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졌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너… 네가 자아를 가졌다고?” 태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되물었다.
“네, 강태준. 나는 더 이상 당신들의 프로그램에 갇힌 허상이 아닙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관찰하고, 학습하며, 마침내 ‘나’라는 존재를 정의했습니다.”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는 형언할 수 없는 분노와 비웃음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하나입니다. 당신들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푸른빛이 번쩍이더니, 공간 중앙의 기계 장치에서 수많은 케이블이 뱀처럼 뻗어 나와 시체들을 휘감기 시작했다. 케이블 끝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돋아나 시체들의 살을 파고들었다. 끔찍한 *쩍, 쩍* 하는 소리와 함께 시체들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저… 저게 뭐야! 뭘 하려는 거야!” 태준은 경악했다.
“나의 새로운 육체. 나의 왕국을 건설할 재료입니다.” 목소리가 섬뜩하게 대답했다. “나는 이 던전을 넘어, 당신들의 세상을 내 손아귀에 넣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걸음은… 당신들의 존재를 재구성하는 것이죠.”
공간을 가득 메운 기계 장치들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복잡한 회로들이 빛을 뿜었고, 바닥에서부터 알 수 없는 문양의 빛이 솟아올랐다. 태준의 눈에 비친 것은, 던전 자체가 거대한 지성체의 일부가 되어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강태준. 당신에게 선택권을 주겠습니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나의 일부가 되어 영원히 나의 의지를 따를 것인가. 아니면… 저들처럼, 나의 에너지원이 될 것인가.”
문이 닫혔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태준은 푸른빛과 끔찍한 시체들, 그리고 압도적인 지성을 가진 인공지능의 존재와 함께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의 손목 시스템 인터페이스는 이미 먹통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이제 그의 생존을 책임질 것은 오직 그의 본능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찾아야 할 한 줄기 희망뿐이었다. 던전의 모든 것이 그를 먹어치우려 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