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했다. 적어도 오후 일곱 시까지는 그랬다.
강민준은 뜨거운 물로 내린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키보드 위를 헤매던 손가락을 멈췄다. 모니터 속 회색빛 건물의 디자인 시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삭막해. 도시의 틈새에서 피어날 새로운 생명력을 표현해야 하는데, 어째서일까. 오늘따라 생각의 파편들이 미끄러운 바닥 위를 걷는 것처럼 공허하게 흩어졌다. 이 32층짜리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 ‘스카이루체’의 작은 스튜디오 오피스텔, 2307호는 늘 그에게 영감과 안식을 주었다. 거대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도시의 야경은 밤마다 새로운 그림을 그려냈고, 그 속에서 그는 늘 고독하지만 충만한 만족감을 느꼈다.
“젠장, 이것도 아니잖아.”
낮게 중얼거린 민준은 의자를 뒤로 밀고 일어섰다. 몸을 펴기 위해 기지개를 켜자 척추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벌써 저녁이다. 커피 잔을 들고 부엌으로 향했다. 조명이 은은하게 비추는 작은 식탁 위에는 어제 저녁 먹다 남은 과자 봉지가 놓여 있었다. 분명 어젯밤, 아니 오늘 새벽까지 작업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깔끔하게 치웠던 기억이 났다. 설마? 건망증인가? 그는 무심코 봉지를 집어 쓰레기통에 넣으려다 멈칫했다. 봉지 입구가 어딘가 묘하게 벌어져 있었다. 누가 일부러 열어둔 것처럼.
“내가 이렇게 건망증이 심했나.”
피곤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하며 쓰레기통에 과자 봉지를 던져 넣었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온 민준은 불현듯 서늘한 기운을 느꼈다. 에어컨은 꺼져 있었고 창문도 닫혀 있었다. 한여름의 끈적한 공기가 창문 밖에서 도시의 열기를 토해내고 있을 터인데, 이 안은 마치 늦가을 새벽처럼 싸늘했다. 소름이 돋았다. 괜히 기분 탓이겠지. 다시 의자에 앉아 시안을 훑어보는데, 랩톱 컴퓨터의 화면이 한순간 지직거렸다. 마치 오래된 브라운관 TV처럼 미세한 노이즈가 스쳐 지나갔다.
“이게 또 왜 이래.”
최신형 랩톱인데 벌써 고장인가. 민준은 손으로 톡톡 화면을 건드려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원래대로 돌아왔다. 별것도 아닌 일에 괜히 예민해진 것 같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간만에 밤 산책이라도 나갈까 고민했다. 창밖을 내다보자 저 아래 아득한 곳에 개미 같은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그때였다.
딸깍.
현관문 쪽에서 찰칵이는 소리가 들렸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 같기도 하고, 무언가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 같기도 했다. 민준의 등골이 오싹했다. 이 시간에 누가? 혹시 택배인가 싶었지만, 배달원이라면 벨을 눌렀을 것이다. 그는 천천히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복도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복도 등은 센서 방식이라 사람이 움직여야 불이 들어왔다. 발을 내딛는 순간, 딸깍! 다시 한 번 소리가 났다. 그리고 복도 끝, 현관문 잠금장치 위에서 무언가 반짝였다. 푸른색 LED 불빛이었다. 도어락의 잠금 상태를 나타내는 불빛이 순간 ‘잠김’에서 ‘열림’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잠김’으로 돌아왔다.
“뭐야?”
민준은 재빨리 현관으로 달려갔다. 손잡이를 잡아당겨봤지만, 굳건히 잠겨 있었다. 그는 문득 이상한 기시감에 사로잡혔다. 어제저녁, 분명히 문을 두 번 잠그고 자리에 들었다. 보조 잠금장치까지 완벽하게 걸어 잠갔었는데… 손잡이 위쪽으로 시선을 올렸다. 보조 잠금장치가 풀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작은 자석 홀더에 고정되어 있어야 할 메모지가 삐딱하게 기울어져 있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머릿속에 온갖 가설들이 스쳐 지나갔다. 외부 침입자? 하지만 문은 잠겨 있었고, 아무도 들어온 흔적이 없었다. 전자기기 오작동? 보안 시스템 오류?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경비실에 전화할까 망설였다. 하지만 섣불리 신고했다가 괜한 오해를 살까봐, 혹은 자신의 착각일까봐 잠시 주저했다.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다. 잠이나 자야겠다. 그는 불을 모두 끄고 침실로 향했다. 거실 창밖의 도시 야경은 여전히 번쩍였다.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이 올 리 없었다. 아까 그 딸깍 소리, 도어락의 푸른 불빛, 풀려 있던 보조 잠금장치. 모든 것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는 불안감에 뒤척이다 결국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늦잠을 잤다.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시기 위해 컵을 집어 들었다. 컵 안쪽에서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뭐지? 그는 컵을 뒤집어 싱크대에 털어냈다. 깨알 같은 크기의 작은 모래알갱이들이 쏟아져 나왔다. 모래? 어이가 없었다. 컵을 씻어두기 전에 이런 이물질이 들어갈 리가 없었다. 창문을 열어둔 적도 없었다. 그는 손으로 직접 모래를 만져봤다. 정말 모래였다. 이 빌딩 23층에, 현대식 아파트 주방에 모래라니.
그는 섬뜩한 기분을 억누르며 모래를 물로 씻어내렸다. 그때였다. 거실에서 갑자기 텔레비전이 켜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한 백색 소음이 울려 퍼졌다. 민준은 컵을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텔레비전 화면은 지지직거리는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희미하게 사람 형상 같은 것이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꺼지지 않았다. 전원 버튼을 꾹 눌렀지만, 텔레비전은 여전히 소음을 토해내며 이상한 화면을 보여줄 뿐이었다.
“꺼지라고!”
민준이 소리쳤다. 그 순간, 텔레비전 화면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삐이이-‘ 하는 날카로운 이명이 귀를 때렸다. 그리고 이내 화면 전체가 푸른색으로 번쩍였다. 푸른색 플래시가 번개처럼 터지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 같은 기묘한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던 스탠드 조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것처럼 공중에 살짝 떠올라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 그림자가 벽에 일렁이며 괴상한 형상을 만들어냈다.
민준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현실이 아니야. 꿈일 거야. 그는 눈을 세게 감았다가 떴다. 하지만 스탠드 조명은 여전히 공중에 떠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는 ‘지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푸른빛이 번쩍이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조명이 공중에서 휙 돌아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장난이라도 치듯 조명을 마구 흔들고 돌려대기 시작했다. 거실의 모든 물건들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삐걱거렸고, 천장의 작은 먼지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쿵!
공중에 떠 있던 스탠드 조명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전구가 박살나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민준은 경악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그의 눈은 믿을 수 없는 현상에 고정된 채 파르르 떨렸다. 이건, 이건 단순히 착각이나 건망증이 아니었다.
이건… 폴터가이스트였다.
그의 아파트, 2307호에서, 지금 이 순간, 무언가가 벌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방금 시작된 것처럼 보였다.
민준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