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잿빛 맹세
고철 더미로 변해버린 도시의 잔해 위로, 핏빛 석양이 번지고 있었다. 산산조각 난 빌딩의 뼈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은 쇳내와 함께 기억 속 먼지를 흩뿌렸다. 류진은 조종석 안에서 차가운 철골에 기댄 채, 심장이 아닌 분노로 기계의 혈관을 뛰게 했다. 그의 애기(愛機) ‘야차’는 잿빛 장갑 위로 붉은 빛이 일렁이는 거대한 철의 악마였다. 삐걱거리는 관절은 이빨을 가는 소리처럼 들렸고, 그 움직임 하나하나에 피에 굶주린 맹수가 살의를 담고 있었다.
“도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조종석의 공기를 진동시켰다. 콕핏 유리창 너머로 폐허가 된 도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이곳은 한때 우리의 꿈이 서려 있던 곳이었다. 함께 야차를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나날들. 우리가 세상을 바꾸리라 맹세했던 찬란한 약속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재로 변해버렸다. 너의 배신과 함께.
*끼이이잉…!*
야차의 어깨에 장착된 대구경 레일건이 기동하며 저음의 마찰음을 냈다. 센서망에 포착된 것은 도시 외곽을 수색하던 ‘성역’ 소속의 정찰 메카들이었다. 하얗고 매끄러운 외장을 자랑하는 그들의 기체는 과거 우리가 혐오하던 ‘체제’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이제 도윤, 너는 그들의 첨병이 되어 있었다.
“방해야.”
류진의 손가락이 가볍게 버튼을 눌렀다. 야차의 거대한 오른팔에서 육중한 에너지 블레이드가 솟아오르며 푸른빛을 발했다.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콕핏 안까지 느껴지는 듯했다. 과거의 류진이라면 망설였을 무자비한 기동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복수만을 위해 살아가는 망령에 불과했다.
*콰르릉!*
야차의 다리가 엄청난 추진력으로 지면을 박차고 솟아올랐다. 무거운 기체가 마치 거대한 맹금류처럼 허공을 가로질렀다. 정찰 메카들이 류진을 향해 일제히 빔 라이플을 난사했지만, 야차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한 짐승 같았다. 거대한 블레이드가 선두에 선 메카의 몸체를 수직으로 갈랐다. 경쾌한 파열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고, 메카는 그대로 두 동강 나 땅으로 추락했다.
“젠장, 저건 뭐지?! 아군… 아니, 적이다! 비인가 개조 기체!”
혼란에 빠진 통신이 들려왔지만, 류진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하나, 도윤이 있는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남은 두 대의 메카가 협공을 시도했다. 한 대가 측면에서 기관총을 퍼붓고, 다른 한 대가 후면에서 접근하며 미사일 포드를 개방했다.
*쉬이이잉! 콰앙!*
야차의 등에서 보조 추진기가 불을 뿜으며 기체는 마치 유령처럼 전방으로 돌진했다. 기관총탄이 야차의 잔상만을 허무하게 흩뿌리고 지나갔다. 류진은 재빠른 선회로 측면의 메카를 향해 레일건을 겨눴다.
*끼이이이잉… 콰아앙!*
압축된 전자기 에너지가 강철 탄환을 쏘아 올렸다. 탄환은 공기를 가르며 메카의 머리 부분을 정확히 관통했다. 폭발과 함께 산산조각 나는 파편들이 허공을 수놓았다.
“한 발… 더.”
류진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등 뒤에서 날아오는 미사일들을 센서가 정확히 포착했다. 그는 야차의 자세를 낮추고, 거대한 왼팔을 뒤로 젖혔다. 팔뚝에 숨겨져 있던 보조 개틀링 건이 튀어나왔다.
*타타타타탕!*
광적인 섬광과 함께 쏟아져 나오는 탄환들이 미사일들을 요격했다. 허공에서 연속적으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미사일 방어막 너머, 마지막 정찰 메카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야차의 육중한 몸체가 돌진했다. 류진은 에너지 블레이드를 역수로 쥔 채, 메카의 조종석 부분을 그대로 꿰뚫었다. 철근이 부서지고 유리창이 박살 나는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끝났다.”
야차는 블레이드를 뽑아내며 피범벅이 된 검처럼 피 냄새를 풍겼다. 류진의 콕핏 안은 붉은 경고등과 함께 과열된 시스템의 비명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가벼운 전율로 떨렸지만, 고통이 아니었다. 이건… 해방감이었다.
그리고 그때, 류진의 메인 센서에 거대한 신호가 포착되었다. 다른 메카들과는 확연히 다른, 우아하면서도 강력한 에너지 시그널. 마치 찬란한 별처럼 빛나는 기체.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은빛 날개를 펼친 듯한 유려한 실루엣의 메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 끝에서 섬광이 번쩍였고, 그 주변의 공기가 왜곡되는 듯했다. ‘비상’. 너의 새로운 이름, 도윤. 너의 모든 것을 담아 만든, 너만의 기체.
“흐흐… 하하하하…!”
류진은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비상, 그 이름이 그에게는 비상구가 아닌 절망의 나락으로 비상(飛上)한 너의 오만처럼 느껴졌다. 잊을 수 없는 날. 너와 내가 함께 야차의 마지막 조립을 끝내던 날. 너는 나의 등에 칼을 꽂았다. 내가 네게 내어준 심장에, 너는 냉정하게 총구를 겨눴다.
*‘진아, 미안하다. 이건… 내가 선택해야 할 길이야.’*
너의 그 한마디는 나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함께 꾸었던 꿈, 나누었던 희망, 그리고 맹목적인 믿음. 그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면서도, 너는 단 한 번의 망설임도 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를 밀쳐내고,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 너의 ‘새로운 길’을 개척했지.
“미안하다고? 웃기지 마… 한도윤.”
류진의 목소리에 증오가 서렸다. 야차의 주포가 비상을 향해 돌아갔다. 스코프 안에 잡힌 비상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마치 너의 배신이 그랬던 것처럼, 찬란하면서도 잔인했다.
*‘성역은 인류의 유일한 희망이다. 이곳에 반하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해.’*
너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래, 너는 그들의 ‘희망’이 되었고, 나는 그들의 ‘이단아’가 되었다. 그리고 너는, 그 이단아를 제거해야 할 책임까지 지고 있었다. 참으로 어울리는 역할 분담이었다.
*두둥… 두둥…*
야차의 심장이 격렬하게 울렸다. 아니, 류진의 심장이었다. 복수의 열망이 온몸의 피를 끓게 만들었다. 그는 조이스틱을 꽉 쥐었다. 너를 향한 칼날을 쥔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쥐었다.
“네가 나를 쓰러트려야만 희망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너의 영원한 절망이 되어줄게.”
야차의 엔진이 최고 출력으로 포효했다. 땅이 울리고, 잿빛 먼지가 하늘로 치솟았다. 류진은 이제 망설이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는 오직 단 하나의 목표만이 존재했다.
“한도윤, 그 찬란한 비상을… 나의 손으로 추락시켜주마.”
야차의 거대한 몸체가 재앙처럼, 복수처럼, 너를 향해 달려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