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황사 낀 하늘은 핏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붉었다. 준은 갈라진 입술을 혀로 축이며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 속을 걸었다. 낡은 방진 마스크는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였고, 텁텁한 흙먼지가 매 순간 목구멍을 긁어댔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늘 똑같았다. 무너진 빌딩, 뼈대만 남은 자동차,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이 뒤덮은 검은 콘크리트 바닥.
“젠장, 물….”
준의 중얼거림은 이내 바람에 흩어졌다. 어깨에 멘 낡은 배낭은 묵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건 텅 빈 물통과 거의 바닥을 드러낸 식량뿐이었다. 사흘째 마실 물 한 모금을 찾지 못했다. 목마름은 이제 고통을 넘어 환각처럼 아른거렸다.
그는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를 지나다 멈춰 섰다. 저 멀리,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거대한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한때는 쇼핑과 유흥의 중심지였을 ‘그린 마트’ 간판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폐허 속에서 저 정도 규모의 건물이 살아남은 건 드문 일이었다. 그리고… 희망의 빛이었다.
“혹시라도….”
희미한 기대감에 준은 발걸음을 옮겼다. 철골이 앙상하게 드러난 건물 파편들을 피해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주변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마저 삼켜버린 듯한 적막감. 그 침묵은 늘 그랬듯, 다음 순간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은 예고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입구는 이미 산산조각 나 있었다. 깨진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준은 낡은 전술 나이프를 꺼내들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내부는 지옥 그 자체였다. 진열대는 쓰러지고 상품들은 내용물이 튀어나온 채 짓밟혀 있었다. 몇 십 년 전의 흔적들이 먼지 속에 박제되어 있었다. 준은 바닥에 흩어진 캔들을 훑었다. 대부분 찢어지거나 부패해 있었다. 기대는 빠르게 실망으로 변해갔다.
‘그래도, 이 정도 규모라면….’
그는 구석에 처박힌 낡은 카트를 발견하고 그 안에 놓인 부서진 박스를 뒤적였다.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빈 채로 먼지만 쌓여있었다. 그때, 그의 시선이 바닥에 멈췄다.
먼지 쌓인 바닥에 선명하게 찍힌 발자국. 인간의 것은 아니었다. 길고 날카로운 발톱 자국 세 개가 확연했고, 그 사이에 마치 끈적한 액체를 끌고 간 듯한 흔적이 이어져 있었다. 최근에 생긴 것이 분명했다. 먼지가 그 위에 아주 얇게 앉았을 뿐이었다.
준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소리 없는 비명을 삼켰다. 이 건물은 비어있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나이프를 고쳐 쥐고 주변을 살폈다.
복도 저편, 어둠 속에 잠겨있는 식료품 코너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스슥… 스슥…* 마치 무언가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였다. 준은 벽에 바싹 붙어 몸을 숨겼다. 등골을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저건, ‘추적자’였다. 황폐화된 세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존재 중 하나. 뛰어난 청각과 후각,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 패턴으로 악명 높은 돌연변이 생명체. 놈들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며, 먹이를 감지하면 그림자처럼 달라붙어 숨통을 끊었다.
준은 숨을 죽였다. *스슥… 스슥…*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규칙하게 반짝이는 희미한 녹색 빛. 그건 추적자의 눈이었다. 녀석은 어둠 속에서도 완벽하게 볼 수 있었다.
피해야 했다. 지금 이대로라면 준은 놈의 훌륭한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는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추적자는 준이 숨어있는 진열대 코앞까지 다가왔다. 녀석의 짐승 같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썩은 살과 쇠 냄새가 진동했다.
녹색 눈이 진열대 틈새로 준을 향해 잠시 멈췄다. 준은 놈과 눈이 마주친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절대 움직이지 마. 숨도 쉬지 마.
추적자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스슥… 스슥…* 소리를 내며 지나쳐갔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가는 희미한 녹색 눈. 준은 그대로 숨을 참고 있었다. 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는 천천히 벽에 기댔다. 몸의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대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물통이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그는 마지막 남은 체력을 쥐어짜냈다. 이대로 나가면, 다음 생존지는 보장할 수 없었다. 지금 여기서 뭔가 찾아야만 했다.
준은 벽을 따라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추적자가 지나간 반대편 구역, 창고로 향하는 듯한 표시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이라면, 아직 뒤지지 않은 물품이 있을지도 모른다.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기 위해 이 미친 짓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창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준은 낡은 쇠지렛대로 억지로 문을 열었다.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적막을 깨트렸다. 안에서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공포에 그는 나이프를 바짝 세웠다. 다행히 안은 고요했다.
창고는 비교적 깨끗했다. 먼지 쌓인 선반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에 낡은 박스들이 쌓여 있었다. 준은 심장이 격렬하게 뛰는 것을 느끼며 박스들을 뒤졌다. 폐허가 된 세상에서 가장 흔한 건 실망이었다. 그는 또다시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그의 손에 묵직한 무언가가 잡혔다. 유리병에 담긴 정수 필터. 그것도 새것이었다! 단단히 밀봉된 채 상자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그것들을 품에 안았다. 마치 금덩이라도 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이제 이 필터만 있으면…!
그 순간이었다.
*쿵!*
창고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준은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아까 그 추적자보다 훨씬 거대한 그림자가 서 있었다. 녹색 눈은 두 개가 아니라 네 개였다. 온몸이 강철처럼 단단한 갑피로 뒤덮여 있고, 턱에서는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었다. 등에서는 거대한 갈퀴 같은 팔이 솟아 있었다.
놈은 단순한 추적자가 아니었다. ‘탐식자’. 추적자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이자, 압도적인 힘과 지능을 가진 변종. 놈은 준이 쥐고 있는 필터를 정확히 꿰뚫어본 듯, 네 개의 눈을 번뜩이며 천천히 다가왔다.
준은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솟구쳤다. 이 필터를 포기하고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탐식자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는 창고 전체를 진동시켰다. 준은 결심했다. 여기서 죽더라도, 빈손으로 죽을 수는 없었다. 그는 배낭을 고쳐 메고, 필터 두 개를 품에 안은 채, 전술 나이프를 단단히 움켜쥐었다.
“젠장….”
그는 이를 악물었다. 탐식자는 이미 눈앞에 와 있었다. 거대한 갈퀴 같은 팔이 준을 향해 뻗어오는 순간, 준은 이를 악물고 몸을 던졌다. 살아야 했다. 이 필터를 가지고, 반드시 살아남아야 했다.
*콰아앙!*
창고 안에서 거대한 폭발음이 울렸다. 준이 미리 설치해 두었던, 낡은 가스통을 이용한 급조 폭탄이 터진 것이었다. 불길이 치솟고, 탐식자의 비명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준은 폭발의 충격파에 몸을 날려 창고 바깥으로 굴렀다. 깨진 유리 파편과 쇳조각들이 비 오듯 쏟아졌다.
준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오른팔이 욱신거렸다. 팔목에는 깊은 상처가 나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필터를 놓지 않았다. 탐식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폭발에 휘말려 잠시 정신을 잃었거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그는 피를 뚝뚝 흘리며 절뚝거렸다. 겨우 건물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자, 창고 쪽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그는 필터를 품에 꼭 안고 다시 폐허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살았다. 간신히.
하지만 그가 살아남은 대가로, 그를 놓친 탐식자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그것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 놈은 이제 준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마치 이 세상 모든 그림자들을 불러모을 듯한, 깊고 거대한 울음소리가 폐허 저편에서 메아리쳤다. 그 울음은 마치 준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듯했다.
황금빛 정수 필터를 품에 안은 채, 준은 피 묻은 손으로 낡은 나이프를 고쳐 쥐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마치 피가 흐르는 강처럼 아득하게 펼쳐졌다. 또다시 밤이 오고 있었다. 지옥 같은 밤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