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전생 (Isekai)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회색빛 노을이 은빛골 마을을 덮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오솔길을 따라 지쳐 쓰러질 듯 걸어가는 사람들, 텅 빈 눈동자와 갈라진 손등이 이 땅의 서글픈 풍경이었다. 지환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전생의 기억이 아니라도, 이 불합리한 세계는 언제나 가슴을 옥죄는 먹구름 같았다. 드넓은 크로노스 제국의 영토 중에서도 은빛골은 가장 잊혀진 구석 중 하나였다. 아니, 잊혀진 게 아니라 철저히 착취당하는 곳이었다.

“지환아, 오늘 밤엔… 뭘 먹어야 할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힘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지환은 등에 짊어진 마른 나무 조각들을 고쳐 메며 뒤를 돌아봤다. 깡마른 어깨와 푹 꺼진 눈. 제국의 세금은 매년 늘어만 갔고, 겨울이 올 때마다 마을 사람들은 아사 직전까지 내몰렸다. 봄이 와도 다를 바 없었다. 어제는 수확한 곡식의 절반을 걷어갔고, 그제는 가축의 숫자를 세어보더니 ‘낭비’라며 염소 새끼 몇 마리를 끌고 갔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제가 어떻게든 구해올게요.”

어떻게든. 그 ‘어떻게든’이라는 말이 언제부터 이렇게 공허하게 들렸던가. 전생에 그는, 원하는 것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세상에 살았다. 배고픔이라니, 그건 소설 속에서나 보던 단어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현실이었다. 살을 깎는 고통. 그 고통이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동시에, 철저히 절망하게 만들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어둠 속에서도 번뜩이는 불빛이 보였다. 제국 병사들의 순찰대였다. 열 명 남짓한 숫자가 마을 입구를 막고 서서, 횃불을 높이 들고 있었다. 그들의 제복에 새겨진 크로노스 제국의 황금 독수리 문양은 언제나처럼 오만하게 번쩍였다. 병사들의 거친 웃음소리가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저게 뭐야… 또 무슨 일이야?” 어머니가 불안한 듯 속삭였다.

“모르겠어요.” 지환은 입술을 깨물었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병사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우르르 끌려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피곤함과 함께 노골적인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어린아이를 품에 안은 여인, 허리가 굽은 노인, 모두가 병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맨 앞에 선 병사는 얼굴에 상처 자국이 길게 나 있는 사내였다. 그의 비릿한 웃음은 언제나 마을 사람들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었다. 제국의 징세관, ‘아리스’였다.

“멍청한 촌놈들아! 귀 기울여라!” 아리스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제국의 지엄한 명령이다! 흉년이 들었다고 징세가 줄어들 줄 알았더냐? 꿈 깨라! 오히려 늘었다! 오늘 밤까지, 가구당 은화 50닢! 내일까지는 두 배로 걷을 것이니라!”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과 분노가 터져 나왔다. 은화 50닢이라니! 그건 일 년 내내 뼈 빠지게 일해도 모으기 힘든 금액이었다. 게다가 오늘 밤까지? 이 미친 명령은 곧 ‘모두 굶어 죽어라’와 다름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우리에게는 은화가 없어!” 늙은 농부가 용기를 내어 외쳤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로 갈라져 있었다.

아리스는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로 늙은 농부의 머리를 후려쳤다.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노인이 바닥에 고꾸라졌다.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말대꾸? 감히 제국의 법령에 반박하는 것이냐, 늙은 쥐새끼 같으니라고!” 아리스는 쓰러진 노인을 발로 짓밟으며 계속해서 비웃었다. “은화가 없으면… 뭘로든 내놔라! 밭떼기를 내놓든, 네 딸을 내놓든! 아니면 저 쓸모없는 잡곡이라도 내놓든가!”

병사들은 노인의 집으로 몰려가 억지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안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그건 노인의 딸이 병사들에게 끌려가는 소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분노와 공포로 눈을 빛냈지만,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병사들의 무장한 모습과 압도적인 숫자에 그저 숨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지환의 주먹은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쥐어져 있었다. 전생에 그는 이런 불합리한 폭력에 분노할 일조차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 가혹한 세계에서, 그는 더 이상 방관자가 아니었다.

아리스의 시선이 지환을 향했다. “너, 거기 젊은 녀석! 뭘 꼬라봐! 내일까지 은화 50닢을 못 내면, 네 어머니와 여동생을 끌고 가겠다!”

지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심장이 얼음물에 담긴 듯 차갑게 식었다. 어머니와 여동생. 이 세계에서 그의 전부였다. 그리고 저들의 손에 넘겨지는 순간, 그들의 삶은 지옥으로 변할 터였다.

그 순간, 지환의 머릿속에서 전생의 기억이 번개처럼 스쳤다. 수많은 책들과 정보, 그리고 불합리한 시스템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이야기. 그는 이 세계의 지식은 부족했지만, ‘저항’이라는 개념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저… 징세관님.” 지환은 앞으로 한 발짝 나섰다.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차분했다. “저희는 은화 50닢은커녕, 오늘 당장 먹을 곡식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희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습니다.”

아리스는 비웃었다. “희망? 이 굶어 죽어가는 시궁창 같은 곳에 무슨 희망이 있다는 게냐?”

“네.” 지환은 똑바로 아리스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에 흔들림이 없었다. “저희 마을 옆에, 아직 개발되지 않은 황무지가 있습니다. 그곳에 귀한 약초가 자란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만약 저희에게 이틀만 시간을 주신다면, 그 약초를 캐서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제국에 바칠 수 있는 진귀한 약초가 있다면, 은화 50닢보다 훨씬 가치 있을 겁니다.”

병사들 사이에서 술렁거림이 일었다. 진귀한 약초? 그들은 은화보다도 더 가치 있는 전리품에 혹하는 듯했다. 아리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탐욕스러웠지만, 동시에 멍청하지는 않았다. 약초 따위가 정말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른다는 희미한 가능성에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환의 당돌한 태도가 그의 흥미를 끌었다.

“허튼수작을 부리는 게 아니겠지?” 아리스가 경계심을 드러냈다. “만약 네놈이 거짓말을 한다면, 네놈의 혀를 뽑아버릴 것이다!”

“맹세코 거짓이 아닙니다.” 지환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희는 오직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것뿐입니다. 저희에게 이틀만 주십시오. 이틀 후에 저희는 약초를 가져오거나… 아니면 이 마을 사람들이 모두 죽은 시체가 될 것입니다.”

지환의 말에 노인부터 아이까지, 모든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절박한 그의 눈빛은 간절했다. 아리스는 잠시 망설였다. 당장 은화를 걷어가는 것이야 쉽지만, 귀한 약초라는 말은 그의 탐욕을 자극했다. 그리고 이틀 정도 시간을 준다고 해서 크게 손해 볼 것도 없었다. 어차피 이 마을 사람들은 어디로 도망가지 못할 터였다.

“좋다! 이틀이다! 정확히 이틀 후, 해가 뜨기 전에 약초를 가져와라! 만약 약초가 없거나, 너희가 쥐새끼처럼 도망치려 한다면… 그때는 너희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릴 것이다!”

아리스는 마지막 경고를 던지고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섰다. 그들이 마을을 떠나자, 무겁게 짓눌렸던 침묵이 터져 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지환을 둘러쌌다. 혼란과 의문이 가득한 얼굴들이었다.

“지환아, 그게 정말이냐? 약초라니? 언제 그런 황무지가 있었어?”

“말도 안 돼… 거짓말이었잖아?”

지환은 차분히 그들을 둘러봤다. “거짓말이 맞아요.” 그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하지만 우리가 저들에게 저항할 시간을 벌기 위해선 필요한 거짓말이었어요. 저 황무지에는 약초 따위는 없어요. 하지만… 무언가 다른 것은 있을 겁니다.”

마을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절망 속에서 그들은 희미한 한 줄기 빛을 찾고 있었다. 지환은 그 빛을 잡고 싶었다. 전생의 기억이 그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었다. 이 불합리한 제국에 맞서, 그는 이 작은 마을을 지키고 싶었다.

“여러분, 우리는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됩니다. 우리 모두가 굶어 죽거나, 노예가 되거나, 가족을 빼앗기게 될 겁니다. 이젠, 우리가 나서야 합니다. 더 이상 빼앗길 것도 없는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오직 저항뿐입니다.”

지환의 말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 결의가 스치기 시작했다.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그 두려움 속에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희망이자 분노였다. 내일, 지환은 황무지로 갈 것이다. 그곳에는 약초 대신, 이 은빛골 마을을 지켜낼 무언가를 찾아야만 했다. 크로노스 제국에 맞서는 아주 작고 미약한, 그러나 꺾이지 않는 첫걸음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불이 타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