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그림자 아래의 속삭임**
지하철 소음이 희미하게 저 멀리서 울리는 열 시, 지혜는 긴 하루를 마무리하고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20층 높이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야경은 언제나 익숙했지만, 오늘은 왠지 모르게 한기가 돌았다. 창밖의 불빛들은 차갑게 반짝였고, 그녀의 아파트는 그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느껴졌다.
맥주 캔을 따는 ‘치익’ 소리가 고요한 공간을 갈랐다. 휴대폰으로 대충 찾아낸 미스터리 드라마를 틀었지만,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니, 집중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언가 신경을 긁는 미세한 소리가 있었다.
“뭐지?”
지혜는 볼륨을 줄였다. 아주 작게, 거실 한구석에서 ‘또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작은 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소파에서 일어섰다. 맨발이 바닥의 차가운 감촉을 그대로 전했다.
소리가 났던 곳은 거실장 위였다. 어제 퇴근길에 무심코 집어든 조약돌 장식품이 있었다. 분명히 그 조약돌은 거실장 중앙에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끝부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었다.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내가 밀었나?”
건망증이라기엔 너무 선명한 기억이었다. 지혜는 조약돌을 다시 중앙으로 옮겨놓았다. 그때였다. ‘스윽’ 하고 거실 창문 블라인드가 아주 미세하게, 손가락 한 마디 정도 열리는 것이 보였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람이 들어올 틈조차 없었다.
등골에 낯선 오한이 스쳤다. 지혜는 애써 합리적인 설명을 찾으려 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미세한 기류 변화? 아니, 20층 아파트에서 그럴 리가 없었다. 그녀는 블라인드를 다시 닫고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 아무것도.
“피곤해서 그래.”
그녀는 중얼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차라도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전기포트에 물을 붓고 스위치를 눌렀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포트 안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닫혀 있던 냉장고 문이 ‘삐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스르르 열리는 것이 보였다. 그 속에는 어제 사다 놓은 과일과 반찬들이 잠들어 있었다. 지혜는 굳은 표정으로 냉장고 문을 응시했다. 심장이 발버둥 치듯 쿵쾅거렸다. 분명히 잠그지 않았지만, 저절로 열릴 정도로 헐거운 문은 아니었다.
“이게… 뭐야.”
지혜는 떨리는 손으로 냉장고 문을 다시 닫았다. ‘쾅’ 소리가 나도록 닫고는 숨을 헐떡였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피곤해서? 착각? 아니, 이건 착각일 수가 없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거실로 돌아왔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거실 소파 위, 그녀가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자리 위에 놓여있던 쿠션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그곳에 앉았다가 일어난 것처럼.
“누구… 없어요?”
지혜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정적만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친구, 수민이었다.
“여보세요? 수민아.”
“어? 지혜야,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무슨 일 있어?”
수민의 목소리는 잠에 취해 있었다.
“아니, 그… 뭔가 좀 이상해서. 아파트에 나 혼자 있는데… 자꾸 이상한 소리가 나고, 물건들이 움직이는 것 같고…”
“뭐? 지혜 너 또 피곤해서 헛것 보는 거 아니야? 아니면 불면증 도졌어? 빨리 자.”
“아니, 진짜라니까! 냉장고 문도 저절로 열리고, 쿠션도 바닥에 떨어져 있고…”
“야, 냉장고 문은 네가 대충 닫았겠지! 쿠션은 네가 일어날 때 밀었겠지! 야근 많이 해서 잠이 부족한 거야. 아무 걱정 말고 푹 자, 알았지? 내일 출근해야 되잖아.”
수민은 하품 섞인 목소리로 대충 넘겨짚으며 전화를 끊었다. ‘뚝’ 하는 전화 끊김음이 귀를 때렸다.
지혜는 완전히 고립된 기분이었다. 친구조차 믿어주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실로 향했다. 불을 켜면 좀 나을까 싶어서였다.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는 순간, ‘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침실의 형광등이 저절로 켜졌다. 그리고는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오래된 영화의 한 장면처럼 불안정하게 빛을 뿜어냈다.
“으악!”
지혜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침실 안쪽, 어두운 구석에 희미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분명히 아무것도 없어야 할 공간이었다. 검고 희미한 형체는 그녀를 향해 서서히, 아주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았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지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몸을 돌려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달칵’ 하고 잠금장치를 풀고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굳게 잠겨 있었다. 분명히 잠금장치를 풀었는데!
다시 손잡이를 돌리고 힘껏 당겨 보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안쪽에서 무언가가 굳게 막고 있는 것처럼. 등 뒤에서 차가운 기운이 확 느껴졌다. 침실에서부터 따라온 그림자가 현관문 바로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덜컹!’
현관문이 안쪽으로 세게 울렸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 것이 아니었다. 안쪽에서, 그녀가 서 있는 바로 앞의 문이, 스스로 진동했다. 마치 누군가 문 안쪽에 숨어 그녀를 위협하는 것처럼.
지혜는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것을 느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앞이 흐릿해졌다. 현관문 옆,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리고 그 거울의 가장자리, 그림자가 드리워진 부분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두 개의 점을 보았다. 마치 깊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꽃처럼. 그것은… 눈이었다.
그 눈이, 거울 속 그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끼이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이 그녀를 향해 손짓하는 것 같았다.
지혜는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한 공간이 아니었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