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장. 균열
퇴근길의 지하철은 언제나 전쟁터였다. 꾹꾹 눌러 담긴 인파 속에서 현우는 간신히 중심을 잡고 서 있었다. 그의 하루는 늘 비슷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고, 혼자 밥을 먹고, 뉴스를 보거나 웹서핑을 좀 하다가 잠이 드는 것. 어쩌면 전생에 지독한 반복의 굴레에 갇힌 죄를 지었나 싶을 정도로 지루하고 건조한 일상이었다. 서른 문턱을 넘은 지 오래건만, 이렇다 할 성취도, 사랑하는 사람도, 심지어 취미생활조차 변변찮은 자신을 돌아보면 때때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겨우 집 근처 역에 도착해 지하철 문을 비집고 나왔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 속으로 스며들자 그나마 텁텁했던 머리가 조금은 개운해지는 듯했다. 빌딩 숲 사이로 반짝이는 아파트 단지의 불빛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대변하는 듯했다. 현우의 집은 그 수많은 불빛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적어도 그에게는 유일한 안식처였다.
집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었다. 짙은 어둠이 그를 맞이했다. 자동으로 켜지는 센서등 덕분에 더듬거릴 필요는 없었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불을 켜자 익숙한 그의 공간이 나타났다. 무심하게 소파에 가방을 던져놓고 곧장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고 시원한 물 한 잔을 따랐다. 컵을 식탁 위에 올려놓고 거실로 돌아와 리모컨을 찾았다.
“어라?”
어제 저녁, 분명히 소파 팔걸이에 올려두었던 것 같은데. 왜 리모컨이 식탁 위에, 그것도 현우가 컵을 놓았던 바로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을까.
‘내가 식탁에 뒀었나? 하도 피곤해서 정신이 없었나 보네.’
현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 정도의 착각쯤은 현대인의 고질병 아닌가. 어깨를 으쓱하며 TV를 켰다. 뉴스 채널에서는 오늘도 어김없이 복잡한 세상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현우는 무미건조하게 저녁 식사를 준비하며 뉴스를 흘려들었다.
밤늦도록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몽롱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기어 나와 욕실로 향했다. 세수를 하고 이를 닦는데, 칫솔이… 칫솔꽂이에 거꾸로 꽂혀 있었다. 칫솔모가 아래를 향한 채.
‘내가 어제 술이라도 마셨나? 아니, 멀쩡했는데.’
고개를 갸웃거리며 칫솔을 바로 꽂았다. 어제의 리모컨 일과 합쳐져 미묘한 불쾌감이 스쳤지만, 여전히 피로 탓이려니 하고 넘겼다. 아마도 무의식 중에 그랬을 거라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문제는 그다음 날 터졌다. 퇴근하고 돌아와 현우는 열쇠를 현관 옆 열쇠고리에 걸었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제대로 걸린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손을 씻고 저녁을 먹은 후, 잠시 편의점에 갈 일이 생겼다. 현관으로 가서 열쇠를 집으려는데… 비어 있었다. 분명히 걸었는데.
현우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헛것을 본 것도 아니고, 착각할 리가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신발장 위를 봤다. 거기에 현우의 열쇠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현관에서 신발장까지는 한 걸음 남짓한 거리였다.
“내가… 여기다 뒀다고? 절대 아니야.”
나지막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함께 짙은 의문이 서려 있었다. 며칠 전부터 느껴지던 묘한 불쾌감이 이제는 명확한 형태로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그는 열쇠를 집어 들었지만, 편의점에 갈 기분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그날 이후, 집 안에서는 기묘한 일들이 끊이지 않았다.
책상 위에 놓아두었던 볼펜이 다음 날 서랍 안에서 발견되는가 하면, 깨끗하게 개어 옷장 속에 넣어둔 양말이 소파 아래에서 굴러 나오기도 했다. 현우는 처음에는 꼼꼼하게 의심하고 합리적인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도둑인가? 아니, 물건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제자리에서 옮겨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사소하고, 딱히 가치 없는 물건들이. 건망증인가? 아무리 피곤하다 한들 이렇게 빈번하고 패턴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착각으로 치부하기는 어려웠다.
점차 불길한 기운이 아파트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한밤중에 잠결에 거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잠이 확 달아났다. 강도라도 들었나 싶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갔다. 불을 켰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현관문도 잘 잠겨 있었다. ‘환청인가?’ 다시 침대에 누웠지만, 심장이 벌렁거렸다.
며칠 뒤에는 자고 있는데 주방에서 그릇이 쨍그랑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현우는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달려갔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멀쩡한 그릇들이 제자리에 놓여 있었다.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는 미친 사람처럼 집 안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숨겨진 카메라라도 있나? 누군가 자신을 골탕 먹이려 드나? 하지만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젠장, 도대체 뭐야!”
현우는 소리쳤다. 허공에 메아리치는 자신의 목소리만이 그에게 돌아왔다. 이 아파트가 자신을 가지고 노는 것 같았다. 그의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고, 잠들기 전에는 온 집안을 두세 번씩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날은 유난히 피곤했다. 신경을 쓴 탓에 잠자리에 들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괜히 으스스한 기운이 방을 감싸는 것 같았다. 그는 뒤척이다가 결국 눈을 떴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그의 시선은 침대 옆 협탁에 고정되었다. 그곳에는 얼마 전 친구에게 선물 받은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었다. 특별할 것 없는, 그저 물을 마실 때 쓰는 평범한 컵이었다.
그때였다.
정확히 그의 눈앞에서, 협탁에 놓여 있던 유리컵이 공중으로 스르륵 떠올랐다. 마치 투명한 손이 컵을 붙잡고 들어 올리는 것처럼, 천천히, 그리고 흔들림 없이 수 센티미터 가량 솟아올랐다. 현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심장이 멎을 것 같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꿈이 아니었다. 그는 분명히 깨어 있었다.
떠오른 컵은 잠시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리고 이내, 마치 누군가 잡고 있던 것을 놓은 것처럼, 일직선으로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쨍그랑!”
소름 끼치는 파열음과 함께 유리컵은 산산조각 났다. 조각난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현우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등골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침대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지만, 동시에 하나의 섬뜩한 확신이 그를 지배했다.
이것은 착각도, 환청도, 꿈도 아니었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이 아파트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무언가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바닥에 흩뿌려진 유리 파편들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냉기가 감돌았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마치 누군가 바로 옆에서 숨 쉬는 듯한 섬뜩한 기척이 느껴졌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리고 귓가에, 아무도 없는 방에서, 아주 작고 건조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찾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