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3호의 밤손님
지훈은 찌뿌드드한 몸을 일으켰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제 늦게까지 작업을 한 탓에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이 간절했다. 늘 쓰는 머그컵은 분명 어제 설거지통 옆 건조대에 뒤집어 놓았을 터였다. 그런데.
“응?”
건조대는 텅 비어 있었다. 지훈은 고개를 갸웃하며 싱크대 주변을 훑었다. 어디 갔지? 기억을 더듬었다. 늦게까지 작업한 건 맞지만, 설거지는 꼼꼼히 하고 잤다. 혹시 건조하다가 떨어져서 깨졌나 싶어 발치도 살폈지만, 깨진 조각은 없었다. 대신 식탁 한가운데, 어제 저녁 먹다 남긴 영수증 위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머그컵이 눈에 들어왔다. 물기는 말끔히 말라 있었다.
‘내가 식탁에 뒀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리 없었다. 지훈은 잠시 멍하니 머그컵을 응시했다. 꿈결에라도 옮겼나? 며칠 밤샘 작업으로 피곤이 극에 달해 몽유병이라도 생겼나 싶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보다. 그는 찝찝함을 애써 지우며 머그컵을 들고 커피를 내렸다. 아침 햇살이 창밖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그 기묘한 ‘사건’만 빼면.
* * *
밤이 되자 아파트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졌다. 낮 동안 들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나 이웃집 TV 소음도 잦아들고, 고요함이 내려앉았다. 지훈은 거실 소파에 몸을 파묻고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집중해서 화면을 응시하는데, 문득 거실 천장의 조명이 깜빡였다. 딱 한 번,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장난으로 건드린 것처럼.
“뭐야, 고장 났나.”
중얼거렸지만, 조명은 다시 안정적으로 빛을 내고 있었다. 지훈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영화에 집중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옆에서 시선이 느껴지는 듯했다.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시야의 가장자리에서 무언가 휙 하고 사라지는 그림자를 본 것 같았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아니야, 착각이야. 피곤해서 그래.’
자신을 다독였지만, 등골을 타고 오르는 서늘한 기운은 어쩔 수 없었다. 으스스한 느낌에 영화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태블릿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엌으로 가서 물이라도 한 잔 마셔야겠다고 생각했다.
복도를 지날 때였다. 분명 거실과 부엌은 보일러를 약하게 틀어두어 훈훈한 온기였다. 그런데 복도의 딱 한 지점에서 갑자기 냉기가 확 끼쳐왔다. 마치 한겨울의 냉장고 문이 열린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그의 살갗을 파고들었다. 소름이 돋아 팔뚝을 문질렀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텅 비어 있는 안방에서, 아주 희미하고 불분명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지훈아…….’
환청인가? 귀를 의심했다. 잠시 숨을 죽이고 안방 문을 노려봤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서 오히려 더욱 신경이 곤두섰다. 그는 차가운 공기를 뚫고 안방 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문고리에 손을 대는 순간, 마치 닿으면 안 되는 것을 만지는 것처럼 싸늘하고 불쾌한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느낌이었다. 그는 급히 손을 떼고 뒷걸음질 쳤다.
‘바람 소리겠지. 이웃집 소음이겠지. 착각이야.’
온갖 합리적인 설명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머릿속은 이미 공포로 얼룩지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는 재빨리 부엌으로 가서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줄기가 목을 타고 넘어갔지만, 등줄기의 냉기는 가시지 않았다.
* * *
다시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소파에 앉지 못했다. 등 뒤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강렬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는 마치 투명한 존재가 거실 한구석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망상에 시달렸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레 책장으로 향했다. 어제저녁에 분명 가지런히 꽂아두었던 그의 가장 아끼는 고서적 한 권이, 어깨 정도 높이에서 스르륵, 하고 앞으로 몇 센티미터 튀어나와 있었다.
지훈은 넋을 잃고 그것을 바라봤다. 심장이 쿵, 쿵, 쿵, 하고 불규칙하게 울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손을 뻗어 책을 다시 제자리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얼른 시선을 돌려 옆에 있던 책상 위를 봤다. 어제 깨끗하게 정리해 두었던 펜꽂이에서 볼펜 한 자루가 스르륵, 하고 미끄러져 내려오더니 ‘딸깍’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건…… 아니야.’
지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건 더 이상 피곤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거실을 벗어나 안방으로 향했다. 그의 유일한 안전지대라고 생각하는 곳이었다. 안방 문을 열었다. 텅 비어 있는 방 안은 여전히 차가운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서둘러 침실 문을 잠갔다. 딸깍. 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이제 괜찮을 거야. 잠시 안심하려던 찰나, 문고리가 스르륵 돌아가더니 잠겼던 문이 다시 활짝 열렸다.
“악!”
지훈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그는 간신히 이성을 붙잡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이번에는 두 손으로 문고리를 꽉 잡고 힘주어 돌려 잠갔다. 다시 딸깍. 그리고 쾅! 하는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았다. 숨을 헐떡이며 복도를 벗어나 거실로 도망쳤다.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그때였다. 안방에서 ‘쿵!’ 하는 둔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 커다란 것이 바닥으로 떨어진 듯한 소리였다. 뒤이어 ‘드르륵…… 드르륵……’ 하는, 무거운 것을 끄는 듯한 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지훈의 눈은 휘둥그레졌다. 숨 쉬는 법조차 잊은 듯했다. 아파트 전체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 * *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더욱 격렬해졌다. 무언가가 거칠게 내던져지는 소리, 벽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 그리고 정체 모를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듯한 저음이 그의 귓가를 때렸다. 지훈은 움직일 수 없었다. 공포가 온몸을 마비시켰다.
갑자기 거실의 모든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파바바박! 섬광처럼 터지던 불빛들이 순간, 일제히 ‘탁!’ 소리를 내며 꺼졌다. 아파트는 순식간에 암흑에 잠겼다. 창밖에서 스며드는 도시의 희미한 불빛만이 거실을 어둡게 밝힐 뿐이었다.
그 어둠 속에서, 지훈의 맞은편에 놓여 있던 식탁 의자 하나가 ‘끄으윽’ 하고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지훈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차가운, 얼음보다 더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갔다. 마치 투명한 손가락이 그의 피부를 쓰다듬는 듯한 섬뜩한 감촉에 그는 ‘흐읍!’ 하고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섰다.
이어, 그의 귀 바로 옆에서 낮고, 굵고, 끔찍한 짐승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나 가까워서, 지훈은 그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크르르르르…….”
그리고 그 소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지훈이 분명히 잠가두었던 현관문이, ‘삐이이익’ 하는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안쪽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짙은 어둠이 깔린 현관문 너머로, 차갑고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감이, 스르륵,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