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 스릴러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회색 하늘이 어둠을 집어삼키기까지는 아직 몇 시간 남았지만, 이미 지표는 붉은 황혼에 잠식당하고 있었다. 지평선은 온통 잔해와 먼지로 뒤덮여 희미했다. 유진은 길게 늘어진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낡은 작업복 위로 주워 입은 오염된 방진 코트가 펄럭였다. 찢어진 모자 사이로 드러난 마른 얼굴은 생기 없이 푸석했지만, 눈동자만큼은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하아… 하아…”

메마른 목구멍에서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며칠째 제대로 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다. 아침에 운 좋게 발견한 녹슨 통조림은 내용물이 이미 부패한 지 오래였다. 이런 날이 허다했다. 기대는 좌절을 낳았고, 좌절은 무의식적인 희망을 끊임없이 좀먹었다.

발밑에 채이는 부서진 유리 조각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오래전 번화했던 도시의 흔적이라기에는 너무나 참혹한 풍경이었다. 무너진 빌딩의 뼈대 사이로 휘파람처럼 바람이 불었다. 그 소리는 때로는 멀리서 들려오는 절규처럼, 때로는 숨어있는 짐승의 으르렁거림처럼 들려 유진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낡은 지도 조각을 꺼냈다. 종이는 습기와 세월에 닳아 모서리가 찢어지고 글자들이 희미해져 있었다. 손가락으로 가늘게 표시된 지역을 짚었다. ‘정수 처리 시설.’ 지도에 적힌 글자는 흐릿했지만, 그 의미만은 유진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약 3km. 걸어서 반나절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시설이 정말로 작동하는지, 아니면 이 넓은 폐허의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저 앙상한 유물로 남아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 만약에 거기라도 없다면…”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은 이내 바람에 흩어져 버렸다. 불안감이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더 이상은 물 없이 버틸 수 없었다. 지금껏 버텨온 모든 순간이 기적이라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뇌었지만, 기적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는 것을 유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시선은 끊임없이 주변을 훑었다. 이곳은 폐허만큼이나 위험한 것들이 도사리는 곳이었다. 굶주린 짐승들, 그리고… 짐승보다 더 끔찍한 인간들.

부서진 건물 한 채의 입구를 조심스럽게 지나쳤다. 안쪽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지만, 빛이 희미하게 스며드는 틈새로 낡은 옷가지와 알 수 없는 핏자국이 보였다. 유진은 숨을 멈췄다. 그녀의 오른손은 허리춤에 찬 녹슨 칼자루를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 칼은 무디고 낡았지만,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곳에서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스스슥, 하는 마찰음. 유진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어둠 저편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했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그곳에 있었다.

차가운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지금 도망칠까? 아니, 너무 늦었다. 이미 상대는 그녀의 존재를 알았을 터였다. 유진은 천천히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칼을 뽑아 들었고,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인간의 소리라기보다는 위협하는 짐승의 울음소리에 가까웠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더니, 이내 한 형체가 나타났다. 키가 크고 왜소한, 기형적인 형체. 유진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온몸을 넝마 같은 천으로 감싸고 있었고, 얼굴은 해진 두건 속에 가려져 있었다. 손에 든 것은 날카롭게 다듬어진 뼈 조각이었다.

“누… 누구야…?”

유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상대는 아무 대답 없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는 순간, 두건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드러났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텅 비어 있는 시선이었다. 유진은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상대는 아무 말 없이 유진에게 달려들었다. 뼈 조각이 허공을 가르며 유진의 어깨를 노렸다. 유진은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날카로운 뼈 조각이 그녀의 코트 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코트에서 먼지가 풀풀 날렸다.

“크윽…!”

유진은 반격했다. 낡은 칼을 휘둘러 상대의 팔을 노렸지만, 상대는 놀랍도록 민첩하게 움직였다. 이 폐허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모두 짐승 같았다. 약육강식의 법칙은 인간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뼈 조각과 낡은 칼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유진은 상대의 눈빛에서 배고픔을 읽었다. 저 자는 나를 먹이로 보고 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모든 생존자가 서로에게 먹잇감이 될 수 있었다.

몇 번의 공방 끝에, 유진은 겨우 상대와 거리를 벌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그녀는 상대의 빈틈을 찾으려 애썼지만, 그 기형적인 움직임은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 순간, 멀리서 둔탁한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쿵- 쿵-‘ 하는 규칙적인 소리. 그것은 마치 거대한 망치가 지표를 찍어 누르는 듯한 소리였다. 유진과 상대 모두 동시에 움직임을 멈췄다. 서로를 죽이려던 눈빛에서 일순간의 당혹감과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소리도, 짐승의 소리도 아니었다. 기계적인, 거대하고 위협적인 존재의 발소리 같았다.

상대는 더 이상 유진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두건 속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소리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미친 듯이 폐허 속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유진도 망설일 틈이 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폐허 깊숙한 곳으로 몸을 던졌다. 쿵- 쿵- 하는 소리는 이미 바로 등 뒤에까지 다가온 듯했다. 진동이 발밑을 흔들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에 몸을 숨긴 유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먼지투성이 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심장이 귀청이 찢어질 듯 울렸다.

‘뭐지… 대체…?’

그때였다. 거대한 그림자가 건물 잔해 위로 드리워졌다. 마치 하늘을 뒤덮은 듯한 거대한 형체. 유진은 두려움에 질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은 황혼 속에서, 그 거대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수십 층 빌딩만 한 높이의 검은 금속 구조물이었다. 불규칙한 팔다리가 수없이 달렸고, 표면에는 섬뜩한 붉은색 광원이 점멸하고 있었다. 거대한 금속 다리가 폐허를 밟고 지나갈 때마다 대지는 흔들렸다.

그리고, 그 금속 괴물의 몸통에서 섬뜩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경고. 생체 신호 감지. 즉시 제거합니다.]

기계음은 차갑고 무감각했다. 유진은 숨을 멈췄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세상이 황폐해진 이유. 그리고 아직까지도 폐허를 배회하며, 남아있는 모든 생존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미지의 존재들.

거대한 금속 괴물의 붉은 광원이 유진이 숨어있는 잔해 쪽을 향해 번뜩였다. 그녀의 심장은 멎는 듯했다. 어둠 속에서 다시 한번, 스스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까 그 기형적인 생존자가 그녀의 바로 옆 잔해 속에 숨어 있었다.

두려움에 질린 눈빛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굶주림과 광기로 가득했던 눈빛은 이제 순수한 공포에 잠겨 있었다. 금속 괴물의 붉은 광원이 더욱 강렬해지며 잔해를 비추기 시작했다.

유진은 이를 악물었다. 살아야 했다. 이 거대한 죽음의 손아귀에서도.

그녀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죽어가는 세상, 살아남은 인간, 그리고 그들을 쫓는 미지의 존재. 이 모든 것들이 한데 뒤섞인 곳에서, 그녀는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저 생존자와 손을 잡을 것인가.

붉은 광선이 잔해를 꿰뚫듯이 덮쳐왔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유진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다음 순간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남기 위한 본능이, 그 어떤 이성보다 강하게 외쳤다.

‘죽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