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역사물 독립적인 단편 소설

지훈은 17층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도시의 밤을 한숨처럼 내뱉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풍경. 고층 빌딩들의 불빛이 무수한 별처럼 박혀 있었고, 강변 도로는 끊임없이 흐르는 차들의 꼬리 등 불빛으로 물들었다. 그의 30평대 아파트는 전형적인 도시의 삶을 품고 있었다. 조용하고, 평범하고, 안전했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그랬다.

새벽 두 시,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지훈은 쨍그랑하는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심장이 발밑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향했다. 거실 바닥에는 유리컵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방금 전까지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물컵이었다.
“뭐지?”
지훈은 머리를 긁적였다. 바람? 설마. 모든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고양이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혹시 지진인가 싶었지만, 흔들림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깨진 유리 조각들을 조심스럽게 치우며 그는 단순히 피곤해서 잠결에 착각했을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 날 오후, 점심 식사를 준비하던 지훈은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제 밤에 잠그는 것을 깜빡했나? 냄비에 물을 붓고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다. 희미하게 파란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 순간, 지훈의 뒤편, 거실에서 묵직한 소리가 들렸다. 쿵!
지훈은 가스레인지 불을 끄고 거실로 달려갔다. 벽에 걸려 있던 액자가 떨어져 있었다. 그의 부모님 결혼사진이었다. 액자 유리에는 실금이 가 있었다.
“젠장…”
이건 좀 이상했다. 액자는 분명히 단단히 걸려 있었다. 못이 빠진 흔적도 없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툭,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다. 지훈은 다시 한번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아파트는 고요했다. 창밖으로는 도시의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지만, 실내에는 그 어떤 인기척도 없었다.

그날 밤부터 기이한 일들이 걷잡을 수 없이 시작되었다.
책상 위에 놓아둔 펜이 저절로 굴러떨어지고, 자려고 불을 끄면 스탠드 조명이 깜빡이며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물을 마시려 냉장고 문을 열자, 냉장고 안의 음료수 캔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이제 더 이상 이 모든 것을 우연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그는 텅 빈 아파트 안에서 소리쳤다. 목소리가 맴돌다 사라졌다. 그 소리에 응답하듯, 부엌 찬장에서 접시가 스르륵 밀려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지훈은 용기를 내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찬장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접시가 밀려나는 소리였다. 마치 좁은 틈새로 무언가가 비집고 나오려는 듯.
그는 찬장 문고리를 잡으려 했지만, 손이 닿기 직전 찬장 문이 쾅! 하고 열렸다. 안에 있던 접시들이 균형을 잃고 쏟아져 내렸다. 지훈은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접시들은 산산조각이 나 바닥에 흩어졌다.

밤이 깊어질수록 현상은 더욱 노골적이고 섬뜩해졌다.
새벽 세 시. 지훈은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곧 몸이 붕 뜨는 듯한 기분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보니 천장은 평소와 같았다. 하지만 침대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섬뜩한 냉기. 마치 누군가 침대 바로 옆에 서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눈을 감았다. 제발, 제발 아무것도 아니기를. 하지만 그 순간, 그의 귀에 끔찍하게도 선명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아니야… 여기가… 아니야…”
낮고 쉰 목소리. 사람의 목소리라고 하기엔 어딘가 왜곡되어 있었다. 지훈은 소리를 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일 수 없었다. 침대의 떨림은 점점 더 격렬해졌고, 속삭임은 더욱 또렷해졌다.
“—틀렸어… 모든 게… 달라…!”

다음 날 아침, 지훈은 거의 밤을 새운 채 파리해진 얼굴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정체불명의 동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낡고 푸르게 녹슨 동전은 생전 처음 보는 문양으로 가득했다. 앞면에는 용처럼 보이는 거대한 짐승이 휘감겨 있었고, 뒷면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건물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현대 대한민국의 주화와는 전혀 다른 형태였다. 그는 인터넷을 검색해봤지만, 그 동전과 일치하는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다른 세계에서 온 듯한 동전이었다.

그날 저녁, 그는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거울은 김이 서려 뿌옇게 흐려져 있었다. 손으로 김을 닦으려는데, 그 전에 누군가 먼저 다녀간 듯 거울 한가운데에 글자가 쓰여 있었다.
“…틈새…”
지훈의 심장이 다시 한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글씨는 그의 필체가 아니었다. 마치 뾰족한 손가락으로 거울을 긁은 듯, 날카롭고 섬뜩했다.
지훈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틈새? 무엇의 틈새?
그 순간, 거울 속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뒤편의 욕실 벽에 걸린 수건걸이가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그 수건걸이 뒤로, 아주 짧은 찰나, 흐릿한 도시의 풍경이 비쳤다. 지금 그의 아파트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와는 미묘하게 다른 풍경. 마천루의 형태가 조금 달랐고, 길을 걷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어딘가 이질적이었다. 마치 다른 시대, 다른 차원의 도시가 그 틈새로 비집고 들어오는 듯했다.

지훈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거울 속 풍경은 다시 평범한 욕실 벽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건… 환각이야. 지쳤어. 미쳤나 봐.”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의 이성은 더 이상 이런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밤이 되자, 아파트의 모든 가전제품이 발작을 시작했다. TV는 저절로 켜져 알 수 없는 언어로 된 뉴스 방송을 내보냈다. 화면 속 아나운서는 기괴한 복장을 하고 있었고, 뒤편의 배경은 그가 거울에서 봤던 미묘하게 다른 도시 풍경이었다. 냉장고는 굉음을 내며 문을 활짝 열어젖혔고, 오븐은 저절로 최고 온도로 가열되기 시작했다.

“여기가… 아니야…”
침실 문이 삐걱이며 열렸다. 그곳에서 다시 한번 그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이번에는 더 또렷했다.
“이곳은… 우리가 살던 곳이 아니야…”
지훈은 벽에 등을 기댄 채 주저앉았다. 온몸이 마비되는 공포. 그 속삭임이 침실 문을 넘어 거실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아니, 그 속삭임이 *그의 아파트 전체*를 채우고 있었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의 유리컵이 저절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들린 것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탁자에서 방금 전에 본 낡은 동전과 똑같은 동전들이 수십 개씩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동전들은 테이블 위, 바닥 위로 흩어졌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그의 귀를 찢었다.
“…갈 곳이… 없어… 우리는… 갈 곳이… 없어…”
속삭임은 더 이상 한두 문장이 아니었다.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동시에 울리는 듯, 불협화음의 합창처럼 그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테이블 위에 떠 있던 유리컵이 이제는 흔들거리며 지훈을 향해 돌진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쨍그랑!
유리컵은 그의 머리를 스치듯 지나쳐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지훈은 비명을 질렀다.
그때, 눈을 떴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이 있던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테이블도, 흩뿌려진 동전들도, 깨진 유리 조각들도.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훈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파트는 완벽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TV는 꺼져 있었고, 오븐도 꺼져 있었다. 냉장고 문은 닫혀 있었다.
마치 그가 겪었던 모든 일이 거대한 악몽이었던 것처럼.
하지만 그의 온몸에 돋아난 소름, 심장을 찢어놓을 것 같은 공포는 생생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벽에 기댄 채 일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거실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의 도시 풍경은 평소와 같았다. 수많은 빌딩들의 불빛, 강변 도로를 흐르는 차량의 붉은 꼬리 등.
아니.
아주 미묘하게, 달랐다.
저기, 저 멀리 보이는 빌딩의 꼭대기. 분명 어제까지는 뾰족한 첨탑이었는데, 지금은 돔 형태로 바뀌어 있었다.
그리고 강 건너편의 대형 전광판. 분명히 익숙한 로고가 새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처음 보는, 알 수 없는 상형문자 같은 문양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마치 그의 아파트가, 아주 서서히, 다른 현실 속으로 표류하고 있는 것처럼.

지훈은 창가로 다가갔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옆, 유리창 한 귀퉁이에 아주 작게 새겨진 글자를 발견했다.
누군가 쓴 것 같지도 않고, 새겨진 것 같지도 않은, 마치 유리의 성분 자체가 변형된 듯한 섬뜩한 글자.
“…환영해…”
그 글자가 그의 눈에 선명하게 박히는 순간, 밖에서 들려오던 도시의 모든 소음이 일시에 사라졌다.
아파트 전체를 감싸는 절대적인 정적.
그리고 그 정적 속에서, 지훈은 문득 깨달았다.
속삭임이, 더 이상 귀가 아닌 그의 심장 속에서 울리고 있다는 것을.
그것은 이제 공포가 아닌, 거부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의 초대였다.
그는 자신이 더 이상 ‘이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창밖의, 이제는 완전히 낯선 도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닫혀 있던 현관문이 삐걱, 하고 아주 느리게 열렸다.
텅 빈 아파트에서, 그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느꼈다.
누군가, 아니, 무언가가, 문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새로운 세상의 문이, 활짝 열린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