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도시를 집어삼키기 시작할 무렵, 가장 높고 화려한 첨탑의 그림자 아래에서 유나는 홀로 서 있었다. 붉은색에 가까운 자주색 망토가 밤바람에 휘날리며 마치 살아있는 그림자처럼 그녀의 몸을 감쌌다. 한때 별처럼 빛나던 금발은 차가운 은빛으로 변해 있었고, 생기 넘치던 푸른 눈동자에는 오직 깊이를 알 수 없는 얼음 같은 냉기만이 서려 있었다. 손끝에서 스멀스멀 피어나는 검은 마력이 망토 자락을 따라 꿈틀거렸다.
“사라…”
나직이 읊조린 이름은, 핏빛으로 물든 심장에서 끓어오른 절규와도 같았다. 그때 그날, 모든 것을 바쳐 지키려 했던 마법 세계의 평화 속에서, 가장 믿었던 친구가 내민 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칼날이 되어 유나의 심장을 꿰뚫었었다. 빛나는 수정탑 위에서 함께 맹세했던 약속은 잿더미가 되어 버린 지 오래였다. 그날 이후, 유나에게 남은 것은 오직 복수뿐이었다.
첨탑의 꼭대기, 유리로 된 돔 안에서는 환한 빛과 함께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오늘은 ‘성스러운 빛의 수호자’ 사라가 새로운 대마법의 봉인식을 거행하는 날이었다. 도시의 모든 시민이 그녀를 찬양하며 환호하고 있었다. 유나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저 환호가, 곧 비명으로 바뀔 것이다.
“변신!”
낮게 읊조린 주문과 함께 유나의 몸이 검은 파동에 휩싸였다. 한때는 순수하고 영롱한 빛으로 빛나던 변신이었지만, 이제는 어둠을 머금은 마력이 그녀를 감쌌다. 손에 들린 지팡이는 검은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낫의 형태로 변했고, 은빛 머리카락 사이로 붉은 마력이 번뜩였다. 망토는 날카로운 그림자 날개처럼 솟아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별빛 마법소녀 루나’가 아니었다. 오직 ‘심연의 마녀 유나’만이 존재했다.
검은 날개를 펼친 유나는 망설임 없이 첨탑을 향해 날아올랐다. 방어 마법진이 번쩍였지만, 심연의 마력은 고대 유물을 녹이듯 순식간에 마법진을 관통했다. 유리 돔이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시민들의 환호는 경악과 혼란으로 바뀌었다.
무대 위에서 가장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빛나는 지팡이를 들고 있던 사라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이 유나를 알아보는 순간, 공포에 질려 크게 뜨였다.
“유… 유나?!”
사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순간, 유나는 비로소 살아 있음을 느꼈다.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복수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고동이었다.
“오랜만이네, 사라.” 유나의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내 심장이 꿰뚫리고 너에게 버려진 그 날 이후로.”
사라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네가 어떻게…! 그때 분명히…!”
“내가 죽었기를 바랐겠지. 네가 얻은 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유나는 낫을 든 채 천천히 사라에게 다가갔다. 낫 끝이 바닥을 긁으며 찢어지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난 살아남았어. 네가 망각의 늪에 던져버린 심장 조각들을 그러모아서 말이야.”
사라가 황급히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때 일은 어쩔 수 없었어! 마법 세계를 위한 희생이었다고! 너도 동의하지 않았니?”
유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에는 분노와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희생? 너의 대의를 위해 나의 생명을 바치는 것이 희생이었던가? 아니, 그건 살인이었어, 사라. 친구의 등에 칼을 꽂는 비겁한 살인.”
그녀의 눈에서 붉은 마력이 더욱 강렬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제는 내가 너에게 똑같이 돌려줄 차례야.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고, 네가 가장 아끼는 것을 부수어줄 거야.”
“헛소리 마! 난 ‘성스러운 빛의 수호자’다! 악에 물든 네가 감히 날 막을 순 없어!” 사라가 비명을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렀다. 눈부신 섬광이 유나를 향해 쏘아졌다. 순수한 빛의 마법, 한때 유나의 가장 큰 자랑이자 희망이었던 마법이었다.
하지만 유나는 피하지 않았다. 검은 낫을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자, 섬광은 마치 검은 안개에 빨려 들어가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라의 얼굴에 절망이 스쳤다.
“네 빛은 이제 나에게 통하지 않아.” 유나는 낫을 치켜들었다. 낫 끝에서 검은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거대한 어둠의 구체가 형성되었다. “이제는 너의 빛을 어둠으로 집어삼켜줄 차례니까.”
“안 돼! 멈춰! 유나!” 사라의 절규가 돔 안에 울려 퍼졌다.
유나의 표정은 잔혹할 정도로 평온했다. “늦었어, 사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너의 모든 것을, 그리고 너의 빛을. 철저하게 파괴해 줄 테니, 기대해도 좋아.”
어둠의 구체가 사라를 향해 맹렬하게 돌진했다. 비명과 함께, 첨탑은 검은 파동에 휩싸였다. 한때 빛으로 가득했던 그곳은, 이제 복수의 그림자로 물들기 시작했다. 유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겨우 첫 번째 복수의 막이 올랐을 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