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503호: 움직이는 그림자**

고요는 지훈의 오랜 친구이자 가장 지독한 적이었다. 새벽 다섯 시, 침대 위에서 눈을 뜬 그는 익숙한 정적 속에 몸을 묻었다. 창밖은 잿빛 세상이었다. 회색빛 하늘 아래 낡고 부서진 아파트 단지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깨진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앙상한 뼈대만 남은 건물들 사이에서 길고 지친 신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마저 고독을 증폭시킬 뿐, 살아있는 무언가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젠장.”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손목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지만, 몸은 귀신같이 시간을 알고 있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은 지 2년. 매일이 똑같았다. 일어나면 물통의 수위를 확인하고, 비축된 식량을 점검하며, 혹시 모를 침입자에 대비해 문단속을 살피는 것. 아침 식사는 항상 건조한 전투식량 조각 아니면 말린 고기였다. 오늘은 눅눅한 크래커였다.

크래커를 입에 넣자 텁텁한 맛과 함께 과거의 기억이 희미하게 스쳤다. 따뜻한 커피와 뉴스 소리, 사람들의 활기 넘치는 발자국 소리. 이제는 모두 사라진 잔상일 뿐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며 생각을 밀어냈다. 과거를 되새기는 건 정신 건강에 해로웠다. 특히 이 끝없는 고독 속에서는 더더욱.

주방으로 향했다. 플라스틱 물통을 들어 식수를 확인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싱크대 수도꼭지를 틀어본다. 물론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 물방울 맺힌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그때였다. 닫혀 있던 냉장고 문이 아주 미세하게, 손톱만큼 벌어져 있었다.

“내가 덜 닫았나?”

지훈은 의아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문을 다시 꽉 닫았다. 낡은 냉장고는 힘없이 ‘끼이익’ 소리를 냈다. 신경이 곤두선 것은 그 후였다. 창가로 가 먼지 쌓인 화분을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물을 준 후, 똑바로 세워뒀던 화분 하나가 기울어져 있었다. 착각일까? 흔들린 적 없는 곳인데. 낡은 손으로 화분을 다시 세웠다. 흙먼지가 손가락에 묻어났다.

잠시 눈을 붙이려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거실에서 ‘툭’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작은 돌멩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듯한.

“뭐지?”

지훈은 몸을 일으켜 귀를 기울였다. 심장이 미세하게 두근거렸다. 그러나 사방은 다시 완벽한 침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이 망할 놈의 아파트는 오래되어서 제멋대로 소리를 내는 건가. 아니면 신경이 너무 예민해진 탓인가. 지훈은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몸을 눕혔다. 외로움이 만들어내는 환청일지도 모른다고 애써 생각했다.

밤이 찾아왔다. 밖은 어둠에 잠기고, 지훈의 아파트 안은 손전등의 희미한 불빛만이 겨우 어둠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했다. 잠은 오지 않았다. 오늘 낮에 들었던 소리들, 봤던 광경들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끼이익…….”

안방 문이 소리를 내며 아주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분명히, 분명히 잠그지는 않았어도 꽉 닫아두었었다. 지훈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문틈으로 희미한 어둠이 스며들어왔다.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그림자. 마치 문에 걸린 옷가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곳은 안방이었고, 바람이 불 리 없었다. 착시 현상이라고, 잠결에 본 환영이라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침대에서 조용히 벗어났다. 낡은 야구 방망이를 손에 쥐었다. 묵직한 무게가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닫았다. 그리고 주방으로 향했다. 물통을 들고 냉장고 문을 연 순간, 지훈의 눈은 충격으로 커졌다.

냉장고 안은 난장판이었다. 플라스틱 용기들이 엎어져 있었고, 내용물이 뒤죽박죽 흐트러져 있었다. 심지어 아껴뒀던 말린 고기 조각 몇 개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한 채소 쪼가리들도 문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이건 명백한 증거였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침입했다. 그것도 아주 오랫동안.

“누구야! 거기 누구 있어!”

갈라진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메아리처럼 되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뿐. 지훈은 야구 방망이를 굳게 쥐고 집 안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거실, 작은방, 화장실… 구석구석을 확인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완벽한 빈집이었다. 아니, 빈집이어야만 했다.

그가 거실 한가운데에 섰을 때였다.

‘지직… 지지직….’

오래전에 전기가 끊겨 켜질 리 없는 TV가 갑자기 소리를 내며 켜졌다. 화면은 아무것도 없이, 검은 점멸만이 불규칙하게 반복될 뿐이었다. 마치 TV 속에서 무언가가 답답함을 호소하는 것처럼. 지훈은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것을 느꼈다.

등 뒤에서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내가 좋아하던 바닷가 그림이었다. 거울이 깨지듯 산산조각 난 액자 조각들이 발밑에 흩어졌다.

“이런… 씨발….”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공포에 질린 눈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확신. 아니, 누군가가 아니라 *무언가*가.

벽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득득득… 득득득….’ 마치 손톱으로 벽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소리는 점점 커지더니, 벽을 타고 움직이는 것처럼 들렸다. 거실 벽에서 안방 벽으로, 그리고 다시 주방 벽으로.

지훈은 숨을 헐떡였다. 더 이상 상상이나 착각이 아니었다. 명백한 존재의 흔적. 보이지 않는 존재의 위협.

그때였다. 주방 식탁 위에 놓여 있던 식칼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투명한 손에 들린 것처럼 위로 솟아올랐다. 칼날이 희미한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섬뜩하게 빛났다.

“크윽…!”

지훈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야구 방망이를 휘둘러 보았지만 헛공기만 갈랐다. 식칼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를 향해 돌진했다. ‘휘익!’ 칼날이 그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가 벽에 ‘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섬뜩할 정도로 정확한 공격이었다. 만약 조금만 더 가까웠더라면…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차갑게 느껴졌다. 더 이상 이 아파트는 안전한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순간, 주방 식탁 위의 접시들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쨍그랑! 쨍그랑!’ 굉음과 함께 유리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아파트의 모든 전등이 동시에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버렸다.

완전한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지훈은 자신의 심장 소리가 고막을 때리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그 심장 소리 위로,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섬뜩한 웃음소리, 혹은 비명 소리가 겹쳐 들리는 듯했다.

지훈은 공포에 질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것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존재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그 어떤 고독보다도 더 잔인한 공포로 다가왔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