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3화: 수상한 건 이웃집 남자가 아니라
지혜는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놓인 믹서기를 멍하니 바라봤다. 어제 분명 찬장 깊숙이 넣어뒀던 건데, 밤새 제 발로 걸어 나왔을 리 만무했다. 등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설마, 설마 귀신? 아니다, 무슨 귀신이 믹서기를 옮겨.
“정신 차려, 강지혜.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는 거야.”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요 며칠 밤샘 근무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으니, 환각이 보일 법도 했다. 게다가 이사 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새 아파트에 귀신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믹서기는 시작에 불과했다.
아침엔 욕실 선반에 가지런히 놓아둔 칫솔 세트가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비누 거품이라도 묻어 있으면 실수로 떨어진 거겠거니 했을 텐데, 뽀송뽀송 마른 채로였다. 점심엔 분명 냉장고 문을 닫았는데, 다시 열어보니 김치통이 문턱까지 나와 있었다. 저녁엔 더 가관이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보니, 거실에 걸어둔 액자가 거꾸로 걸려 있는 게 아닌가. 하필이면 가장 아끼는 고양이 사진 액자였다.
“야! 이 씨… 누가 장난치는 거야!”
지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침입해서 장난을 치는 것이라면 경찰에 신고해야 했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침입 흔적도 없었다. 도어락 비밀번호를 바꿀까 고민하다가도, 이게 과연 외부인의 소행일지 의심스러웠다. 외부인이 고작 믹서기나 칫솔 같은 걸로 장난을 친다고?
불안감은 갈수록 커져갔다. 잠자리에 들면 가끔씩 들리는 ‘똑, 똑’ 하는 소리가 벽에서 나는 것 같았다. 아니, 벽이 아니라 천장인가? 그러다 이내 자기 머리맡에서 나는 것 같았다. 급기야 어젯밤엔 잠결에 누군가 이불을 잡아당기는 기분까지 들었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애써 외면했지만, 매일 아침 몸이 쑤시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결국 지혜는 최후의 수단으로 온 집안에 CCTV를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CCTV가 도착한 날, 현관문 앞에 놓여 있던 박스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경비실에 문의해도 그런 택배는 수령한 적 없다고 했다.
지혜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미쳐버리겠네, 진짜!”
그때였다. 딩동,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지혜는 잔뜩 날이 선 채로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다. 화면 속에는 낯선 남자가 어색하게 웃고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깔끔한 차림새였다.
“누구… 세요?” 지혜가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802호에 사는 현우라고 합니다. 혹시… 택배가 잘못 배송된 것 같아서요.”
현우의 손에는 지혜가 주문했던 CCTV 박스가 들려 있었다.
“어… 그게 제 건데요?” 지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아, 역시! 801호랑 헷갈렸나 봐요. 보통 1호 라인은 왼쪽에 있는데, 여기는 왠지 801호가 오른쪽에 있더라고요.” 현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박스를 건넸다. “죄송합니다, 제가 며칠 전에 이사 와서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이사를 왔다고? 어쩐지 못 보던 얼굴이었다. 지혜는 상자를 받아 들고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괜찮아요.”
현우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달싹이다가, 지혜의 뒤편, 거실 한가운데 놓인 의자에 시선이 꽂혔다. 그 의자 위에는 지혜가 어제 밤새 개어놓은 빨래가 산산조각 흩어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와서 일부러 엉망으로 만든 것처럼.
지혜는 현우의 시선이 닿는 곳을 따라가다가 흠칫 놀랐다. 분명히 의자 위에 놓았던 빨래는 아까 전까지 잘 개어져 있었는데, 언제 저렇게 되어버렸지?
“저… 혹시 청소하시다가 그러신 건가요?” 현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혜는 얼굴이 홧홧 달아올랐다. 이 꼴을 옆집 남자에게 들키다니! “아, 아뇨! 이게… 그게… 제가 좀 산만해서요! 하하.”
어색하게 웃어넘겼지만, 현우의 눈빛은 의심을 거두지 않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빨래에서 지혜의 텅 빈 현관 바닥으로 향했다. 거기에는 어제 밤 지혜가 벗어둔 슬리퍼 한 짝이 벽 쪽으로 묘하게 밀려나 있었다.
“저기… 혹시 집에 뭔가… 문제가 있으신 건 아니죠?” 현우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혜는 순간 망설였다. 이 남자가 수상한 사람일까? 아니면 진짜 이웃이 걱정해 주는 걸까? 일단 CCTV를 설치해서 범인을 잡아야 했다. 어쩌면 이 남자가 범인일 수도 있었다.
“아뇨, 전혀요!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냥 제가 좀… 칠칠맞아서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지혜는 거의 문을 닫으려는 자세로 현우를 배웅했다.
현우는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어딘가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싱긋 웃었다. “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뭔가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802호로 오세요. 커피 한 잔 대접해 드릴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현우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지혜는 황급히 문을 닫고 도어락을 잠갔다. 그리고 헐레벌떡 상자를 뜯어 CCTV 설치에 돌입했다.
CCTV는 거실 구석에 설치했다. 스마트폰 앱과 연결하니 온 거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일단 한시름 놓았다. 적어도 범인이 누군지는 알 수 있을 테니까.
밤이 되자 지혜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CCTV 화면을 지켜봤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고요한 거실 화면. ‘에이, 괜히 오버했네.’ 안심하며 눈을 감으려는 찰나였다.
화면 속, 방금 전까지 의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리모컨이 스르륵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어…?”
지혜는 숨을 들이켰다. 리모컨은 그 자리에서 꿈틀거리더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끌려가듯 거실 중앙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멈춰 서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리모컨이 빙글빙글 돌더니, 마치 무언가를 가리키듯 창밖을 향했다.
지혜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몸을 웅크렸다. 말도 안 돼! 저건 환각이 아니었다. 분명히 CCTV에 찍히고 있는 생생한 현실이었다.
그 순간, 리모컨이 가리키던 창밖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번개가 쳤나? 하지만 천둥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에 지혜는 천천히 이불을 내렸다.
창밖은 어두웠다. 그런데 멀리, 저 멀리 802호 현우의 집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깜빡이는 게 보였다. 마치 누군가 플래시로 신호를 보내는 것처럼.
똑, 똑, 똑.
그리고 지혜의 방문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지혜는 심장이 발끝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방문은 분명 잠겨 있었다.
누구지? 혹시… 현우? 아니면…
지혜는 스마트폰의 CCTV 화면을 황급히 다시 확인했다.
거실 한가운데, 공중에 떠 있던 리모컨이 갑자기 뚝 떨어지더니, 이번에는 현관문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마치 현관문을 열어주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순간, 방문에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좀 더 선명하게, 좀 더 가깝게.
똑. 똑. 똑.
“누구… 세요…?” 지혜의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다만, 방문 너머에서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놀랍도록 유쾌하고, 그러나 섬뜩하게도 공허한 웃음소리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