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하제일 무술 대축전: 태평한 무림인과 얼음 공주
“다음 대국! 강호 비선문의 진혁 대협과, 곤륜 무적문의 장풍 대협입니다!”
우렁찬 호명 소리가 천하제일 무술 대축전의 거대한 원형 경기장을 가득 메웠다. 오색찬란한 비단 휘장 아래, 수천의 무림인들이 숨을 죽이고 전광판을 응시했다. 이 대회는 단순한 자웅을 겨루는 장이 아니었다. 혼돈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무림의 질서를 세울 ‘천하무림맹주’를 가리는 자리. 말 그대로 천하의 운명을 건 한 판 승부였다.
하지만 그 엄청난 무게감 속에서도, 한 사내는 예외였다.
“어… 저 부른 거예요?”
경기장 입구에서 느릿하게 걸어 나오던 진혁은 길게 하품을 쩍 하고는 귀를 후볐다. 그의 눈동자는 쨍한 한낮의 햇살 때문인지, 아니면 잠이 덜 깬 탓인지 반쯤 감겨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대충 걸친 도복은 마치 방금 잠에서 깨어난 동네 건달 같았다. 강호 비선문? 그런 문파가 있기는 했나? 심지어 ‘대협’이라는 호칭까지 붙여주다니, 진행자가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관중석 여기저기서 술렁임이 터져 나왔다.
“저게 누구야? 도대체 저런 자가 어떻게 16강까지 올라온 거지?”
“비선문? 처음 들어보는데. 혹시 거대 문파의 숨겨진 후계자라도 되는 건가?”
“아냐! 첫 경기에선 졸다가 상대방한테 얻어맞고는 어쩌다 운 좋게 이겼다잖아! 지난번 경기에서도 갑자기 허리에 담이 왔다며 드러눕다가 상대방이 기권해서 이겼다고!”
진혁의 16강 진출은 기적, 혹은 무림 3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렸다. 그는 무림 고수들의 피 튀기는 격전 속에서 홀로 ‘꿀잠’과 ‘요행’으로 여기까지 올라온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경기장 중앙에 우뚝 선 장풍 대협의 얼굴은 이미 울그락불그락해져 있었다. 곤륜 무적문의 장풍 대협이라면, 십대 고수 반열에 드는 거목이었다. 그런 그가 듣도 보도 못한 자에게 이런 식으로 무시당하니, 속에서 천불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흥! 건방진 놈! 그 같잖은 운도 여기까지다! 네놈이 비선문이든 잡문이든, 감히 이 천하제일 무술 대축전을 모욕한 죄를 엄히 물을 것이다!”
장풍 대협이 손가락으로 진혁을 가리키며 쩌렁쩌렁 외쳤다. 그의 몸에서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며 경기장 바닥의 흙먼지가 회오리쳤다. 그 살벌한 기세에 관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진혁은 여전히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 절 모욕했다고 했어요? 죄송해요, 잠시 졸아서 잘 못 들었어요.”
진혁이 헤실헤실 웃으며 대충 손을 휘저었다. 장풍 대협의 얼굴은 삶은 문어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그때였다. VIP 관람석 제일 앞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런 자가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에 발을 들이게 하다니. 이 무림맹의 허술한 심사 기준이 개탄스럽군.”
목소리의 주인공은 빙하처럼 차가운 미모를 가진 여인이었다. 순백의 도포를 걸치고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흡사 달빛 아래 핀 설매화 같았다. 천하제일 미녀 고수이자, 현 무림맹주의 하나뿐인 외동딸, ‘설아’였다. 그녀는 이미 진혁이 비선문이라는 이름도 생소한 문파의 깃발을 들고 나타났을 때부터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진혁은 무림의 기강을 해이하게 만드는 불경한 존재 그 자체였다.
진혁은 설아의 목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반쯤 감겨있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어라? 설아 공주님? 여기서 다시 만나네요. 여전히 얼음공주 콘셉트인가 보네.”
진혁의 능글맞은 한마디에 경기장은 얼어붙었다. ‘공주님’이라니! 무림맹주의 외동딸을 감히 그렇게 부르는 자는 진혁이 유일했다. 게다가 ‘다시 만난다’는 말은 또 무슨 의미인가? 설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닥쳐라, 파계승 같은 놈! 천하인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망언을 지껄이지 마라!”
설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의 가는 허리춤에 매달린 검 손잡이가 가늘게 떨렸다. 마치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내려와 진혁의 입을 막아버릴 기세였다. 사실 그녀는 진혁과 아는 사이였다. 그것도 지독하게 얽히고설킨, 말하기도 싫은 악연이었다. 며칠 전, 설아가 기습적으로 습격당했을 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 진혁이라는 자가 나타나 그녀를 구했던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이, 상상 이상으로 민망하고 불쾌하기 짝이 없었지만.
장풍 대협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진혁과 설아를 번갈아 보았다.
“너희 둘, 대체 무슨 사이냐!”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글쎄요? 인연이라면 인연이겠죠?”
두 사람의 대답은 극명하게 갈렸다. 설아는 분노로 어금니를 꽉 깨물었고, 진혁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럼 이제 잡담은 그만두고, 시합을 시작하지.”
심판의 선언과 함께 장풍 대협의 눈이 살기로 번뜩였다. 그는 망설임 없이 ‘곤륜풍뢰검(崑崙風雷劍)’의 초식을 펼쳤다. 거대한 검기가 폭풍처럼 진혁을 향해 내리꽂혔다. 경기장 바닥이 쩍쩍 갈라지고, 모래바람이 사방으로 휘몰아쳤다. 그야말로 천지를 뒤흔드는 위력이었다.
하지만 진혁은 여전히 한가로웠다. 그는 장풍 대협의 맹공이 코앞까지 닥쳐올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검기가 닿기 직전, 그는 마치 산책하듯 옆으로 한 발짝 가볍게 움직였다.
스르륵-
거대한 검기가 진혁이 서 있던 자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진혁은 헝클어진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짐 없이, 그저 멀뚱히 장풍 대협을 바라보았다.
“어? 방금 뭔가 지나갔는데. 혹시 바람이 분 건가요?”
진혁의 뻔뻔한 말에 관중석에서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장풍 대협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혼신을 담은 검기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자약한 모습에 그는 모욕감을 느꼈다.
“네놈이 감히!”
장풍 대협은 더욱 강력한 기운을 모아 다시 검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검기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진혁의 사방을 에워쌌다. 피할 틈조차 주지 않겠다는 듯, 완벽한 포위망이었다.
진혁은 이젠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 귀찮아라. 그냥 적당히 끝내고 자고 싶은데.”
그리고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진혁이 움직였다. 그것도 아주 느릿하게, 마치 춤을 추듯 우아하게. 그의 몸이 검기의 틈새를 유영하듯 빠져나갔다.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검기가 그의 옷깃을 스치지도 못했다. 그리고는 어느새 장풍 대협의 등 뒤에 서 있었다.
“흐읍-”
장풍 대협은 자신의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기척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는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진혁의 손가락이 그의 어깨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거기, 어깨에 힘 너무 들어갔어요. 어깨가 아프면 잠도 잘 안 오는데.”
툭.
진혁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장풍 대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운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마치 터져 나오던 댐의 수문이 갑자기 닫힌 것처럼, 모든 힘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장풍 대협은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충격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심판은 당황한 얼굴로 전광판을 확인했다. 진혁의 승리였다.
경기장은 침묵에 휩싸였다. 모두가 이 어이없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멍하니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긴장을 풀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다시 길게 하품을 했다.
“휴, 겨우 끝났네. 이제 좀 잘 수 있겠다.”
진혁은 주섬주섬 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설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진혁! 네놈, 대체 정체가 뭐냐!”
진혁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설아는 얼음장 같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진실을 꿰뚫으려는 듯 날카로웠다. 진혁은 빙긋 웃었다.
“글쎄요? 저도 제가 뭔지 잘 모르겠는데. 그냥 잠 많은 비선문의 진혁일 뿐이죠, 뭐.”
그는 싱겁게 답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설아의 시선은 그의 뒷모습에서 떨어질 줄 몰랐다. ‘비선문? 잠 많은 진혁? 웃기는 소리!’ 그녀는 그의 말투와, 그가 방금 보여준 경악스러운 무공, 그리고 며칠 전 그를 처음 만났던 그 불쾌했던 순간들을 떠올렸다.
‘저 자는 분명 무언가를 숨기고 있어. 그것도 아주 엄청난 것을. 대체 저런 자가 왜 천하제일 무술 대축전에 나타난 거지?’
설아의 심장은 차가운 이성만큼이나 뜨겁게 두근거렸다. 이 대회가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저 진혁이라는 괴상한 사내의 진짜 정체를 반드시 밝혀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와의 다음 대결은, 그녀의 차례가 될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