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회귀자의 각본**
빗줄기가 유리창을 사정없이 때렸다. 지훈은 창밖의 회색빛 도시를 멍하니 응시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이 도시의 밤을 수놓을 혁신을 꿈꾸던 자신이었다. 이제 남은 건 차가운 바닥에 나뒹구는 서류 뭉치와, 비릿한 배신감뿐이었다.
“강지훈 대표님, 마지막으로 전해드릴 말씀입니다.”
딱딱한 변호사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그가 내민 서류에는 ‘파산’이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옆 테이블에는 전 동업자, 아니, ‘친구’였던 세준의 이름이 적힌 신문 기사가 놓여 있었다. [‘신성’ 강세준 대표, AI 산업의 새 지평 열다]. 역겹도록 위선적인 웃음을 짓고 있는 세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지훈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강지훈 씨, 더 이상 논의할 건 없죠?”
변호사는 묻지도 않은 말에 스스로 답하듯 일어서며 사무실을 나섰다.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진 지훈은 천천히 손을 들어 떨리는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리고 꺼내든 것은, 낡고 빛바랜 회로 기판이었다. 우리가 처음으로 성공시킨 AI 모듈의 시제품. 온갖 난관을 함께 헤쳐나가며 밤샘 작업 끝에 탄생했던 우리들의 꿈이었다.
‘세준아… 우리는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손안의 회로 기판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이 작은 조각에 담긴 수많은 밤의 열정과 희망이, 이제는 가루처럼 흩어져 버린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지훈은 힘없이 손목에서 시계를 풀었다. 세준이 성공하면 사주겠다던, 늘 차고 다니던 값비싼 시계였다. 그 약속은, 그 모든 믿음은, 결국 이런 식으로 끝나버렸다.
“하하… 하하하…”
마른 웃음이 목구멍을 긁고 나왔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지독한 상실감.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도, 일궈온 회사도, 그리고 가장 믿었던 친구도.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대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매서운 바람이 그의 뺨을 후려쳤다. 빗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그 순간, 손에 들고 있던 회로 기판이 미끄러져 추락했다.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며 섬광을 내뿜더니,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리고 지훈의 시야는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
눈꺼풀이 무겁게 들렸다. 익숙한 천장. 흐릿한 시야가 선명해지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그의 방 한구석에 쌓여 있는 개발 서적들이었다. 낡은 책상 위에는 그의 손때 묻은 키보드와 마우스가 놓여 있었다. 옆에는 커피잔이, 그리고 그 안에 담겨 마르다 못해 굳어버린 커피 찌꺼기가 보였다.
‘여긴… 내 예전 방?’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분명 파산 선고를 받고, 그 변호사가 나간 뒤, 회로 기판을 떨어뜨렸고… 그리고?
벌떡 몸을 일으킨 지훈은 비틀거리며 책상으로 향했다. 켜져 있는 노트북 화면에는 코딩 창이 열려 있었다. 익숙한 코드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고 화면 우측 하단에 선명하게 박힌 날짜.
[20XX년 5월 12일]
지훈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이건 6개월 전이었다. 세준이 그 모든 일을 꾸미기 6개월 전, 우리 회사가 가장 눈부시게 성장하던 시기였다.
손가락을 더듬어 주머니를 만졌다. 분명 파편이 되었을 회로 기판은 그곳에 있었다.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온전한 상태로. 낡고 빛바랜, 처음의 모습 그대로.
“젠장… 내가 미쳤나?”
현실감이 없었다. 꿈일까? 아니, 이건 꿈이 아니었다. 뺨을 때려봐도,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어도, 모든 감각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지훈은 다시 날짜를 확인했다. 분명 6개월 전.
그 순간, 뇌리를 스치는 생각.
‘세준…!’
분노가 심장을 잠식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덩이. 이전 생에서 겪었던 지옥 같은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배신, 모욕, 절망… 그 모든 것을 되돌릴 기회가 찾아왔다.
“강세준… 네가 나에게서 앗아간 모든 것을, 이번에는 네가 되돌려받을 차례다.”
지훈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입가에는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
그날 이후, 지훈은 과거의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순진하게 세준을 믿고 기술 개발에만 몰두했던 과거의 강지훈은 죽었다. 이제 그는 미래를 아는 유일한 존재이자, 복수를 위해 모든 수를 계산하는 냉철한 전략가였다.
그는 가장 먼저 자신의 핵심 AI 알고리즘 코드를 다시 살폈다. 세준이 나중에 빼돌릴 핵심 기술이었다. 지훈은 그 코드를 몇 날 며칠 밤낮으로 뜯어고쳤다. 단순히 강화하는 것을 넘어, 세준이 손댈 경우 역추적 가능하게 만드는 함정을 심었다.
“이건 미끼다, 세준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차가운 결의가 담겨 있었다. 그는 이 알고리즘을 새로운 이름으로 특허 등록하고, 모든 백업 파일을 클라우드와 오프라인 저장소에 분산시켜 철저히 봉인했다. 그리고 세준에게 보여줄 ‘더미’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핵심 기능이 미비하고 치명적인 버그가 숨겨져 있는 버전이었다.
다음은 회사 자금이었다. 세준은 투자 유치 명목으로 들어온 거액의 자금을 빼돌려 자신의 유령 회사로 옮겨놓을 예정이었다. 지훈은 이를 막기 위해 ‘예측 불가능한 시장 변동’을 이유로 내세워, 투자금을 인출이 어려운 안전 자산으로 돌려버렸다.
“세준아, 네 발목을 잡을 족쇄가 될 거다.”
그리고 투자자들. 과거, 세준은 지훈의 기술적 한계를 부각시키고, 지훈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이용해 투자자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지훈은 미리 파악한 투자자들의 성향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를 파악했다. 세준이 접촉하기 전, 그들에게 먼저 접근했다.
“저희 AI의 진정한 가치는 단순히 기술적 성취에만 있지 않습니다. 윤리적인 인공지능 개발을 통해 장기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에 있습니다.”
지훈은 진심을 담아, 동시에 세준의 방식과는 다른 투명하고 윤리적인 경영 비전을 제시했다. 세준의 화려한 언변과는 달리, 지훈의 진정성과 논리는 투자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 과거 세준에게 뒷통수를 맞았던 소규모 벤처 캐피탈 대표 이사 ‘김민석’에게는 더욱 그랬다.
“강 대표님, 솔직히 강세준 대표님의 제안도 매력적이었습니다. 하지만, 강 대표님 말씀에서 더 깊은 비전과 신뢰가 느껴지는군요.”
김민석 대표는 지훈의 손을 굳게 잡았다. 지훈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 김민석 대표는 나중에 세준이 가장 먼저 등쳐먹으려 했던 투자자였다. 이제 그에게 세준은 어떤 신뢰도 주지 못할 것이다.
***
세준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과거와 똑같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지훈에게 다가왔다.
“지훈아, 요즘 힘들어 보여서 걱정이다. 밤샘 작업도 좋지만, 가끔은 쉬어야지.”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이 역겨웠다. 지훈은 애써 웃으며 세준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괜찮아, 세준아. 덕분에 많이 배웠어.”
“하하, 무슨 소리야. 다 우리가 함께하는 일인데. 곧 우리 회사가 AI 시장을 뒤흔들 거야. 그때까지만 조금 더 힘내자!”
세준의 눈동자에 번뜩이는 욕망이 보였다. 지훈은 그 욕망이 자신을 향한 칼날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제 그 칼날은 세준 자신을 향할 것이다.
몇 주 후, 세준의 계획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그는 지훈이 힘들게 개발한 ‘더미’ 알고리즘에 대한 관심을 표하며, 은밀히 외부 전문가와 접촉해 코드를 분석하게 했다. 지훈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봤다. 세준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과거와 정확히 일치했다.
“강지훈 대표님의 코드는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핵심 로직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습니다.”
세준이 고용한 전문가의 보고서였다. 세준은 쾌재를 불렀다. 이제 이 보고서를 들고 투자자들에게 가서 지훈의 무능함을 부각시키고, 자신이 이 회사에 더 적합한 리더임을 어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세준이 접촉한 투자자들은 이미 지훈과의 면담을 통해 회사의 비전과 지훈의 역량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세준의 보고서에 의구심을 표했다.
“강 대표님의 AI 윤리성 보고서와는 내용이 상이한데요. 이 보고서의 출처는 신뢰할 만한가요?”
김민석 대표가 차갑게 물었다. 세준은 당황했다. 과거 같으면 지훈의 기술적 한계에 대한 이의를 제기했을 터인데, 오히려 지훈을 옹호하는 반응이라니.
“그, 그건… 강지훈이 보여준 코드는 완벽한 버전이 아닐 겁니다! 제가 파악한 바로는…”
“강세준 대표님, 저희는 강지훈 대표님이 제시한 완성된 알고리즘의 베타 테스트 결과를 보았습니다. 혁신적이더군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다른 투자자가 쐐기를 박았다. 세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
그날 저녁, 지훈은 세준을 호출했다. 밤늦은 시각, 아무도 없는 회사의 옥상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세준아, 무슨 할 말이 있어?”
세준은 여전히 표정 관리를 하려 애썼지만, 그의 눈빛은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할 말이라니? 갑자기 옥상으로 부르고… 무슨 일이야, 지훈아?”
지훈은 아무 말 없이 주머니에서 회로 기판을 꺼내 세준에게 내밀었다. 세준의 눈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이거… 우리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그래. 우리가 처음으로 성공시켰던 AI 모듈 시제품이야.”
지훈의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세준은 어색하게 웃으며 기판을 받으려 했다.
“하하, 이걸 아직도 가지고 있었네. 추억이 새록새록…”
“세준아.”
지훈의 낮은 목소리가 세준의 말을 잘랐다. 세준은 움찔했다.
“네가 우리 회사를 파괴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 나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다는 것도.”
세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소리야? 지훈아, 너 요즘 너무 예민해진 것 같아. 오해야.”
“오해?”
지훈은 한 발자국 세준에게 다가섰다. 세준은 뒷걸음질 쳤다.
“네가 내 핵심 알고리즘을 훔쳐서 다른 회사에 팔아넘기려 했다는 것도 알아. 네 유령 회사로 투자금을 빼돌리려 했다는 것도, 나를 무능한 대표로 만들고 회사를 통째로 삼키려 했다는 것도, 전부 다 알고 있어.”
세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더 이상 변명할 여지를 찾지 못했다.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궁금해? 그럼 말해줄게.”
지훈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나는 네가 무슨 짓을 할지, 어떤 말을 할지, 심지어 어떤 표정을 지을지까지도 전부 알고 있어.”
세준의 눈빛에 공포가 서렸다.
“내가 너에게 속았을 때, 내 모든 것이 무너졌을 때, 나는 이 회로 기판을 떨어뜨렸어. 그리고… 과거로 돌아왔지.”
바람이 세차게 불어 지훈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이글거렸다.
“이전 생에서 너는 나를 철저히 짓밟고, 나의 모든 꿈을 빼앗아 갔어. 나는 지옥을 경험했지.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야. 이번에는 내가 너의 지옥을 설계할 차례다.”
세준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치다 옥상 난간에 부딪혔다.
“네가 훔치려던 그 ‘더미’ 알고리즘은 이미 치명적인 함정이 심어져 있어. 외부로 유출되는 순간, 그 모든 데이터는 나의 서버로 역추적되고, 그 책임은 고스란히 너에게 돌아갈 거야. 그리고 네가 빼돌리려던 투자금은 내가 미리 모두 다른 곳으로 옮겨놓았어. 이미 모든 투자자들은 네가 아닌 나를 신뢰하고 있고.”
세준의 얼굴은 절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무릎을 꿇고 지훈을 올려다봤다.
“지훈아… 제발…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줘. 내가 미쳤었나 봐. 내가 잘못했어!”
“용서?”
지훈은 세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나에게 ‘용서’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나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어. 너 때문에!”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분노와 고통, 그리고 해방감이 뒤섞여 터져 나왔다.
“이제 네 차례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네 이름이 모든 언론에서 비난받는 것을 지켜볼 거야. 네가 쌓아 올린 모든 명성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거다.”
세준은 울부짖었다.
“안 돼! 지훈아, 이러지 마! 내가 다 잘못했어! 내가 너에게 모든 걸 돌려줄게! 회사를 넘겨줄게!”
“너무 늦었어, 세준아.”
지훈은 싸늘하게 웃었다.
“이미 나의 복수는 시작됐고, 너는 내가 짠 각본 속의 주인공일 뿐이야.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 결말은 바뀌지 않아.”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단단한 얼음 같았다. 세준은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였다. 흐느끼는 소리가 바람에 실려 멀리 퍼져나갔다.
지훈은 세준의 비참한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옥상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그의 뒷모습은 더 이상 과거의 유약한 강지훈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무자비한 집념과, 지옥에서 돌아온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냉혹한 힘이 느껴졌다.
그의 손에 쥐어진 회로 기판은 여전히 차가웠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절망의 상징이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자, 완성된 복수의 서막을 알리는 승리의 표식이었다.
“강세준, 이제 네 인생의 막이 오를 시간이야. 내가 특별히 준비한, 가장 화려한 몰락의 막.”
지훈은 마지막 말을 남기며 옥상 문을 열고 사라졌다. 뒤에는 울부짖는 세준의 절규만이 남았다. 그의 새로운 각본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