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시 엡실론은 거대한 숨통이었다. 황폐해진 지표면 아래, 인류 최후의 보루. 수십만 명이 거주하는 이곳은 강철과 콘크리트, 그리고 복잡한 회로가 얽힌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았다. 하지만 오늘, 그 완벽해 보이던 시스템에 균열이 생겼다. 피로 물든 균열이.
경보음이 엡실론의 심장부를 울렸다. 심층 연구 구역, 그중에서도 최고 보안 등급을 자랑하는 생체공학 연구소. 김 박사의 개인 실험실에서 싸늘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도시 전체에 충격파를 던졌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보안 책임자 이한은 굳은 얼굴로 상황실 모니터를 노려봤다. 그의 옆에는 엡실론 자치 위원회 최 서기장이 불안한 눈빛으로 서 있었다. 모니터에는 김 박사의 실험실 내부가 비춰지고 있었다. 연구실은 완벽하게 밀봉되어 있었다. 모든 출입은 김 박사 본인의 생체 인식으로만 가능했고, 복도 CCTV에는 김 박사가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들어간 이후 아무도 접근한 흔적이 없었다. 창문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밀실 살인? 말도 안 돼. 자살이겠지. 충격적이지만… 방법이 그것밖에 없어.” 이한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독극물 같은 걸 스스로 주입했거나.”
최 서기장이 고개를 저었다. “그게 김 박사의 성격으로는 설명이 안 됩니다. 그는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었어요.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이었지. 게다가… 현장에 주사기나 독극물 용기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인도 불분명하고.”
“그럼 대체 누가, 어떻게 들어갔다는 겁니까! 유일한 문은 안에서 잠겼고, 김 박사 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는 기록이 명백한데!” 이한이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상황실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섰다. 엉클어진 머리카락, 며칠 밤샘이라도 한 듯한 흐릿한 눈빛, 축 늘어진 가죽 점퍼. 그의 등장에 이한의 미간이 더욱 깊어졌다.
“강진우 씨.” 최 서기장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진우는 대답 대신 나른한 눈으로 모니터를 한번 훑었다. “김 박사가 죽었다고요? 드디어 이 완벽한 도시에도 틈이 생겼군.” 그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비웃음이 섞여 있었다.
“틈이라니요!” 이한이 발끈했다. “우리 엡실론의 보안 시스템은 인류 최강입니다! 이건 외부 침입이 아닙니다. 내부의… 내부의 문제라고요.”
강진우는 이한을 흘긋 보더니 흥미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내부든 외부든, 결과는 같지 않나. 시신이 발견되었고, 범인은 보이지 않는다. 즉, 당신들의 시스템은 실패했다는 뜻.”
“강진우 씨!” 이한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강진우는 엡실론 최고의 천재로 불렸지만, 그만큼 사회성이 결여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면 풀 수 없는 미스터리들이 있었다. 김 박사의 죽음은 분명 그중 하나였다.
“현장으로 가죠.” 강진우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
김 박사의 실험실은 차가운 금속과 첨단 장비들로 가득했다. 유리병에는 알 수 없는 액체들이 담겨 있었고, 벽면의 모니터들은 끊임없이 데이터들을 띄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중심에, 김 박사가 자신의 작업대 위에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보시는 바와 같습니다.” 이한이 설명했다. “강화 합금 문입니다. 충격이나 열에도 끄떡없죠. 잠금장치는 김 박사의 생체 정보 외에는 인식하지 않습니다. 내부에서 잠긴 상태였고, 저희가 강제로 개방했습니다. CCTV 기록은 이미 확인했고, 통기구는 사람 한 명 들어갈 틈도 없습니다.”
강진우는 아무 말 없이 김 박사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는 장갑 낀 손으로 시신의 상태를 확인하는 대신, 주변 환경을 훑어봤다. 바닥의 먼지, 공기 순환구의 미세한 얼룩, 심지어 천장의 조명까지. 그의 시선은 흡사 스캔하듯이 움직였다.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강진우 씨, 이건 밀실 자살 외에는 다른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이한이 다시 한번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강진우는 시신 위로 몸을 숙였다. 김 박사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독극물이나 물리적 외상의 흔적은 없었다. 그는 손을 뻗어 김 박사의 넥타이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코를 가까이 댔다.
“무슨 냄새라도 납니까?” 최 서기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희미하게… 설탕 타는 냄새와, 젖은 흙 냄새가 섞여 있군요.” 강진우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오존 비슷한 역한 금속 냄새도.”
이한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설탕 타는 냄새요? 김 박사는 단 것을 좋아했지만, 그게 여기서 왜…?”
강진우는 대꾸 없이 작업대 모서리에 있는 작은 패널을 응시했다. 그것은 ‘물질 이동 모듈’이라 불리는 장치의 조작부였다. 외부의 위험 물질 샘플을 내부로 안전하게 이동시키거나, 폐기물을 외부로 배출하는 데 사용되는 장치였다. 마치 작은 자판기처럼 생겼지만, 그 안쪽은 여러 겹의 격벽으로 나뉘어 있었다.
“이 모듈은 누가 조작할 수 있죠?” 강진우가 물었다.
“김 박사 외엔 조작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물질 이동 기록은 중앙 서버에 저장되고, 담당자의 생체 인증이 필요하니까요.” 이한이 즉시 대답했다. “그리고 모듈은 오직 작은 샘플이나 폐기물만 운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드나듦은 불가능해요.”
강진우는 모듈의 외부 케이스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시선이 케이스 모서리의 거의 보이지 않는 긁힘에 멈췄다. 아주 미세한, 금속으로 긁힌 듯한 흔적. 일반적인 사용으로는 생기기 어려운 긁힘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꺼내 비췄다. 긁힘 안쪽에는 미세한 이물질이 끼어 있었다.
그는 옆에 서 있던 감식반 요원에게 작은 핀셋을 건네받았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이물질을 채취했다.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결과, 그것은 극미량의 특정 금속 가루였다.
“이 모듈의 물질 이동 기록을 전부 가져오세요.” 강진우가 말했다. “그리고 김 박사의 최근 식단 기록도.”
이한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최 서기장의 눈짓에 따라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김 박사의 식단 기록과 물질 이동 모듈의 로그 기록이 강진우의 태블릿으로 전송되었다.
강진우는 기록들을 훑어보다가 특정 날짜에서 멈췄다. 김 박사가 사망하기 정확히 이틀 전, 그리고 사망 당일 오전. 두 번에 걸쳐 이 모듈을 통해 ‘유기성 폐기물’이 배출되었다는 기록이 있었다. 평소 김 박사는 이런 종류의 폐기물을 자주 배출하지 않았다.
“김 박사는 단 것을 유독 즐겼다고 했죠?” 강진우가 이한을 향해 물었다.
“네, 주로 농축 에너지바나 설탕이 다량 함유된 음료를 마셨습니다. 그래서 당뇨 위험군으로 분류되기도 했었죠.”
“설탕 타는 냄새와 젖은 흙 냄새. 그리고 오존 비슷한 금속 냄새.” 강진우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다시 물질 이동 모듈로 향했다. “이 긁힘 안에 있던 금속 가루는 이 모듈의 내부와 일치하는군요. 마치… 외부에서 무언가를 강제로 끼워 넣으려다 생긴 자국 같습니다.”
이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지 않습니까? 이 모듈은 철저히 통제됩니다. 그리고 김 박사 외에는 조작 권한이 없고.”
강진우는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게 당신들이 착각하는 부분입니다. 이한 보안 책임자.”
그는 김 박사의 시신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그리고 실험실 천장 구석에 달린 작은 환기구를 바라봤다.
“이 밀실은… 밀실이 아닙니다.”
모두의 시선이 강진우에게 꽂혔다.
“이 방은.” 강진우는 마치 연극배우처럼 잠시 말을 끊었다. 그의 눈동자에 섬광이 스쳤다. “살인자와 피해자를 연결하는 통로였을 뿐이니까.”
이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빛에 당혹감과 함께 희미한 기대감이 스쳤다.
강진우는 다시 태블릿을 들었다.
“이 모듈의 완전한 설계도와 모든 외부 연결 통로의 정보를 가져오세요. 그리고…”
그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이한을 바라봤다.
“마지막으로 이 폐기물 처리 시스템을 조작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 알아보세요. 김 박사 본인의 생체 인증이 *필요 없는* 방법으로.”
그의 말은 엡실론의 완벽한 보안 시스템에 또 다른,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밀실은, 결코 완벽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