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폐한 도시의 잔해 위로 붉은 노을이 길게 드리워졌다. 지평선은 녹슨 칼날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폐허가 된 마천루들은 뼈대만 남은 거인의 시체처럼 앙상하게 서 있었다. 바람은 찢겨나간 간판 조각들을 흔들고, 모래와 먼지를 섞어 매캐한 비린내를 실어 날랐다. 카이는 무너진 고가도로 아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바닥을 짚으며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낡은 방독면이 그의 거친 숨소리를 겨우 걸러냈지만, 폐 깊숙이 스며드는 썩은 내는 막을 수 없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그의 중얼거림은 고요한 폐허 속에서 메아리쳤다. 등에는 낡은 배낭이, 허리춤에는 녹슨 단검과 닳아빠진 권총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눈은 피로에 찌들어 있었지만, 예리하게 주변을 탐색했다. 며칠째 식량도, 마실 물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에너지 바 한 조각을 아껴 먹은 지 이틀째. 목구멍은 사막처럼 말라붙어 있었고, 허기짐은 내장을 갉아먹는 벌레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는 오래된 지도 조각을 꺼내 들었다. 방사능에 오염되어 희미해진 글씨들 속에서 ‘구역 7-3, 식료품 창고’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실체는 없었다. 대부분의 창고는 이미 약탈당했거나, 아니면 알 수 없는 존재들에게 점거당해 있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 세상에서 희망은 가장 희귀한 자원이자, 가장 위험한 독이었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정적을 깨고, 멀리서 철근이 긁히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의 심장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일반적인 건물 붕괴 소리와는 달랐다.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르게.
그는 즉시 무너진 버스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방독면 아래로 그의 눈이 빛났다. 주변의 모든 소리에 귀 기울였다. 철근 긁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이 폐허의 밤을 지배하는 그림자들 중 하나였다. ‘어둠추적자’. 변이된 생물체 중에서도 가장 교활하고 잔인한 사냥꾼.
카이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탄약은 겨우 세 발. 마지막 남은 총알은 자신의 머리를 위해 아껴두어야 할지도 몰랐다. 망할. 이런 상황에서 마주치다니.
그때, 철근 소리가 멈췄다. 모든 것이 다시 침묵에 잠겼다. 하지만 카이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코 사라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사냥감을 지켜보고 있을 터였다.
그의 등 뒤, 허물어져가는 상점 건물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창문 너머로 그림자가 비쳤다. 어둠추적자였다. 거미처럼 기괴하게 굽은 다리와 날카로운 발톱, 어둠 속에 잠긴 형체가 그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카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호흡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권총을 단단히 쥐었다. 이럴 때는 숨어있다가 먼저 움직이는 쪽이 유리했다. 하지만 어둠추적자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카이의 존재를 확신한 듯, 움직임을 멈추고 창문 안쪽에서 그림자처럼 도사리고 있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몇 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허기가 고통으로 변하고, 갈증이 목을 찢는 듯했다. 그때, 상점 안에서 무언가가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어둠추적자가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는 마치 그 소리에 이끌린 듯, 창문 너머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안쪽으로 사라졌다.
“뭐지?”
카이는 의아했다. 어둠추적자가 사냥감을 눈앞에 두고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다니. 무언가 이상했다. 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버스 잔해 뒤에서 나와 상점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낡은 철문은 겨우 경첩에 매달려 있었다. 안쪽에서는 희미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는 단검을 뽑아 들고 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썩은 내와 함께 매캐한 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가 비치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상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폐지 더미와 낡은 선반이 뒤엉킨 곳에서, 어둠추적자가 거대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 앞에는 작은 그림자가 있었다. 어린아이였다. 낡은 천 조각으로 몸을 가리고, 한 손에는 녹슨 쇠 파이프를 든 채, 어둠추적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어린아이.
“크르르르…”
어둠추적자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아이는 겁에 질린 듯 몸을 떨었지만, 쇠 파이프를 놓지 않았다. 마치 길 잃은 새끼 고양이처럼 필사적으로 저항하려는 모습이었다. 아이의 눈은 분노와 공포, 그리고 결의로 이글거렸다.
카이는 순간 망설였다. 이런 폐허에서 어린아이를 만나는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대부분은 살아남지 못했다. 아이는 죽어가고 있었다. 어둠추적자가 먹잇감을 가지고 놀듯 서서히 조여오고 있었다.
그때, 아이가 기습적으로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쩌렁 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가 어둠추적자의 단단한 등껍질에 부딪혔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어둠추적자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다 넘어지고 말았다.
“젠장.”
카이는 무심코 욕설을 내뱉으며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대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폐지 더미를 발로 차며 어둠추적자에게로 돌진했다.
“이 빌어먹을 괴물아!”
그의 외침에 어둠추적자가 카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붉게 빛나는 눈이 그를 향해 섬뜩하게 빛났다. 카이는 망설이지 않고 단검을 휘둘렀다. 어둠추적자의 거친 피부에 단검이 닿았지만, 깊이 박히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발톱이 그를 향해 뻗어왔다.
카이는 겨우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어깨 부위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찢어진 옷 사이로 피가 스며 나왔다.
“크르르르!”
어둠추적자가 다시 카이를 향해 돌진했다. 그는 재빨리 권총을 뽑아 들었다. 탄약은 두 발. 아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었다. 그는 방아쇠를 당겼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총알이 어둠추적자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괴물이 비틀거렸다.
그 순간,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아이가 필사적으로 기어가 주워든 돌멩이를 어둠추적자의 눈에 힘껏 던졌다. 작은 돌멩이는 정확히 어둠추적자의 붉은 눈에 명중했고, 괴물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며 몸을 크게 움찔거렸다.
카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다시 단검을 들고 괴물의 옆구리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꾸억!’ 하는 소리와 함께 어둠추적자의 몸이 경련했다. 괴물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축 늘어진 몸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왔다.
정적이 흘렀다. 거친 숨소리가 상점 안을 가득 채웠다. 카이는 피 묻은 단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아이를 보았다. 아이는 창백한 얼굴로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카이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거칠었다.
아이는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바닥에 떨어진 녹슨 쇠 파이프를 다시 주워 들었다.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카이를 응시했다.
“너… 누구야.” 아이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카이는 한숨을 쉬었다. “사냥꾼. 아니, 스캐빈저. 너처럼 살아남으려고 애쓰는 사람.” 그는 어깨의 상처를 움켜쥐었다.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혼자인가?”
아이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렐라. 혼자야. 먹을 거 찾고 있었어.” 그녀의 시선은 쓰러진 어둠추적자를 훑었다. “그리고… 저걸 피하고 있었어.”
카이는 렐라를 찬찬히 훑어보았다. 마른 몸이었지만, 눈빛은 강렬했다. 이런 지옥에서 혼자 살아남았다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작은 조약돌 하나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여기… 먹을 건 없어.” 카이가 말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곳이 있어. 폐허의 경계 쪽에 버려진 건물. 거기라면 임시로 숨을 곳을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운이 좋으면… 약간의 식량을 찾을 수도 있고.”
렐라는 망설였다. 그녀의 작은 손이 쇠 파이프를 더 꽉 쥐었다. “널 믿을 수 있을까?”
카이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 세상에선 아무도 믿을 수 없어.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우리가 서로에게 가장 덜 위험한 존재일 거야. 방금 저 괴물이 우리 둘을 죽일 뻔했잖아.”
렐라는 그의 말에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불안이 가득했지만, 희미한 희망의 빛도 엿보였다.
“어디로 갈 건데?” 그녀가 다시 물었다.
“이 구역의 북쪽. 오래된 지하철역 잔해 근처야. 위험하겠지만, 여기보다는 나을 거야.” 카이가 쓰러진 어둠추적자에게서 단검을 뽑아냈다. “피할 곳을 찾아야 해. 밤은 아직 길고, 저런 것들이 또 나타날 테니까.”
렐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하지만… 내 뒤에서 이상한 짓 하면, 널 죽일 거야.” 그녀의 작은 눈에서 단호한 의지가 뿜어져 나왔다.
카이는 픽 하고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꼬마.”
폐허의 밤은 여전히 차갑고 잔인했다. 하지만 작은 희망의 불꽃이, 두 명의 생존자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서로를 믿지 못하면서도, 서로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이 잔혹한 세상에서, 그들의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