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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의 잔해 (忘却의 殘骸) – 제 8화: 지옥의 설계도

“이진우, 미쳤구나.”

그 말은 이명처럼 귓가에 박혀 있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 속에서, 나는 그 미소를 똑똑히 보았다. 김민준. 내 모든 것을 짓밟고 올라선, 내 가장 친한 친구.

차오르는 신물을 억누르며, 나는 서늘한 눈빛으로 건너편 건물의 최상층 창문을 응시했다. 밤하늘을 찢고 솟아오른 거대한 유리 건물. 저곳의 펜트하우스 오피스에서, 김민준은 지금쯤 편안하게 와인을 기울이고 있을 터였다.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를 손에 쥐고, 과거의 자신을 망각한 채.

*망각? 아니, 민준이 잊은 건 내가 아니라 지옥일 거야.*

내 손에 들린 태블릿 화면 속에는 정교하게 짜인 건설 현장 도면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심에는 새롭게 들어설 고층 빌딩의 조감도가 선명했다. 이름하여 ‘엠파이어 타워’. 김민준이 전 재산을 쏟아붓고 모든 인맥을 동원해 추진하는, 그의 제국을 상징하는 역작.

“실장님, 보고드립니다.”

조용히 다가온 비서, 박미선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피곤함이 섞여 있었지만, 내 앞에서는 언제나 완벽한 프로였다. 박미선은 내가 이 회사에 들어온 지 반 년 만에, 모든 직원들 위에 군림하게 된 이유를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다. 나는 박미선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말해.”

“엠파이어 타워 22층에 들어설 클라우드 서버실, 구조 변경 요청건이 접수되었습니다. 김민준 대표님 직인이 찍혀 내려왔습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입꼬리를 감추지 않고, 나는 태블릿 화면의 특정 부분을 확대했다. 클라우드 서버실. 그의 모든 사업의 핵심 정보가 저장될 심장부. 그곳의 구조 변경이라니, 김민준답지 않게 꽤나 성급한 움직임이었다.

“무슨 내용이지?” 내가 물었다.

박미선은 파일을 열어 보여주었다. “기존의 보안 프로토콜을 강화하고, 통신망을 이원화하는 방안입니다. 외부 접근을 더욱 철저히 차단하려는 의도 같습니다.”

나는 화면을 천천히 훑어 내려갔다. ‘외부 접근 차단’. 그래, 김민준은 언제나 자신의 비밀을 철저히 지키려 했지. 그 비밀이 결국 나를 파멸로 이끌었을지라도. 이 모든 것이 마치 데자뷔처럼 느껴졌다. 과거의 나, 어리숙했던 이진우는 김민준의 그런 치밀함에 감탄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이제 나는 그 치밀함의 맹점을 꿰뚫고 있었다.

“어떤 전문가가 검토했나?”

“이번 변경 건은 김 대표님이 직접 선정하신 ‘네트워크 보안 컨설팅’의 박성진 이사가 담당했습니다. 현재 업계에서 가장 신뢰받는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박성진. 과거, 김민준이 가장 신뢰했던, 그리고 가장 약점을 많이 잡고 있던 남자. 그때와 똑같았다. 김민준은 언제나 주변 사람들을 완벽하게 통제하려 들었다. 아니, 통제하는 *척* 했다.

“좋아.” 나는 태블릿을 닫았다. “박 이사에게 연락해서, 내일 아침에 보자고 해. 엠파이어 타워 22층 도면도 함께 가져오라고.”

박미선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김민준이 직접 진행하는 일에 내가 개입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실장님.”

그녀가 물러나자, 나는 다시 창밖의 ‘엠파이어 타워’를 바라보았다. 저 높이 솟은 건물은 김민준의 성공을 상징하는 기념비이자, 동시에 그의 오만함을 드러내는 표식이었다. 그리고 이제, 저곳은 그가 몰락할 무대가 될 터였다.

나는 손을 뻗어 창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차가운 유리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불과 몇 년 전, 나는 저 아래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사람에게 외면당한 채.* 그날의 냉기와 절망이 다시금 심장을 옥죄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었다. 나는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고, 미래를 미리 엿본 자였다. 김민준은 내가 죽은 줄 알았을 것이다. 그 폐허 속에서 내가 살아남아 돌아올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복수는 차갑게 식혀 먹어야 한다던가? 글쎄, 나는 지옥불보다 뜨거운 복수를 준비했다.*

내일 박성진 이사를 만나면, 김민준이 얼마나 얇은 얼음 위를 걷고 있는지 깨닫게 될 것이다. 그의 완벽한 보안 시스템은 내 손바닥 안이었다. 과거의 지식과 현재의 기술,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다는 압도적인 정보력. 이 모든 것을 활용해, 나는 김민준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을 설계도를 완성할 참이었다.

다음 날 아침, 약속 시간 정각에 박성진 이사가 내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있었지만, 눈빛은 불안정했다. 김민준이 신뢰하는 인물이라기엔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태도였다.

“안녕하십니까, 이진우 실장님. 박성진입니다.” 그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앉으시죠, 박 이사님.” 나는 그의 맞은편 의자를 가리켰다. “김 대표님께선 이 일에 대해 저에게 일임하셨습니다.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제가 직접 보고를 받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내 말에 박성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김민준이 맡긴 일에 내가 개입한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가져온 서류 가방을 열었다.

“네, 알겠습니다. 엠파이어 타워 22층, 클라우드 서버실의 보안 강화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드리겠습니다.”

박성진은 테이블 위에 도면을 펼쳤다. 그의 손가락이 특정 부분을 짚어갔다. “기존의 백업 서버는… 이쪽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대표님의 지시로, 이 부분을 철거하고 새로운 고성능 서버를 설치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 서버실로 들어오는 모든 통신망은 이중 암호화되어 외부와 완전히 분리될 것입니다.”

나는 말없이 도면을 응시했다. 박성진의 목소리는 자신감에 차 있었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서 다른 것을 읽었다. 조급함. 두려움.

“박 이사님.” 내가 나직하게 불렀다.

그의 설명이 잠시 멈췄다. “네, 실장님.”

“이 도면, 꽤 복잡하네요.” 나는 펜을 들어 도면의 한 구석을 가리켰다. “이곳에 설치될 방화벽 시스템은 어느 회사 제품을 쓰실 예정이십니까? 그리고 이 통신망의 주요 라우터는 어디를 경유하게 됩니까?”

내 질문에 박성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가 설명하지 않은, 혹은 설명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었다.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 그 부분은 아직 최종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김 대표님께서 직접 검토 중이십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나.*

“그럼 박 이사님은 현재까지의 설계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보안에 어떤 맹점도 없다고 확신하십니까?”

박성진은 말문이 막혔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김민준의 그림자 아래에서 일하는 인물이었다. 완벽한 보안 시스템을 설계했다고 자부하겠지만, 결국 김민준의 압력 아래에서는 특정 약점을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에도 그랬으니까.

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팔짱을 꼈다. “박 이사님, 김 대표님은 완벽을 추구하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완벽이라는 건, 때로는 가장 큰 허점이 되기도 하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이 도면을 보니, 몇 년 전 김 대표님께서 진행하셨던 ‘넥서스 프로젝트’가 떠오르는군요.”

‘넥서스 프로젝트’라는 말에 박성진의 얼굴은 완전히 창백해졌다. 넥서스 프로젝트는 김민준이 무명 시절, 불법적인 방법으로 경쟁사의 기술을 빼돌리려 했던 사건이었다. 박성진은 그때 김민준의 지시로 그 프로젝트의 보안 시스템을 설계했던 인물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프로젝트의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 그 일로 김민준은 나를 철저히 이용하고 버렸었다.

“넥서스 프로젝트 당시, 박 이사님께서는 특정 백도어를 만드셨죠. 비상시를 대비한 ‘관리자 전용’ 출입구라고 설명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박성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내 말은 그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는 비수였다.

“실, 실장님… 그건 오래전 일이고… 저는….”

“오래전 일이라고요? 아닙니다, 박 이사님. 김 대표님은 결코 변하지 않았습니다.” 내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았다. “이번 엠파이어 타워 서버실 도면에도, 넥서스 프로젝트와 유사한 흔적들이 보입니다. 아니, 어쩌면 더 교묘해진 것 같군요.”

나는 박성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김 대표님은 박 이사님을 신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늘 당신의 약점을 쥐고 흔들었을 겁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겠죠. 그가 당신을 통해 완벽한 보안을 구축하는 척하며, 실제로는 그 완벽함 뒤에 또 다른 자신의 길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박성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내가 던진 말들이 모두 사실이라는 증거였다.

“저는 김 대표님의 ‘완벽한 보안’을 돕고 싶습니다.” 나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박 이사님께서 만드신 모든 ‘꼼수’를 제가 알아야 합니다. 모든 백도어, 모든 우회 경로, 모든 취약점.”

나는 테이블 위 도면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이 엠파이어 타워 서버실, 김 대표님에게는 제국을 지탱하는 심장이겠죠. 하지만 동시에, 가장 취약한 목덜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박성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미묘한 희망 같은 것이 비쳤다. 그는 나와 김민준 사이의 알 수 없는 긴장감을 감지한 듯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자신의 살길을 찾으려 하는, 나약하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실장님… 뭘 원하십니까…?” 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는 미소 지었다. 내 안의 악마가 그 미소 뒤에서 기지개를 켰다.

“뭘 원하냐고요? 박 이사님은 그저, 제가 원하는 정보를 정확히 알려주시면 됩니다. 그리고… 김 대표님께는 아무것도 보고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든 것을 직접 검토하고 승인할 테니까요.”

내 눈빛은 칼날처럼 번뜩였다. “혹시라도, 박 이사님께서 다른 생각을 하신다면… 넥서스 프로젝트 당시, 김 대표님께서 박 이사님의 어떤 약점을 쥐고 계셨는지… 세상 사람들도 알게 될 겁니다.”

박성진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그는 완전히 굴복했다.

나는 테이블 위 도면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김민준. 너는 네가 쌓아 올린 제국이 얼마나 견고하다고 생각할까? 하지만 그 제국은 이미 썩어가는 기둥 위에 서 있을 뿐이다. 네가 가장 신뢰하는 자들부터, 가장 완벽하다고 믿는 시스템까지. 모든 것은 내 손 안에서 다시 조작될 것이다.

*지옥은, 내가 직접 설계한다.*

창밖으로 엠파이어 타워가 솟아 있었다. 나는 그 타워의 꼭대기를 향해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시작이다. 너의 모든 것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빼앗아갔던 그날처럼, 내가 너의 모든 것을 파괴할 시간이다. 김민준, 네가 다시 만난 이진우는, 예전의 바보가 아니다.

나는 내 손에 들린 태블릿을 쥐었다. 그 안에는 김민준의 제국을 무너뜨릴 완벽한 설계도가,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딘 채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