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도시 한성, 밤은 차가운 기계음과 가스등의 희미한 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대한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 증기 기관이 내뿜는 묵직한 숨결, 그리고 하늘을 수놓은 비행선들의 규칙적인 운행 소리가 도시의 자장가였다. 강철과 황동으로 지어진 고층 빌딩들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 거대한 태엽 장치가 달린 천공궁은 한성 산업의 제왕, 강태산의 거처였다.
그날 밤, 천공궁의 최상층 서재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묵직한 강철문이 굉음과 함께 닫히는 소리는 없었으나, 곧 들이닥친 경비원들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강태산의 서재, 그 견고한 밀실은 굳게 닫혀 있었다. 두꺼운 황동 패널로 봉인된 창문들, 외부에서는 열 수 없는 육중한 강철문은 안쪽에서 걸쇠가 단단히 잠겨 있었다. 강태산은 그의 작업용 책상에 엎드린 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그의 등에는 특이하게 조각된 황동 편지 칼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불가능합니다! 이 문은 안에서만 잠글 수 있습니다!” 경위 이한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외쳤다. 그의 얼굴은 혼란과 경악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창문은 모두 봉인되어 있고, 환기 통로도 사람 하나 빠져나갈 틈이 없습니다. 도대체 범인은 어떻게 이 밀실을 빠져나갔단 말입니까?!”
그때였다. 이한 경위의 뒤에서 묵묵히 서재 안을 살피던 한 남자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류진, 사람들은 그를 ‘증기의 현자’라 불렀다. 낡았지만 잘 관리된 트렌치코트 차림에, 한쪽 눈에는 섬세한 황동 기어가 박힌 특제 단안경을 걸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은 늘 조그마한 태엽 장치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경위님.” 류진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는 서재의 구석구석을 훑어보는 대신, 천천히 증기압 게이지와 벽에 박힌 공기 정화 시스템의 작은 환기구를 응시했다. “진정으로 불가능한 사건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직 그 기계 장치를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지요.”
이한 경위는 답답한 듯 류진을 바라보았다. “기계 장치라니요? 지금은 기계를 논할 때가 아닙니다! 명백한 살인 사건입니다!”
“바로 그 기계 장치들이 사건의 열쇠입니다.” 류진은 피식 웃으며 강태산의 시신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희생자의 등에서 황동 편지 칼을 조심스럽게 뽑아 들었다. 칼날에는 미세한 흠집 하나 없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었다. “범인은 이 방을 나갈 때, 기계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것도 피해자, 강태산 씨 본인이 만들어낸 기계의 도움을요.”
서재 안은 비싼 목재와 황동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고, 강태산의 취향을 반영하듯 각종 정교한 태엽 장치와 미니 증기 기관 모델들이 선반에 진열되어 있었다. 류진은 그 중 하나의 모델을 집어 들었다. 작은 증기 보일러와 연동된 톱니바퀴들이 돌아가는 모습이 실제처럼 정교했다.
“강태산 씨는 자신의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죠. 특히 이 천공궁의 보안 시스템은 그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것이라 들었습니다.” 류진은 서재 입구의 육중한 강철문을 손으로 쓸어보았다. “이 문은 강한 외부 충격에도 견딜 수 있도록 제작되었고, 안쪽의 황동 레버를 통해 여러 개의 볼트가 동시에 잠기도록 되어 있습니다. 외부에서는 절대로 열 수 없죠. 하지만, 이 문에는 알려지지 않은 ‘틈’이 존재합니다.”
이한 경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틈이라니요? 저희가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완벽한 밀폐였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틈이 아닙니다.” 류진은 단안경을 조정하며 서재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이 서재는 외부 공기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철저히 밀폐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호흡해야 하니, 강태산 씨는 자신만의 특수한 공기 정화 시스템을 설치했습니다. 이 시스템은 주기적으로 증기압을 이용해 서재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키고 외부의 신선한 공기를 미세 필터를 거쳐 들여옵니다.”
그는 천장 구석에 거의 보이지 않는 작은 환기구를 가리켰다. “저 환기구는 공기만 드나드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작고, 아주 정교한 ‘무언가’가 드나들 수 있는 통로이기도 하죠.”
류진은 다시 강태산의 시신으로 시선을 돌렸다. “범인은 강태산 씨와 이 서재에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살해했죠. 그 후, 범인은 어떻게 이 밀실을 빠져나갔을까요? 문을 열고 나갔다면, 문은 잠겨 있지 않았어야 합니다. 하지만 문은 안에서 완벽히 잠겨 있었죠.”
“그렇다면 범인은 순간이동이라도 했단 말입니까?” 이한 경위가 비꼬듯이 말했다.
“아니요, 아주 과학적인 방법을 썼습니다.” 류진은 강태산의 시신 옆, 책상 모서리에 박힌 황동 핀 하나를 가리켰다. 마치 장식용 핀처럼 보였지만, 류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강태산 씨는 자신의 서재 보안을 위해 ‘이중 잠금’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평소에는 이 거대한 황동 레버로 문을 잠그지만, 비상시에는 이 책상 모서리의 핀을 누르면, 서재 천장에 숨겨진 또 다른 잠금 장치가 작동하도록 설계했습니다.”
이한 경위는 놀란 눈으로 핀을 바라보았다. “그런 장치가 있었단 말입니까?”
“네. 하지만 그 장치는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 범인이 도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장치는 아니었습니다.” 류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강태산 씨의 진짜 비밀은 이 천공궁의 심장부, 바로 증기 보일러실에 있었습니다. 이 서재의 공기 정화 시스템은 보일러실의 특정 증기 파이프와 연결되어 있었고, 그 파이프는 미세한 압력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었죠.”
그는 서재 벽에 걸린 증기압 게이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렸다. “이 게이지는 아주 미세한 압력 변화도 기록합니다. 오늘 밤 10시 3분 12초, 강태산 씨가 살해된 직후, 이곳의 증기압이 미세하게, 그리고 비정상적으로 상승했다가 다시 하락했습니다. 이는 평소의 공기 순환 주기와는 달랐습니다.”
이한 경위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그것이 살인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범인은 강태산 씨를 살해한 후, 이 서재를 나갔습니다. 그리고 문을 닫았죠. 그 문은 아직 안에서 잠겨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범인은 자신이 나간 후, 문이 ‘안에서 잠기도록’ 만들었습니다.” 류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범인은 아주 작은, 특수한 ‘증기동력 자물쇠봇’을 서재 안에 남겨두었습니다. 이 로봇은 평소에는 천장 환기구 안에 숨겨져 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서재의 복잡한 장식품 중 하나로 위장했거나.”
“자물쇠봇…?”
“네. 그 자물쇠봇은 특정 증기압 변화에 반응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 있었습니다.” 류진은 설명했다. “범인은 서재를 나간 직후, 외부에서 천공궁의 증기 보일러실에 접근해 특정 파이프의 압력을 순간적으로 조작했습니다. 아주 미세한, 하지만 자물쇠봇에게는 확실한 신호가 될 만한 압력 변화였습니다. 이 압력 변화는 천장 환기구를 통해 서재 내부로 전달되었고, 숨어있던 자물쇠봇을 활성화시켰습니다.”
류진은 손으로 허공에 자물쇠봇이 움직이는 동선을 그려 보였다. “활성화된 자물쇠봇은 천천히 움직여 서재문의 안쪽 잠금 레버로 향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황동 팔로 레버를 힘껏 밀어 모든 볼트를 잠근 것이지요. 그 후 자물쇠봇은 다시 환기구로 숨어들어 원래 위치로 돌아가거나, 혹은 스스로 자폭하여 흔적을 지웠을 겁니다. 그래서 서재는 완벽한 밀실처럼 보였던 겁니다.”
이한 경위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그런 기계가 가능했단 말입니까?”
“강태산 씨는 그런 기계를 만들 수 있는 천재였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그 천재의 지식을 이용한 것이죠.” 류진은 마지막으로 책상 위, 희생자가 마지막으로 만졌던 듯한 종이 한 장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강태산의 흘려 쓴 필체로 몇 개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숫자는 천공궁 보일러실의 특정 파이프, 그리고 그 파이프의 압력 조절 밸브 번호입니다. 강태산 씨는 마지막 순간, 자신을 죽인 범인이 어떤 트릭을 사용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범인이 자신에게 살인 기술을 가르쳐준 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겁니다.”
“제자요?” 이한 경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오직 강태산 씨만이 알 수 있는, 천공궁 보일러실 내부의 은밀한 구조와 압력 조절 밸브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 테니까요.” 류진은 편지 칼을 다시 내려놓았다. “범인은 이 칼에 묻은 아주 미세한 기름 자국을 지우지 못했습니다. 이 기름은 강태산 씨의 특제 증기기관 윤활유가 아닙니다. 범인이 늘 자신의 태엽 장치에 사용하던, 아주 특이한 향이 나는 ‘장미향 윤활유’이죠.”
이한 경위는 경악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류진은 침착하게 단안경을 벗으며 말했다.
“이제 누구를 찾아야 할지 아시겠지요, 경위님? 강태산 씨의 수제자이자, 그의 기술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던 유일한 사람. 한성 기계 공학 학회의 가장 촉망받는 신예, 민도준을 찾아야 할 겁니다.”
증기도시 한성의 밤은 여전히 기계음으로 가득했지만, 그 소리들은 이제 류진의 날카로운 추론과 함께 또 다른 진실의 메아리가 되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밀실의 비밀은 결국 기계의 언어로 풀린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