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도심의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들이 뼈대만 앙상하게 드러낸 채 흉물스럽게 서 있었다. 콘크리트 잔해와 뒤엉킨 잡초들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거리를 뒤덮었고, 그 위로 언제나처럼 놈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깔려 있었다. 지혁은 망원경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저쪽도 별반 다르지 않네.”
옆에 앉아 지도에 꼼꼼히 표시를 하던 아영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빛은 피곤에 절어 있었지만, 여전히 날카로운 지성을 담고 있었다.
“어딘들 다르겠어? 지난 사흘 동안 찾은 거라곤 썩은 통조림 두 개랑 녹슨 나이프가 전부였잖아.”
그들의 은신처는 낡은 도서관의 옥상이었다. 한때 지식의 보고였을 이곳은 이제 먼지와 찢어진 책장, 그리고 언제나 달려들 준비가 된 망자들의 냄새로 가득했다. 식량은 바닥을 드러냈고, 연료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이곳에 머물면 굶어 죽거나, 놈들의 먹이가 될 뿐이었다.
“더 이상은 무리야. 움직여야 해.” 지혁의 목소리에는 결연함이 묻어났다.
“어디로?” 아영이 지도를 펼치며 물었다. “남쪽은 놈들의 밀집도가 너무 높아. 동쪽은 이미 여러 번 훑었고, 서쪽은 강이 막고 있어. 북쪽… 북쪽 산악지대 외엔 딱히 갈 곳이 없어.”
북쪽 산악지대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고층 건물도, 상점도 없는 그곳에 놈들이 얼마나 서식할지는 예측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인간의 발길이 뜸했던 만큼 뜻밖의 생존 물품이나 은신처를 찾을 수도 있었다.
“그래, 북쪽. 어차피 이대로 있다간 죽어. 산이라면 적어도 물이라도 찾을 수 있을 거야.”
다음날 새벽, 그들은 짐을 꾸려 도서관을 떠났다. 찢어진 배낭에는 남아있는 총알 몇 발과 한 병 남은 물, 그리고 아영이 목숨처럼 챙기는 낡은 역사서 몇 권이 전부였다. 잿빛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놈들의 얕은 신음소리가 숲으로 향하는 길목에서부터 그들을 따라붙는 듯했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놈들이 드문드문 나타났지만, 숲의 우거진 수풀은 그들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지혁은 능숙하게 놈들을 피해 달아나거나, 최소한의 소음으로 처리하며 아영을 이끌었다. 며칠 밤낮을 걸어 깊은 산속으로 들어서자, 인적 없는 고요함이 그들을 감쌌다. 놈들의 소음도, 도시의 폐허도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봐, 저기 봐.”
땀으로 얼룩진 얼굴의 아영이 갑자기 멈춰 서서 나뭇가지 사이를 가리켰다. 지혁이 시선을 돌리자,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희미하게 인공적인 구조물의 윤곽이 드러났다. 돌계단과 기와지붕… 너무나도 오래되어 흙과 이끼로 뒤덮여 있었지만, 분명히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었다.
“절인가… 폐사지인가 보네.” 지혁이 중얼거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더욱 분명해졌다. 수백 년은 족히 넘었을 법한 낡은 돌담은 무너지고 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지만, 그 너머로 언뜻 보이는 법당의 모습은 여전히 웅장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곳은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은, 완전히 잊힌 곳이었다.
조심스럽게 폐사지로 들어선 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main 법당은 천장이 무너져 내렸지만, 안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암자는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스쳤다.
“혹시… 뭔가 건질 게 있을까?” 지혁이 희미한 희망을 품고 말했다.
“글쎄… 이 정도 깊은 산속이라면, 놈들도 쉽게 접근하진 않았을 테고.” 아영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암자 안으로 들어서자, 어두컴컴한 공간에 낡은 불상 하나가 먼지에 쌓인 채 놓여 있었다. 불상 앞에는 얇은 나무 문이 있었는데, 오랜 시간에도 불구하고 굳게 닫혀 있었다. 아영이 호기심에 가득 찬 눈으로 문을 살폈다.
“이봐, 여기 뭔가 있어.”
그녀가 낡은 나무 문에 손을 대자, 문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살짝 밀렸다. 좁고 어두운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혁은 경계하며 총을 움켜쥐었지만, 안쪽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혁아, 여기… 뭔가 심상치 않아.”
아영이 통로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자, 그의 뒤를 따르던 지혁의 시야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통로 끝에는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는 낡은 석탑이 중앙에 서 있었고, 벽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끼와 습기가 가득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석탑 주위 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문양만이 마치 어제 그려진 듯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푸른빛과 금빛이 섞인 오묘한 빛이었다.
“이게 뭐야…?” 지혁이 경외심에 사로잡혀 중얼거렸다.
“상형문자 같아… 단군 신화에 나오는 천부인(天符印)을 형상화한 것 같기도 하고…” 아영은 흥분한 목소리로 벽면의 문자를 더듬었다. 그녀의 눈은 이미 역사학자의 눈으로 번뜩이고 있었다. “여긴… 단순히 절이 아니었어. 뭔가 봉인된 곳이었던 것 같아!”
그 순간, 멀리서 놈들의 끔찍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아마도 그들이 이곳에 오면서 남긴 발자국을 놈들이 추격해 온 모양이었다.
“젠장! 놈들이 여기까지 온다고?” 지혁이 다급히 외쳤다.
입구 쪽에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며 놈들의 역겨운 악취가 풍겨왔다. 수십 마리는 족히 되어 보이는 놈들이 통로를 가득 채우고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없었다. 지혁은 총을 들어 조준했지만, 한두 마리를 잡는다고 해서 저 거대한 무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절망감이 그의 심장을 옥죄어왔다.
“지혁아, 저 석탑!” 아영이 갑자기 석탑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문양! 뭔가… 느껴져!”
그녀의 말에 지혁은 홀린 듯 석탑을 바라보았다. 빛나는 문양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놈들이 코앞까지 다가와 침을 흘리며 달려들기 직전이었다. 지혁은 망설일 틈도 없이, 아영을 보호하려는 본능적인 충동에 휩싸여 석탑의 가장 빛나는 부분에 손을 얹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감촉.
그 순간,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거대한 에너지가 솟구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릿속에서는 고대의 언어 같은 것이 메아리쳤다. 눈앞의 빛나는 문양이 그의 시야를 가득 채웠다.
“흐읍…!”
지혁의 몸에서 폭발적인 푸른빛이 터져 나왔다. 빛은 석탑을 중심으로 돔 형태를 이루며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놈들이 그 빛에 닿자마자 기괴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밀려났다. 어떤 놈들은 몸이 순식간에 재로 변하며 사라져 버렸고, 어떤 놈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틀거렸다.
“이게… 뭐야?” 지혁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끝에서 여전히 희미한 푸른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의 몸은 순식간에 탈진해 휘청거렸지만, 놈들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대의 힘… 신비의 힘이야!” 아영의 목소리에는 놀라움과 흥분이 뒤섞여 있었다. “문헌에만 전해지던 ‘영혼의 방패’… 영적인 기운으로 사악한 것을 정화하는 힘! 지혁아, 네가 그걸 각성시킨 거야!”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믿기지 않았다. 놈들은 감히 빛의 장벽을 넘어오지 못하고,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막힌 듯 허둥대고 있었다. 지혁은 빛의 힘이 그의 몸을 깎아내고 있음을 느꼈지만, 동시에 생존의 희망을 보았다.
그는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아영을 바라보았다. 아영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빛나고 있었다.
“우리… 이걸 이용할 수 있을 거야. 놈들을 막고, 살아남을 수 있어!”
어둠으로 물든 세상에 한 줄기 고대의 빛이 내려앉은 순간이었다.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는 예감. 절망 속에서 발견한 숨겨진 힘이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듯했다. 지혁은 아직 이 힘의 정체와 사용법을 완전히 알지 못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나약한 먹잇감이 아니었다. 이 미지의 힘이야말로 이 잔혹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은 직감하고 있었다.
지친 몸을 이끌고 빛의 장벽 안에서 주저앉은 지혁은, 자신의 손에서 일렁이는 푸른빛을 응시했다. 석탑의 고대 문양이 그의 망막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지옥이었지만, 그 지옥 한가운데서 그들은 예상치 못한 ‘구원’을 찾아낸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들은 이 고대의 힘을 이해하고, 제어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운명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