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기운이 폐부를 꿰뚫었다. 영혼의 숲 깊숙한 곳,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는다는 태고의 샘터 옆 작은 석실. 이현은 설화를 품에 안고 굳게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을 에워싼 기운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었다. 족히 수십 명은 되는 청운문(靑雲門)의 정예 선인들이 자신들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현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석실의 입구를 향하고 있었다.
“괜찮아?” 이현이 낮게 속삭였다.
설화의 흰 뺨에 작은 상처가 붉은 선을 그었다. 지난밤, 급박한 도주 속에서 숲의 맹수가 휘두른 발톱에 스친 상처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이현의 품에 더욱 파고들었다. 그녀의 은발이 이현의 도포 위에 부드럽게 흩어졌다.
“나는 괜찮아. 다만… 네가 걱정될 뿐.” 설화의 목소리는 숲의 샘물처럼 맑았지만, 그 안에는 깊은 근심이 배어 있었다. “저들이 원하는 건 나야. 류 이현. 너는 돌아가야 해. 너의 자리는 저 밖, 청운문의 긍지 속에 있어.”
이현은 설화의 턱을 들어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밤하늘의 별을 닮은 검은 눈동자에는 흔들림 없는 결의가 담겨 있었다. “내가 없는 청운문은 의미 없어. 네가 없는 내 삶 또한 무의미하고.”
그의 손이 설화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그들의 온기는 서로에게 닿아 뜨겁게 타올랐다. 종족을 초월한 사랑, 인간과 요괴의 금지된 연정은 이 세상의 어떤 잣대로도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 어떤 금기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밖에서 흙먼지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영력을 끌어모아 바닥을 박차고 날아오르는 선인들의 움직임. 곧 석실의 입구가 위협적인 기운으로 물들었다.
“류 이현! 안에 있는 걸 안다! 지금 당장 그 요녀를 내놓고 투항하라!”
사령관 무월의 목소리가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냉기가 서린 그의 목소리는 수련에 대한 광적인 집념과 요괴에 대한 맹목적인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월은 이현의 스승이자, 청운문에서 가장 강경하게 요괴 척결을 주장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래전 가족을 요괴에게 잃고 그 복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사내였다.
이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스승의 목소리. 그가 평생을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의 목소리가 자신에게 칼날을 겨누고 있었다.
“스승님…” 이현은 작게 읊조렸다.
설화는 이현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어떤 불안도 담겨 있지 않았다. “이현, 나의 진정한 모습을 보면… 그들은 더 맹렬히 달려들 거야.”
“알고 있어.” 이현은 설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네가 더 이상 다치는 꼴은 볼 수 없어.”
그의 눈빛이 돌변했다. 더 이상 온화한 청운문의 천재 도련님이 아니었다. 지금 이현은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한 한 명의 전사였다.
밖에서 굉음이 터져 나왔다. 석실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나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렬한 영력의 파동이 석실 내부로 들이닥쳤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무월 사령관과 그를 따르는 수십 명의 선인들이었다. 그들의 도포는 바람에 휘날렸고, 얼굴에는 결연한 표정이 서려 있었다. 특히 무월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이현과 설화를 향해 타올랐다.
“이현아! 감히 요물에게 홀려 선문(仙門)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당장 그 자리에서 물러서라!” 무월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렸다.
이현은 설화의 앞에 나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푸른 영기가 검날을 휘감으며 날카로운 빛을 뿜었다. “스승님. 제게는 이분이 세상의 어떤 명예보다 소중합니다.”
“헛된 망상이다! 저 요물은 너의 영력을 취하려 너를 유혹하는 것뿐!” 무월은 이현의 말을 비웃듯 차갑게 내뱉었다. “요괴는 요괴일 뿐. 그 어떤 선량함도 거짓이다!”
이현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검날에서 영기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물러서라, 이현.” 설화가 이현의 뒤에서 조용히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거대한 힘이 응축되어 있었다.
무월은 그 목소리에 흠칫하며 설화를 노려봤다. “요물이 감히 인간의 목소리를 내는구나! 본색을 드러내라!”
설화는 이현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자신의 뒤로 밀었다. “이제는 내가 너를 지킬 차례야.”
이현이 놀라 설화를 바라봤다. 그녀의 눈동자가 서서히 붉은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길게 늘어뜨린 은발이 더욱 빛을 발하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 뒤에 숨겨진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멈춰라, 설화!” 이현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녀가 완전히 본 모습을 드러내면, 이 숲 전체가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영원히 인간들의 증오를 받게 될 터였다.
하지만 설화는 듣지 않았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가 석실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월과 선인들의 얼굴에 당혹감과 공포가 스쳤다. 그들은 설화의 힘이 평범한 요괴의 수준을 넘어섰음을 직감했다.
거대한 꼬리 아홉 개가 그녀의 등 뒤에서 솟아올랐다. 새하얀 털이 영롱하게 빛나며 공간을 채웠다. 설화는 더 이상 가녀린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혼의 숲의 주인, 만물을 압도하는 고고한 백호 구미호였다.
“이현을 해하려 한다면… 이 숲은 너희들의 무덤이 될 것이다.”
설화의 목소리는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년의 세월을 담은 듯한 묵직하고 차가운 울림이 숲을 메웠다. 거대한 영기가 그녀를 중심으로 휘몰아치며 주변의 나무들이 뿌리째 흔들렸다.
무월의 눈이 충혈되었다. 요괴에 대한 증오가 극한으로 치달았다. “구미호! 감히 내 앞에서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좋다! 오늘이야말로 이 숲에서 네 명을 끊으리라!”
무월이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도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번개 같은 영기가 설화를 향해 쇄도했다.
설화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꼬리 하나가 번개보다 빠르게 움직여 번개 영기를 감싸 안았다. 쩌저적! 소리와 함께 번개는 허무하게 사라졌다. 나머지 여덟 개의 꼬리가 뱀처럼 꿈틀거리며 무월을 향해 뻗어 나갔다.
“크윽!”
무월은 거대한 힘에 밀려 뒤로 나동그라졌다. 그를 따르던 선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감히 다가서지 못했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이현은 설화의 뒤에서 그녀의 모습을 바라봤다. 두렵거나 놀랍지 않았다. 단지 가슴 저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안타까움과 슬픔, 그리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의 손이 저절로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검날에 푸른 영기가 다시 한번 휘감겼다. 이번에는 훨씬 더 강렬하고 불안정한 기운이었다.
“이현!” 설화가 이현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은 이미 분노와 경고로 가득 차 있었다. 이현이 지금 하려는 행동이 무엇인지, 그녀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현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나도… 나도 너를 지킬 거야. 설화.”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영기가 거대한 폭풍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청운문에서 금기로 여겨지는, 인간의 육신이 감당할 수 없는 극한의 영기 개방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깎아내려 단시간에 모든 힘을 끌어내는 금지된 술법.
“이현! 멈춰!” 설화의 외침이 숲을 갈랐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현의 온몸에 푸른 영기가 휘감기며 그의 모습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는 결의로 빛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를 지키기 위해, 그 어떤 대가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오늘, 우리는 여기서 벗어날 거야.”
이현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의 몸에서 거대한 푸른 섬광이 터져 나왔다. 대지가 흔들리고, 하늘이 갈라지는 듯한 충격이 영혼의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무월과 선인들은 그 섬광에 눈을 가린 채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섬광이 걷히자,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현과 설화는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었다.
무월은 끓어오르는 분노와 혼란 속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현… 이 미친 녀석! 감히 금기를 사용하다니! 너는 이제 청운문의 수치다! 반드시 찾아내… 그 요물과 함께 네 목숨을 거두리라!”
어둠이 내린 숲은 정적에 잠겼고, 오직 무월의 분노에 찬 외침만이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그러나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영혼의 숲 가장 깊은 곳, 태고의 샘물이 솟아나는 자리에 봉인되어 있던 고대의 균열이 이현의 금지된 힘에 의해 미세하게 흔들렸다는 것을.
그 균열 너머에는, 인간계와는 다른 차원의 세계가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곳은, 이현과 설화가 도달하게 될,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었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