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공기는 언제나처럼 싸늘하고 비릿했다. 강민준은 낡은 방독면 아래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무너진 백화점 잔해를 조심스럽게 헤치고 있었다. 녹슨 철근들이 뼈대처럼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깨진 유리 파편들은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반짝였다. 며칠 전부터 고질적으로 부족했던 약품을 찾으러 온 길이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생존자 캠프에서도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모든 것은 바깥에서 구해야만 했다.
“젠장, 이것도 없어.”
그는 먼지로 뒤덮인 선반을 뒤지다 빈 약병들을 발견하고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신경이 곤두선 채로 주변을 살폈다. 썩어가는 시체 냄새와 함께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기분 나쁜 신음소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늘 그랬듯이, 한순간의 방심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낡은 식칼을 꽉 움켜쥐었다. 손잡이에 감아둔 천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때였다. 건물 안쪽 깊숙한 곳에서, 다른 좀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움직임이 그의 시야에 포착됐다. 보통의 좀비들이라면 그저 본능에 따라 사냥감에게 달려들거나, 의미 없이 비틀거릴 터였다. 그러나 저 그림자는 달랐다. 무언가에 홀린 듯, 그는 그림자를 따라 어두운 복도로 발걸음을 옮겼다.
복도의 끝, 천장이 무너져 내린 곳에서 한 줄기 빛이 바닥에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빛 속에, 그녀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 지옥에서 저런 모습이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다른 좀비들처럼 끔찍하게 일그러지거나 살점이 뜯겨나간 형상이 아니었다. 찢어진 드레스 자락이 무릎 아래에서 흔들렸지만, 그마저도 묘하게 우아했다. 새하얗다 못해 창백한 피부 위로 희미하게 돋아난 검푸른 핏줄들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그녀가 그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닐까 착각할 수도 있었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은 길고 검붉었으며, 그늘에 가려진 얼굴은 반쯤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가장 민준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눈이었다.
다른 좀비들의 눈은 그저 탁하고 텅 비어 있었다. 짐승의 탐욕만이 번뜩이는 죽은 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깊은 자줏빛을 띠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보석처럼, 형언할 수 없는 슬픔과, 그리고 묘한 지성을 담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이제는 색이 바래고 흙먼지가 앉은 작은 그림책 한 권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찢어진 페이지에는 어린아이가 그린 듯한 알록달록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그림책을 만졌다. 그 움직임은 마치 잊힌 기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민준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심장이 제멋대로 발광했다. 본능적으로 외쳤다. *죽여야 한다!* 이성을 가진 좀비는 더욱 위험하다. 그들이 얼마나 교활하고 잔인한지, 그는 이미 수없이 봐왔다.
그는 식칼을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머리를 으스러뜨릴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어떤 위협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그림책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가 느릿하게 들려 민준을 향했다.
순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폐허의 바람 소리도, 저 멀리서 들려오던 좀비들의 신음도, 그의 격렬한 심장 소리마저도 희미해졌다.
그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녀의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그를 꿰뚫었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기묘한 공허함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아주 희미하게, 그 공허함 속에서 한때 그녀였을 인간의 잔재가 아련하게 비쳤다.
*왜, 왜 공격하지 않는 거지?*
그는 손에 든 칼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죽여야 한다. 아니, 죽일 수 없다.
이성은 죽이라고 명령하고 있었지만, 그의 몸은 굳어버렸다. 마치 최면에 걸린 것처럼, 그의 모든 신경은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에 붙잡혀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탐욕스럽지도, 광기에 차지도 않았다. 그저 그를… 응시할 뿐이었다. 마치 그를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풍경처럼 바라보는 듯했다.
민준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칼을 내렸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좀비를 베어 죽였던 그의 손이, 이렇게 무기력하게 굳어버린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민준의 행동을 관찰하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길고 검붉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렸다. 그 자세는 마치 고뇌하는 조각상처럼 완벽하고 아름다웠다.
“너… 넌 뭐지?”
갈라진 목소리가 그의 입술에서 터져 나왔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거칠어진 목소리였다. 그녀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저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선에는 어떤 질문이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민준은 발을 내디뎠다. 한 발, 또 한 발. 그는 점점 그녀에게 다가갔다.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바보처럼. 위험을 알리는 경고등이 온몸에 울려 퍼졌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는 이 잿빛 세상에 떨어진 한 줄기 빛이자, 동시에 가장 치명적인 독처럼 그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그들이 너무 가까워지자, 그는 그녀에게서 희미한 비릿한 흙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다른 좀비들에게서 나는 역겨운 썩은 내와는 달랐다. 마치 오래된 피와 숲의 흙이 섞인 듯한 냄새였다.
“이름… 이름이 있어?”
그가 다시 물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느릿하게 손을 들어, 무너진 천장 틈새로 쏟아지는 한 줄기 햇살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햇살에 닿는 순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잡으려는 듯, 투명하게 떨렸다.
민준은 그녀가 하는 행동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가 놓치고 있던 것이 있었다. 햇살이 비치는 벽면, 닳고 닳은 벽돌 사이로 가늘게 뻗어 나온 연약한 풀 한 포기. 노란 꽃잎을 피우려다 만, 여린 꽃망울이었다.
그녀는 꽃망울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그녀의 자줏빛 눈동자 속에, 그 작고 연약한 꽃망울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좀비의 눈에서, 그는 덧없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심을 발견했다.
그녀는 꽃망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민준의 눈을 바라봤다. 그 시선은 “봐.” 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것을 봐.”
어째서인지, 민준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평온이 찾아왔다. 그는 세상의 모든 광기와 위험을 잊은 채, 그저 그녀와 함께 그 작고 연약한 꽃망울을 바라봤다. 이 모든 상황이 비현실적이고, 위험하고,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동시에, 이 순간이 그가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느껴본 가장 순수한 순간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저녁노을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며 폐허를 황금빛으로 채웠다.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좀비들은 더욱 활개를 칠 터였다. 그는 떠나야 했다. 그는 살아야 했고, 다른 생존자들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애써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고 뒤돌아섰다. 한 걸음, 두 걸음. 그는 폐허의 어둠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도망쳐! 이곳은 위험해! 저것은 괴물이야!*
하지만 그의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녀의 시선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결국 멈춰 서서 다시 돌아봤다.
그녀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자줏빛 눈동자는 변함없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노을빛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비추며 묘한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녀는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그의 떠남을 이해한다는 듯이, 혹은 그의 돌아옴을 약속받는 듯이.
민준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은 격렬하게 요동쳤다. 이 만남은 그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이 만남은 그가 살아가야 할 이유를, 혹은 죽어야 할 이유를 동시에 제시하는 듯했다.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의 등 뒤로 느껴지는 자줏빛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심장 깊숙이 박혀, 이제는 그를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 분명했다. 이젠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금지된 것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이 매혹이 그를 어디로 이끌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