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균열**
창밖은 거대한 검은 스크린 위로 보석처럼 박힌 도시의 야경이었다. 무수한 불빛들이 밤을 수놓았지만, 그 아름다움은 강민준의 메마른 눈동자에는 닿지 못했다. 그에게 도시는 그저 억압적이고 차가운 덩어리일 뿐이었다. 그는 허름한 원룸의 낡은 의자에 앉아 한 손에 쥐고 있는 구겨진 신문 조각을 응시했다.
신문 1면에는 ‘이서진, 새로운 도약으로 업계 정상에 우뚝 서다!’라는 헤드라인 아래, 이서진의 환하게 웃는 얼굴이 인쇄되어 있었다. 번듯한 슈트 차림에 자신감 넘치는 미소. 그 모습은 10년 전, 같은 꿈을 꾸며 밤샘을 밥 먹듯 하던 허름한 작업실의 이서진과는 너무나 달랐다. 아니, 어쩌면 그때부터 이미 다른 길을 걷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만 몰랐을 뿐.
민준은 느리게 손가락으로 서진의 얼굴을 쓸었다. 종이의 거친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이 종잇장 하나가 민준의 지난 10년을, 아니, 그의 인생 전부를 망가뜨린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뼈아팠다. 그는 세상의 모든 욕망과 오만이 한데 뭉쳐진 결정체처럼 비참하게 바닥을 기어야 했다. 그가 가진 전부를 잃고, 심지어 영혼마저 갉아 먹히는 시간을 견뎌야 했다.
“민준아,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못 할 게 없어. 같이 가자, 성공의 길로.”
서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울리는 듯했다. 빛나는 눈, 뜨거운 열정. 그 모든 것이 진심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손을 잡았다. 가진 전부를, 미래의 모든 것을 걸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었고, 서진은 민준의 등을 밀어 떨어뜨린 장본인이었다.
그가 떨어진 곳은 차가운 법정의 바닥이었고, 세상의 비난이 쏟아지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서진은 태연히 거짓말을 했고, 주변의 모두는 그 거짓말을 진실이라 믿었다. 배신감보다 더 깊은 것은,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에 대한 자책이었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자책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민준은 신문 조각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의 눈빛에 한때 타올랐던 열정과는 다른, 서늘하고 끈적한 불꽃이 피어났다. 복수. 오직 그 단어만이 그의 마음속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낡은 서랍을 열자, 먼지 앉은 낡은 스마트폰이 나타났다. 몇 년 만에 전원을 켜자 익숙한 로고가 떴다. 화면이 밝아지자, 미리 저장해두었던 하나의 번호를 망설임 없이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이어지다 이내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이 시간에 누구세요?” 낯선, 그러나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은 침묵했다. 잠시 뒤, 목소리의 주인이 다시 물었다.
“누구… 누구세요? 혹시 강민준 씨?”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지는 정적 끝에, 민준이 낮게 읊조렸다.
“나야. 강민준.”
수화기 너머로 짧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민준 씨… 살아있었어요? 그동안 어디에…”
“다시 돌아왔어.” 민준은 상대방의 질문을 끊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오직 목적만이 존재했다. “할 얘기가 좀 있어. 만날 수 있을까.”
“지금요? 이 시간에?” 목소리에는 당황스러움과 동시에 어렴풋한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돼. 내가 할 얘기는, 그쪽도 분명 듣고 싶어 할 얘기일 테니까.”
“무슨… 무슨 얘기인데요?”
“이서진 얘기.”
상대방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긴 침묵이 흘렀다. 민준은 그 침묵 속에서 상대의 마음속에 어떤 파문이 일어났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진에게 당한 사람이 자신뿐만이 아니었을 터.
“알았어요. 어디로 갈까요?” 결국 상대는 체념한 듯 물었다.
민준은 창밖의 야경을 다시 한번 응시했다. 저 빛나는 빌딩 숲, 그 안에 숨 쉬고 있는 탐욕과 배신의 그림자들. 이제 그는 그 그림자들을 하나씩 끌어내 빛 속으로 던져버릴 참이었다.
“아니. 내가 갈 거야.” 민준은 픽 웃었다. 웃음소리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아직은 내가 숨어 지내야 하거든. 그러니, 내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내 집으로 찾아와.”
그리고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민준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은 깊은 심연처럼 어둡고, 동시에 날카로운 칼날처럼 빛났다.
복수의 서막이, 그렇게 조용히 열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