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메마른 강바닥에 금이 간 지 오래였다. 척박한 흙먼지가 바람결에 휘날리며 허물어져 가는 흙벽을 때렸다. 그을린 하늘 아래, 잿빛으로 변해버린 마을 ‘잿빛골’은 거대한 제국의 심장부가 아닌, 그저 거대한 그림자 아래 짓밟힌 작은 점에 불과했다. 카인은 낡은 오두막 지붕에 쪼그리고 앉아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에는 녹슨 단검이, 등에는 다 헤진 활이 쥐어져 있었다. 무릎에 앉은 여동생 리나는 두려움에 떨며 카인의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다.

“카인 오빠….”

리나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바람 소리에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을 한가운데에 버티고 선 제국 병사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붉은 깃발이 펄럭이는 창끝은 마치 지옥에서 솟아난 송곳니 같았고, 병사들의 검은 철갑옷은 한낮의 태양 아래서도 섬뜩한 빛을 발했다. 그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마을을 헤집고 다니며 얼마 되지 않는 곡식 자루와 가축들을 끌어냈다.

“더는 줄 것이 없습니다요! 제발…!”

할머니 한 분이 병사의 발목을 붙잡고 애원했지만, 병사는 들은 척도 않고 그녀를 걷어찼다. 늙은 몸이 맥없이 쓰러지고, 흙먼지 속에서 콜록이는 기침 소리만 공허하게 울렸다.

카인의 손에 쥔 단검 자루가 삐걱거렸다. 억누르지 못할 분노가 핏줄을 타고 끓어올랐다. 그 순간이었다. 한 병사가 어린아이의 손에 들린 작은 빵 조각을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아이는 서럽게 울음을 터뜨렸고, 아이의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병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것마저 가져가시면… 저희 아이는 굶어 죽습니다요!”

“닥쳐라, 천한 것! 황제께 바칠 세금이다! 너희 따위가 감히 거역하느냐!”

병사는 거침없이 아이의 어머니를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여인은 쓰러졌고, 빵 조각은 흙바닥에 떨어져 짓밟혔다. 리나가 몸을 움찔거리며 오빠의 팔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오빠… 안 돼…”

카인의 눈빛이 이글거렸다. 손은 이미 녹슨 단검의 손잡이를 바스러뜨릴 듯 꽉 쥐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뛰어내려 저 빌어먹을 제국 병사들의 목을 따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서는 마을 원로인 늙은 에밀 할아범의 경고가 메아리쳤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무모한 저항은 더 큰 죽음만 불러올 뿐이다.’

병사들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마을을 떠났다. 그들이 남긴 것은 파헤쳐진 밭과 부서진 살림살이, 그리고 절망에 찬 사람들의 신음 소리뿐이었다. 카인은 이를 악물고 낡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섰다. 리나는 말없이 오빠의 옆에 섰다.

밤이 깊어지고, 초승달이 얇게 휘어져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을 뿌렸다. 잿빛골 어귀에 있는 낡은 방앗간에 그림자 넷이 모여들었다. 카인과 그의 오랜 친구들, 루시안, 에밀, 그리고 세라였다. 루시안은 마을 최고의 대장장이였고, 에밀은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농부였지만 이 지역 지리에 능통했으며, 세라는 숲의 약초꾼으로 조용하고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녔다.

“오늘도 변함없군.” 루시안이 나지막이 으르렁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낮 동안 억눌렀던 분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대장장이답게 단단한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어머니는 턱뼈가 부러진 것 같다고 하셨어.” 에밀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낮에 병사에게 맞은 아이의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더는 못 참아, 카인. 이대로 가다간 우리 모두 말라죽을 거야.”

카인은 묵묵히 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잿빛골 주변의 지형과 제국 병사들이 오가는 길, 보급로까지. 그의 손놀림은 정확하고 거침없었다.

“그럼 어떻게 할 셈이야?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건가?” 세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언제나 침착했지만, 그 질문 속에는 억누르지 못하는 초조함이 묻어났다. “제국은 거대해. 우리는 겨우 몇 명뿐이고, 무기랄 것도 변변찮아.”

카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달빛 아래서도 번뜩였다. “맞아. 반란이야. 하지만 무모하게 쳐들어가는 반란이 아니야.”

그는 나뭇가지로 제국 병사들의 보급로가 지나가는 길목을 가리켰다. “병사들은 사흘에 한 번 꼴로 잿빛골로 와. 그리고 돌아갈 때는 반드시 이 길을 지나서 가지. 곡창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니까.”

“매번 올 때마다 약탈하고 돌아가는 거지.” 루시안이 비웃듯이 중얼거렸다.

“그들이 다음 세금을 걷으러 올 때를 노리자.” 카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속에는 불꽃이 일렁였다. “그들의 보급로를 끊고, 귀환하는 길목에서 기습한다. 그들의 목표는 식량과 물자야. 전투가 길어지면 그들은 손해만 볼 뿐이지.”

에밀이 무릎을 탁 쳤다. “그거 좋은 생각이야! 우리가 직접 제국 요새를 공격할 수는 없어도, 귀환하는 병사들을 급습하는 건 가능할지도 몰라. 그들은 대개 긴장이 풀려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몇 명이 필요한데? 병사는 스무 명은 족히 넘어 보여. 우리는 겨우 넷인데.” 세라가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마을의 젊은이들을 설득해야 해.” 카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 한 줌의 밀알마저 빼앗기고, 자식들이 굶어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죽는다면, 싸우다 죽는 게 나아. 짐승처럼 굶어 죽는 것보단.”

그의 말에 세 명의 친구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 속에는 두려움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동시에 깊은 공감과 결의가 함께 스며들어 있었다. 그들은 모두 지난 수년간 제국의 폭압 아래서 사랑하는 이들이 고통받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좋아, 카인. 난 네 옆에 서겠어.” 루시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눈에는 대장장이의 굳건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망치를 드는 대신 칼을 들겠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

“나도.” 에밀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먹도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더 이상은 물러설 수 없어.”

세라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 한숨 속에는 체념이 아닌, 깊은 결심이 배어 있었다. “무모한 짓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나도 함께할게. 약초 지식은 싸움에도 도움이 될 거야. 독초를 이용하는 법도 알아.”

카인은 천천히 친구들을 둘러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더 이상 비겁한 그림자가 없었다. 오직 분노와 절망이 빚어낸, 차가운 불꽃만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고맙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용기뿐이야.”

카인은 계획을 더욱 상세하게 설명했다. 숲의 지리에 능통한 에밀이 매복 지점을 선정하고, 루시안은 부족한 무기를 보수하거나 간단한 함정을 제작하기로 했다. 세라는 전투 중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독초를 이용해 적을 교란할 방법을 찾기로 했다. 카인 자신은 전체적인 지휘와 함께 최전선에서 싸울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이 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둠 속에서 피어난 작고 여린 불꽃이 점차 강렬한 불길로 변해가는 시간이었다. 헤어질 때, 카인은 친구들의 어깨를 한 번씩 두드려주었다.

낡은 방앗간 문을 열고 나오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동쪽 하늘 끝에는 아직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지만, 곧 태양이 떠오를 터였다. 카인은 허리춤의 녹슨 단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그 날카로운 칼날이 자신의 손가락을 베었는지,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더 이상은 참지 않는다.’

잿빛골을 뒤덮은 어둠 속으로, 그는 비장한 결의를 품고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더 이상, 평범한 농부 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반란의 불꽃을 품은,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 전사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