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깊어지고, 남산타워의 불빛이 서울의 어둠을 가로질러 민혁의 펜트하우스 창문을 희미하게 물들였다. 최고급 위스키가 담긴 잔을 흔들며 민혁은 느긋하게 웃었다. 거실 벽면을 가득 채운 초대형 스크린에서는 자신이 후원하는 미술 경매 현장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모두가 그의 이름 앞에 고개를 숙였고, 돈은 강물처럼 그에게 흘러들었다. 완벽한 삶이었다.
“어이, 민혁아. 넌 매번 저런 걸 보면서도 안 질리냐?”
옆에 앉아있던 동하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물었다. 민혁은 피식 웃었다.
“이게 바로 권력이 빚어내는 예술이지. 너희들이 뭘 알겠냐.”
그때였다. 스크린 속 경매사가 다음 작품을 소개하려는 찰나, 갑자기 화면이 지직거리며 일그러졌다. 싸구려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진 것처럼 사람들의 형상이 왜곡되고, 소리가 깨진 유리처럼 흩어졌다.
“어라? 뭐야, 송출에 문제 있나?” 동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언제나 완벽했던 그의 시스템에 이런 오류가 발생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채널을 바꾸려는 순간, 화면 속 왜곡된 이미지들 사이로 섬뜩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어둠으로 엮인 덩어리 같기도, 비명 지르는 얼굴 같기도 한 형체였다.
등골이 오싹했다. 민혁은 손에 든 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젠장, 뭐야 저거…”
그림자는 이내 사라졌고, 화면은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민혁의 심장은 이미 불규칙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위스키를 들이켰다.
“괜찮아? 얼굴이 왜 그래?” 동하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술이 좀 취했나.”
민혁은 애써 태연한 척했지만, 뇌리에는 그 기이한 그림자가 자꾸만 맴돌았다. 잠시 잊고 지냈던 과거의 잔영이 불현듯 떠오르는 듯했다.
밤이 더 깊어졌다. 동하와 다른 친구들이 돌아가고, 펜트하우스에는 민혁 혼자 남았다. 그는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괜한 불안감에 뒤척이던 그는 문득 거실 쪽에서 나는 희미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스스스… 슥…’
마치 마른 나뭇잎이 바닥을 긁는 듯한 소리였다. 처음에는 바람 소리인가 싶었지만, 소리는 점점 더 또렷해졌다. 침대에서 내려와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거실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멀리 도시의 불빛만이 창문을 통해 희미하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누구… 없나?”
민혁의 목소리가 어둠 속으로 먹혀들어 갔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가까워진 듯했다. 그는 천천히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마루의 차가운 감촉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불을 켜려고 손을 뻗는 순간, 공기 중 온도가 뚝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피부가 순간적으로 소름 돋으며 뻣뻣해졌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퀴퀴하고 축축한 흙냄새. 마치 오랜 시간 묻혀 있던 무언가가 방금 막 세상 밖으로 나온 듯한 역겨운 냄새였다.
“콜록… 컥!”
민혁은 본능적으로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앞이 흐릿했다. 어둠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그 순간, 거실 중앙에 놓인, 그가 아끼는 장식장 위에서 무엇인가 ‘툭’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깨진 것은 작은 유리 장식품이었다. 하지만 그가 놀란 것은 깨진 소리 때문이 아니었다. 장식품이 있던 자리에는 한때 태준과 함께 키웠던 이름 없는 작은 화분이 놓여 있었다. 흙이 말라 비틀어져 죽은 지 오래된 화분. 그런데 지금 그 화분에서, 작고 검붉은 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마치 핏빛 눈물을 머금은 듯한 기이한 생명력이었다.
“이… 이건…”
민혁의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었다. 그때, 어디선가 낮고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랐지, 민혁아? 네가 버린 씨앗이.”
어둠 속에서 메아리치는 그 목소리는 분명 태준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던 태준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습하고, 비틀린 증오로 가득 찬, 생전의 태준이 가졌던 모든 온기를 삼켜버린 듯한 끔찍한 음성이었다.
민혁은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눈앞에 어떠한 형체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는 그의 귓속을 파고들어 뇌를 갉아먹는 듯했다.
“기억하나? 네가 짓밟았던 꿈들을. 네가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내가 너를 얼마나 믿었는지… 그리고 네가 나를 어떻게 배신했는지.”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고 또렷해졌다. 민혁의 심장 박동과 공포가 뒤섞여 온몸을 마비시켰다. 싹이 돋아난 화분 주위로 어둠이 더욱 짙게 모여들었다. 검은 실타래 같은 연기가 화분을 휘감았다.
“너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생각했겠지. 내가 죽었다고 믿었을 테고.”
어둠 속에서 섬뜩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은 기쁨의 웃음이 아니었다. 깊은 심연에서 길어 올린 듯한, 인간의 것이 아닌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민혁아. 나는… 돌아왔어.”
갑자기 거실의 모든 불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켜졌다. 민혁은 눈을 찌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어둠도, 섬뜩한 연기도, 태준의 목소리도 사라진 후였다. 다만, 장식장 위에는 핏빛 싹이 돋아난 화분만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민혁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그에게는 더 이상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완벽했던 삶의 균열이 시작되었다. 태준은 정말 돌아온 것인가? 아니, 돌아왔다기보다는…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어 돌아온 것 같았다. 민혁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입술을 깨물었다.
“태준… 이 개자식…”
그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갈라지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처절한 악몽의 시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악몽은, 그가 태준에게서 빼앗아갔던 모든 것을 되돌려 놓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창밖의 달은 핏빛으로 물든 듯 붉게 빛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