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덮인 폐허의 도시는 영원히 고요할 것만 같았다. 삭막한 바람이 텅 빈 창문 구멍들을 휘돌아 나갈 때마다 낡은 금속 조각들이 비명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 모든 적막 속에서도, 강철 요새는 끈질기게 숨 쉬고 있었다.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와 녹슨 철골들이 뒤섞인 이 요새는 한때 도심의 심장부를 지탱하던 백화점이었지만, 지금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 중 하나를 품고 있었다.
요새 내부의 공기는 바깥과 사뭇 달랐다. 희미한 전등 불빛 아래, 사람들의 부산한 움직임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낡은 발전기가 뿜어내는 저음의 웅웅거림이 상시로 깔려 있었고, 물을 정화하는 기계음과 알 수 없는 금속 도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뒤섞여 활기 없는 활기를 만들어냈다.
“류진 씨!”
사방이 책으로 가득 찬, 한때는 요새의 도서관이었을 공간. 류진은 낡은 선반에 걸터앉아 고대 문명이 남긴 너덜너덜한 기술 서적을 무심하게 넘기고 있었다. 부드러운 햇살 대신 인공 조명의 푸른빛이 그의 날카로운 콧날과 길게 뻗은 손가락을 비추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방금 자신을 부른 청년, 민준에게 향했다. 민준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에는 공포가 가득했다.
“강대장님이 찾으십니다! 긴급 상황입니다!”
류진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책장을 덮었다. 마치 이 세상의 어떤 소란도 그를 뒤흔들 수 없다는 듯이.
“무슨 일인데, 자네가 그렇게까지 허둥대나?” 그의 목소리는 나른했지만, 그 안에 담긴 냉철함은 얼어붙은 호수 같았다.
“박기술자님이… 박기술자님이 살해당했습니다!” 민준의 떨리는 목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밀실입니다!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밀실에서요!”
류진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움직였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 잿빛 세상에서 그의 지루함을 달래줄 만한.
강철 요새의 가장 깊숙한 곳, 지하 3층에 위치한 에너지 제어실 앞은 이미 혼란스러운 인파로 가득했다. 요새의 핵심 전력을 담당하는 곳이기에, 이곳의 비극은 공동체 전체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였다. 요새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강대장은 단단한 근육질의 몸으로 길을 막아서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평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강대장은 류진이 다가오자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오셨군, 류진 씨.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밀실 살인이라 들었습니다.” 류진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꽤나 고전적인 수법이군요. 이 폐허가 된 세상에서도 그런 일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농담할 상황이 아닙니다!” 강대장은 이를 악물었다. “박기술자님은 요새의 유일한 에너지 전문가였습니다. 그가 없으면 우리는 곧 암흑 속에 잠길 겁니다. 그런데 누가… 대체 누가 이런 짓을?”
강대장은 무거운 철문을 가리켰다. “문은 안에서 빗장이 걸려 있었습니다. 밖에서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았죠. 간신히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땐… 이미 늦었습니다.”
류진은 천천히 문 쪽으로 다가갔다. 강제로 열린 철문은 경첩이 찢어지고 가장자리가 흉하게 구부러져 있었다. 그는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좁고 답답한 공간. 각종 전선과 제어판,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박기술자의 시신이 보였다.
“피해자는 언제 발견되었습니까?”
“한 시간 전쯤입니다. 정기 점검 시간이 지나도 아무 기척이 없어서 의아하게 생각했죠. 내부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류진은 철문 안쪽을 살폈다. 굵고 튼튼한 쇠빗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억지로 부수고 들어오면서 빗장까지 떨어져 나간 모양이었다. 그는 손전등을 들어 문 주변의 벽과 바닥을 꼼꼼히 비추었다. 특별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창문은 어떻습니까?” 류진이 물었다.
“이곳은 지하 3층입니다. 창문이 있을 리 없죠. 환기구는 있지만 사람이 드나들 정도는 아닙니다.” 강대장이 단호하게 답했다.
류진은 말없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좁은 공간에 냄새가 훅 끼쳐왔다. 시신의 냄새, 그리고 낡은 기계의 기름 냄새. 박기술자는 복잡한 제어판 앞에 엎드려 있었다. 그의 등에는 낡은 철 파이프를 날카롭게 깎아 만든 듯한 흉기가 깊숙이 박혀 있었다. 피가 흥건하게 흘러나와 제어판과 바닥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류진은 시신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고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핏자국, 벽에 걸린 도구들, 그리고 천장의 환기구까지 놓치지 않았다. 모든 것이 평범했다. 아니, 너무나 평범해서 오히려 이상했다.
“시신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류진이 물었다.
“사인은 과다 출혈입니다. 등 뒤에서 흉기로 찔렸고, 즉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항의 흔적은 없었습니다.” 옆에 있던 의료팀원이 보고했다.
류진은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다. 밀실. 안에서 빗장이 걸린 문. 사람이 드나들 수 없는 공간. 그리고 등 뒤에서 당한 공격. 그렇다면 범인은 대체 어떻게 사라졌다는 말인가?
그의 눈이 제어판 옆에 놓인 작은 수납함에 멈췄다. 낡은 금속함이었다. 류진은 조심스럽게 다가가 수납함의 뚜껑을 열었다. 안에는 박기술자가 쓰던 몇 가지 공구들과 너저분한 부품들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류진의 시선이 한곳에 고정되었다.
아주 작고,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조각이었다. 금속 조각은 아니었다. 낡은 종이 조각. 마치 무엇인가가 타다가 남은 재처럼 보였다. 류진은 핀셋을 꺼내 조심스럽게 그 조각을 집어 들었다. 검은색으로 그슬린 조각의 한쪽 면에는 알아보기 힘든 글자의 일부가 희미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이것은…?” 강대장이 의아한 듯 물었다.
류진은 아무 말 없이 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는 다시 방 전체를 훑었다. 방금 전과는 다른 시선이었다.
“강대장님.” 류진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박기술자님은 혼자 죽은 것이 아닙니다.”
강대장과 민준, 그리고 의료팀원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이 방에 들어온 범인은, 박기술자님을 죽인 후 이 방에서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류진은 손안의 종이 조각을 쥐었다. “범인은… 애초에 이 방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이것은 밀실 살인이 아닙니다.” 류진은 시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선언했다. “이것은 밀실에서 벌어진, 완벽하게 조작된 자살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살인데 왜 등에 흉기가 박혀있는가? 류진은 모두의 의문을 예상했다는 듯, 싸늘하게 미소 지었다.
“아니요. 정확히 말하자면… 범인은 이 ‘밀실’의 트릭을 이용해 살인을 자살로 위장하려 한 겁니다. 하지만 그들은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의 시선이 천장의 환기구로 향했다.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너무나 평범해 보였던 환기구였다.
“아니면… 박기술자님을 살해한 진짜 범인은, 이 방 안에 아직도 살아있거나요.”
류진의 섬뜩한 한마디에, 좁은 제어실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