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그림자 저택.
어둠의 장막이 드리운 시간, 저택은 그 이름처럼 칠흑 같은 실루엣을 뽐냈다. 고딕 양식의 첨탑은 날카로운 손톱처럼 밤하늘을 할퀴었고, 거대한 창들은 거대한 괴물의 눈처럼 무감한 빛을 반사했다. 그러나 오늘 밤, 그 웅장함 속에는 그 어떤 밤보다도 서늘하고 끈적한 공포가 스며들어 있었다.
대마법사 공작 아르테미스 벨라스.
엘드리온 왕국의 최고 권력자 중 한 명이자, 일곱 현자회 의장으로 추앙받는 존재. 그의 서재는 왕실 도서관보다도 귀한 마법 서적들로 가득 차 있었고, 고대 유물들이 곳곳에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매일 밤 이곳에서 밤늦도록 연구에 몰두하던 그의 습관은 저택의 모든 이들이 익히 아는 바였다.
그리고 오늘 밤도 예외는 아니었다. 적어도, 새벽녘 하녀 엘리나가 차를 준비하기 전까지는.
“공작님, 차 드실 시간입니다.”
엘리나는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언제나처럼 낮은 목소리로 “들어오라”는 허락이 들려올 줄 알았지만, 돌아오는 건 무거운 정적뿐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노크가 거듭될수록 엘리나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공작은 깊은 잠에 들거나, 마법 연구에 몰두할 때를 제외하고는 노크를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엘리나는 불안한 예감에 휩싸인 채 손잡이를 잡았다. 견고한 흑단 손잡이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손잡이를 돌렸지만,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안에서 걸어 잠근 모양이었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작게나마 들려오는 웅얼거림이라도 기대했지만, 서재 안에서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침묵, 그리고 불길한 기운만이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듯했다. 엘리나는 온몸의 피가 식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복도를 뛰어갔다.
***
“비켜, 비켜! 감히 공작님의 방문을 부수다니!”
“하지만 대장님! 안에서 인기척이 없습니다! 그리고… 마력 감지 결과, 공작님의 마력이 평소와 다릅니다!”
밤그림자 저택의 경비대장이자 숙련된 검사인 가레스 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옆에는 서재 문을 두드리던 마법사들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서재 문은 육중한 떡갈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고대 마법으로 강화되어 있었다. 단순한 물리력으로는 부술 수 없는 문이었다. 안에서 걸어 잠갔다면 더더욱 그랬다.
“마력이… 다르다고?” 가레스 경이 물었다.
젊은 마법사가 침 삼키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네, 대장님. 생체 마력은 희미하게 감지되나, 마치… 정지된 듯한 마력입니다. 그리고 문에는 공작님께서 평소 걸어두시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결계 마법이 덧씌워져 있습니다.”
“공작님께서 직접 걸어두신 것이 아니라는 말이냐?”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결계는… 상당히 공격적이고 폐쇄적입니다. 외부의 침입을 막는 것을 넘어, 내부의 소리조차 바깥으로 새어 나가지 못하게 합니다. 마치…” 마법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레스 경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그는 문에 귀를 바짝 대어 보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작의 서재는 저택의 가장 높은 층, 외진 탑에 위치해 있었다. 창문은 하나뿐이었고, 그마저도 십자형 쇠창살과 두터운 방탄 마법 유리로 막혀 있었다. 외부에서 침입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젠장! 대공 전하께 즉시 알리고, 현자회에 연락을 넣어라! 그리고… ‘그’에게도 전갈을 보내!” 가레스 경의 목소리는 희미하게 떨렸다.
‘그’라는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얼굴에 일제히 미묘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모두가 입 밖에 내지 못하는 이름. 그러나 가장 불가능한 사건에 마지막으로 기댈 수밖에 없는 이름.
밤그림자 저택의 불길한 소문은 새벽의 안개처럼 엘드리온 왕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
수 시간 후, 해가 뜨고 저택 주변에 엘드리온 왕국의 정예 기사들과 현자회 마법사들이 진을 쳤다. 공작의 서재 문은 마침내 현자회 소속 대마법사들의 힘을 빌려 어렵게 해제되었다. 거대한 떡갈나무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열렸다.
먼지가 자욱한 서재 안. 첫 발을 내딛은 이들은 모두 숨을 멈췄다.
서재의 한가운데, 낡은 마법 고서들이 쌓인 책상에 대마법사 공작 아르테미스 벨라스가 앉아 있었다. 마치 깊은 잠에 빠진 듯, 그의 머리는 책상 위로 엎어져 있었다. 흐트러진 은발 머리칼 아래로, 목덜미에 깊게 패인 붉은 상처가 섬뜩하게 드러났다. 차가운 피가 책상 위의 오래된 양피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의 한 손에는 늘 지니고 다니던 수정 지팡이가 쥐여 있었고, 다른 한 손은 허공을 움켜쥐고 있는 듯 미묘한 형태로 굳어 있었다.
“공작님!” 현자회 소속 마법사 한 명이 달려들려 했지만, 가레스 경이 급히 그를 제지했다.
“함부로 접근하지 마라! 범인의 흔적을 훼손할 수 있다!”
그러나 방 안을 둘러본 모든 이들의 얼굴에는 의문과 공포만이 가득했다. 서재는 완벽하게 밀폐되어 있었다. 창문은 쇠창살과 마법 결계로 완벽하게 봉인되었고, 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바깥에서는 어떠한 침입의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내부에서 외부로 탈출한 흔적도 없었다. 마치 공작이 홀로 방에 있다가, 유령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이건… 불가능합니다.” 현자회 수석 현자 에릭이 굳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마법 결계도, 방의 물리적 구조도 완벽했습니다. 공작님은 누구에게도 문을 열어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때, 서재 문 뒤편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가능이라… 세상에 불가능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눈이 미처 보지 못한 진실이 있을 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문으로 향했다.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잿빛 두루마기를 걸치고, 허리에는 마법 대신 닳고 닳은 가죽 주머니 몇 개를 매달고 있는 남자. 헝클어진 흑발은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를 더욱 부각시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는 주변의 혼란과 경악 속에서도 놀랍도록 침착하고 예리한 빛을 띠고 있었다.
라울 르웰린.
엘드리온 왕국에서 ‘불가사의 탐정’으로 불리는 유일한 존재. 그 누구도 해결하지 못한 미궁의 사건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듯 명쾌하게 풀어낸 전설적인 인물. 현자회는 그를 이단아처럼 여기기도 했지만, 그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라울 경!” 가레스 경은 그를 보자마자 안도와 초조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정말 와주셨군요.”
라울은 아무 말 없이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그의 발걸음은 조용했지만, 그 존재감은 방 안의 모든 시선을 압도했다. 그는 주변의 장황한 설명이나 현자들의 추측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저 침묵 속에서 마치 맹수가 사냥감을 탐색하듯, 서재의 모든 것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은 책장 가득 꽂힌 마법 서적들, 먼지 앉은 고대 유물들, 그리고 차가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공작의 시신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
현자회 수석 현자 에릭이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르웰린 경, 보시다시피 완벽한 밀실입니다. 모든 마법적, 물리적 수단을 동원해 확인했으나, 외부 침입의 흔적은 전혀 없습니다. 공작님은 외부 결계 외에 스스로 강력한 잠금 마법까지 걸어두셨더군요. 살인자는…”
“살인자는 없습니다.”
라울의 나직한 목소리가 에릭의 말을 잘라냈다. 현자들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르웰린 경?” 가레스 경이 물었다.
라울은 시신 앞에 멈춰 섰다. 무릎을 꿇고 앉아, 공작의 목덜미에 난 상처를 유심히 살폈다. 피로 흥건했지만, 그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 상처는… 마법 검이나 일반적인 칼에 의한 것이 아닙니다. 예리하나, 깊이가 지나치게 일정하고, 주변 조직이 녹아내린 흔적이 보입니다.” 라울은 손가락으로 공작의 피 묻은 턱선을 조심스럽게 쓸어보았다. “그리고… 이 손톱 자국.”
그의 손끝이 공작의 목 언저리, 피로 얼룩진 곳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검붉은 자국을 가리켰다. 다른 이들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거나, 그저 격렬한 저항의 흔적이라고만 생각했을 부분이었다.
“누구의 손톱 자국입니까? 범인의 것입니까?” 에릭 현자가 급히 물었다.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시선은 공작의 굳게 쥐여 있는 오른손으로 향했다. 수정 지팡이를 쥐고 있는 손.
“아닙니다. 이건… 공작 자신의 손톱 자국입니다.”
모두가 경악했다. 자신의 목을 스스로 할퀴었다는 말인가?
라울은 공작의 시신에서 시선을 떼고, 서재 전체를 다시 한번 천천히 둘러보았다. 특히 천장과 벽면을 유심히 살폈다. 그의 눈이 멈춘 곳은 천장의 한 귀퉁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균열이었다. 마법으로 강화된 서재였기에, 그런 균열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밀실은 맞습니다.” 라울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묘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침입자는 없습니다. 하지만 살인자가 없다는 말은 아니죠.”
그는 천장의 균열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대마법사 공작 아르테미스 벨라스는 마법으로 만들어진 환영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정적. 서재 안의 모든 이들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라울을 바라보았다. 환영? 그 강력한 대마법사 공작이, 고작 환영에 의해?
“하지만… 환영 마법은 실체를 가질 수 없습니다! 마력을 흘려보내 실체화하는 고등 마법은 존재하지만, 이 정도로 완벽하게 살해할 정도의 환영 마법은…” 에릭 현자가 반박했다.
라울은 에릭 현자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공작의 시신 옆 책상 위에 놓인, 피로 얼룩진 양피지 위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거기에는 미처 다 쓰지 못한 듯한 글자들이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거짓된…’
그 옆에는 공작이 쓰러지면서 남긴 듯한 붉은 핏자국이 크게 번져 있었다.
라울은 고개를 들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재 안의 모든 이들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트릭은 간단합니다. 공작은 ‘환영’을 보았고, 그 환영이 ‘자신’을 죽일 것이라 믿었죠. 그리고 그 믿음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겁니다.”
“스스로를… 죽음으로?” 가레스 경이 되물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라울은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의 균열에서 멀리 떨어진, 서재 한구석에 놓인 거대한 보물상자 위로 향했다. 그 상자는 평범해 보였지만, 라울의 눈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보이는 듯했다.
“완벽한 밀실 살인? 아닙니다. 완벽하게 ‘조작된’ 밀실 살인이지. 이 트릭의 핵심은 공포, 그리고 착각입니다.”
라울은 다시 한번 공작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은 이미 이 불가사의한 죽음의 실체를 꿰뚫어 본 듯했다.
“이제… 누가 이 ‘환영’을 만들어냈는지 알아낼 차례입니다.”
그의 말과 함께, 서재를 감싸고 있던 밀실의 장막이 조금씩 걷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진실의 첫 조각이,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