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밤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달빛은 핏물처럼 붉은 이끼 낀 바위들을 비추고 있었고, ‘침묵의 그림자’ 칭호를 얻은 이후로 단 한 번도 긴장을 놓지 않았던 카이의 온몸은 잔뜩 곤두서 있었다. 이곳은 아크라시아의 가장 깊숙한 심연, ‘어둠의 심장부’라 불리는 곳이었다. 인간이라면 발도 들여놓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오직 죽음과 광기만이 지배하는 악마족의 영역.
하지만 카이는 이곳에 있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다.
미쳤다고? 그래,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시간은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처럼 느리게 흘렀다.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마치 누군가의 비웃음처럼 들렸다. 카이는 숨을 죽이고 주위를 살폈다. 그의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위협이었다. 붉게 빛나는 눈을 가진 숲의 짐승들, 땅속에서 기어나와 흐느적거리는 그림자 촉수들. 그 모든 위협을 뚫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진정한 기적은, 그리고 가장 큰 위험은 아직 오지 않았다.
“늦으면 안 되는데….”
카이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소리조차 낯설었다. 들켜서는 안 된다. 이 관계가, 이 만남이 발각되는 순간, 모든 것이 끝장이다. 그의 소속 길드는 물론, 아크라시아의 모든 인간 종족은 그를 배신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그리고 이레는… 이레 또한 온갖 모욕과 고통을 겪어야 할 터였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옥죄어왔다.
찰나, 시야 가장자리에 번개처럼 빠른 움직임이 포착됐다. 동시에 짙은 아몬드 향과 싸늘한 강철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카이는 반사적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눈동자는 동요로 크게 흔들렸다.
어둠 속에서 발소리 하나 없이 나타난 그림자.
아니, 그림자라기엔 너무나 선명하고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길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은 달빛을 머금고 은은하게 빛났고, 그 아래로 드러난 푸른 눈동자는 밤하늘의 심연처럼 깊었다. 뾰족한 귀와 날카로운 송곳니, 그리고 등 뒤로 접혀 있는 거대한 박쥐 날개까지, 어느 것 하나 인간의 형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전신을 감싼 검은색 가죽 갑옷은 유려한 곡선을 따라 흐르며 그녀의 완벽한 육체를 더욱 부각시켰다.
그녀는 악마족의 지배자, 마왕 이레였다.
카이가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존재이자, 그를 파멸로 이끌지도 모르는 금단의 여인.
이레는 조용히 카이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눈빛은 한없이 차갑고 냉정했지만, 그 속에서 카이만이 읽어낼 수 있는 미약한 온기가 서려 있었다.
“늦었잖아, 카이.”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다. 얼어붙은 호수에 돌을 던진 듯, 카이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미안… 오는 길에 순찰대가 있어서 돌아왔어.”
“괜찮아. 나도 방금 전이었으니까.”
이레는 카이의 뺨에 손을 얹었다. 차가우면서도 부드러운 감촉. 카이는 눈을 감고 그 접촉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이 짧은 순간만큼은 모든 위험과 종족의 장벽이 사라지는 듯했다.
“위험한 곳이야. 어둠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고 있어.” 이레는 카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녀의 숨결이 그의 목덜미에 닿자 소름이 돋았다.
“알아. 하지만… 너를 보고 싶었어.”
카이의 말에 이레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한없이 싸늘한 여왕의 얼굴에 잠시 피어난 그 미소는, 그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것이었다.
“어째서인지 모르겠어, 카이. 어둠의 균열이 더 자주 열리고, 이상한 기운이 아크라시아 전체를 뒤덮고 있어. 내 영역에서도, 과거엔 볼 수 없던 마물들이 출현하고 있지.”
이레의 목소리에서 희미한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항상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초월적인 존재였지만, 최근의 변화는 그녀마저도 혼란스럽게 만드는 듯했다.
“인간 종족 쪽에서도 마찬가지야. 고대 유적들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정체불명의 재앙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어. 길드에서도 원인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어.”
두 사람의 손이 맞잡았다. 인간의 체온과 악마의 냉기가 뒤섞이며 묘한 감각을 만들어냈다. 이 위기 속에서, 서로의 존재는 더욱 절실해졌다. 금지된 관계라는 사실조차 잊을 만큼.
“그 모든 게 우리의 관계를 더욱 위태롭게 만들 거야.” 이레는 나지막이 말했다.
“그래도, 놓을 수 없어.” 카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너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어.”
이레는 카이를 끌어안았다. 뼈가 부서질 듯 강렬한 포옹이었다. 그녀의 날개가 카이의 몸을 감싸 안자, 세상의 모든 소음이 차단되고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이 순간만큼은, 그들은 마왕과 인간이 아닌, 그저 서로를 갈망하는 두 영혼이었다.
“카이, 나는….”
이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갑자기 멀지 않은 곳에서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 날카롭게 울렸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불길한 눈빛이 여럿 포착되었다. 그들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져 왔다.
카이와 이레는 동시에 몸을 굳혔다.
서로의 눈이 마주쳤다.
이레의 눈동자 속 푸른 불꽃이 거칠게 타올랐다.
그것은 경고이자, 동시에 격분이었다.
“악마 사냥꾼이야….”
카이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단검이 언제든 뽑힐 준비를 마쳤다.
그들이 여기까지 추격해왔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누군가 이들의 은밀한 만남을 눈치챈 것일까?
어둠 속에서 푸른색 조명이 번쩍였다. 악마를 감지하는 마법이었다.
“이곳에 악마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대장님, 저기….”
한 악마 사냥꾼의 외침이 밤의 정적을 갈랐다.
카이와 이레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숨을 죽인 채, 그림자 속으로 몸을 더욱 깊이 숨겼다.
그들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발각되는 순간, 모든 것이 파멸이다.
지금껏 쌓아온 모든 것이, 이 아슬아슬한 금단의 사랑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날 것이다.
악마 사냥꾼들의 발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의 눈에, 바닥에 떨어진 카이의 망토 조각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망토 조각 위에는 길드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인간 최고 길드의 문양.
그리고 그 길드는, 악마족과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는 곳이었다.
밤의 장막이 더욱 깊어졌다.
두 사람의 운명은, 이제 칼날 위에 서 있었다.
곧, 피바람이 불어 닥칠 터였다.
카이와 이레는 각오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단순히 목숨을 건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을 지키기 위한, 최후의 결전이었다.
이 순간, 이레의 눈동자에 섬광처럼 살기가 스쳤다.
감히, 누가 우리의 밤을 침범했는가.
그녀의 손끝에서 어둠의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카이 또한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들키든, 살아남든.
함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