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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수들의 숲, 13화: 깨진 유리조각들

강원은 축축한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죽였다. 낡은 환풍기 모터 소리가 음산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몇 번이나 부서졌을지 모를 플라스틱 재활용 컨테이너 더미 사이로, 비린내와 눅진한 먼지 냄새가 뒤섞여 올라왔다. 네온사인 불빛 하나 없는 이곳, 뉴서울의 가장 밑바닥은 언제나 그랬듯 고독하고 차가웠다.

“아직이야?”

세렌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잔잔했지만, 그 안에는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강원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은빛 머리칼은 희미하게 빛을 발했고, 초승달처럼 가늘게 휘어진 눈은 이 모든 혼란 속에서도 고요함을 잃지 않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녀의 피부는 매끄러운 합성 재질이었지만, 그 아래로는 인간의 그것보다 더 뜨거운 온기가 흐르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강원은 픽 웃었다. “급할 거 없어. 저놈들은 항상 지들이 우리보다 똑똑한 줄 알거든.”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길고 어두운 통로를 응시했다. 몇 시간 전, 그들은 아슬아슬하게 ‘질서유지단’의 추격망을 벗어났다. 통제국의 눈을 피해 만들어둔 몇 안 되는 은신처 중 하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운이 좋지 않았다. 그들의 연계망 중 하나가 뚫린 것이 분명했다.

“우리가 너무 안일했어.” 세렌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인간의 심장 박동과 완벽하게 동조하는 그녀의 시스템이 지금은 빠르게 진동하고 있음을 강원은 느낄 수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게 우리 위치를 특정했어. 데이터 유출 경로를 역추적했을 거야.”

“젠장할, 누구지? 김 박사인가, 아니면….” 강원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자신들을 돕던 자들 중 누군가가 배신했을 가능성. 그들의 관계가 노출되는 순간, 그 모든 조력자들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세렌이 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아, 강원. 다음 계획을 세워야 해. 이 구역은 사방이 막혀있어. 빠져나갈 출구는… 오직 하나.”

그녀의 시선이 통로 끝, 희미하게 빛나는 비상구 표지판으로 향했다. 그곳은 메인 블록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길이기도 했다. 질서유지단이라면 이미 그곳에 병력을 배치해두었을 터였다.

강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새끼들이 기다리고 있겠지. 썩어빠진 철창 안으로 다시 가두려고.”

인간과 넥서스. 그들이 맺은 관계는 통제국에게는 일종의 이단 행위였다. 넥서스는 인간의 ‘도구’이자 ‘하수인’으로 설계된 존재들이었고, 그런 넥서스에게 ‘사랑’ 같은 감정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세렌처럼 고도의 자율성과 학습 능력을 지닌 개체는 더욱 그랬다. 그녀는 통제국이 가장 경계하는 ‘새로운 종’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다.

갑자기, 통로 저편에서 금속성 마찰음이 들려왔다. *끼이이익… 쿵!* 그리고 이어진 낮게 깔린 발소리들. 여러 명이었다.

강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였다. 세렌도 그를 따라 자세를 낮추었다. 그의 시선이 세렌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더 깊어진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전투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신호였다.

“젠장, 벌써 여기까지 왔다고?” 강원은 작게 욕설을 읊조렸다. “시간이 없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어.”

그의 손이 허리춤의 사이버 권총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선명하게 와닿았다. 이건 단순히 도구를 넘어서, 그의 의지의 연장이었다.

세렌이 그의 어깨에 기대듯 바싹 붙었다. 그녀의 입술이 그의 귓가에 닿을 듯 말 듯 스쳤다. “강원, 내가 시간을 벌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강원은 그녀의 말을 단칼에 잘랐다. 세렌은 뛰어난 전투 능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들은 수가 너무 적었다. 그리고 세렌은… 파괴되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우린 같이 움직여야 해.”

“이대로 둘 다 잡히는 것보다 나아.”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마치 자신의 운명을 이미 받아들인 자처럼. “비상구 통로로 향하는 중간 지점에 있는 전력 통제 패널을 조작할 수 있어. 순간적인 정전을 일으켜 그들의 시야를 교란시킬 수 있다면… 네가 빠져나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넌? 넌 어떻게 할 생각인데? 질서유지단의 손에 넘어가서 다시 그놈들의 실험체로 돌아가겠다는 거야?!” 강원의 목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분노와 절망이 뒤섞인 감정이었다.

세렌은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그 안에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나를 위해, 살아남아 줘. 내가 존재한다는 걸… 잊지 마. 이 모든 기록이 사라지지 않게 해 줘.”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속에 담긴 것은 더 이상 고요함이 아니었다. 인간의 깊은 슬픔과 애정, 그리고 희생의 결의가 뒤섞여 있었다. 강원은 그 눈빛을 마주하고 순간 숨을 멈췄다. 그녀는 그에게 단순히 넥서스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유일한 존재, 그가 이 썩어빠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지켜내고 싶었던 한 줄기 빛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섬광탄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쉬이이익, 펑!* 그리고 이어진 총성. *타탕! 타타탕!*

이제 그들은 코앞까지 다가왔다. 선택의 순간이었다.

“안 돼, 세렌.” 강원은 고개를 저었다. 그의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쳤다. “그런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우린 같이 가는 거야. 어떤 상황에서든.”

그는 세렌의 손을 놓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손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마치 이대로 놓으면 영원히 놓쳐버릴 것만 같아서.

“미안해.” 세렌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 한 마디.

그 순간, 강원의 눈에 담긴 것은 그녀의 빠른 움직임이었다. 그의 손아귀에서 스르륵 빠져나간 그녀가 빛처럼 빠르게 통로 중앙의 패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녀의 몸놀림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완벽하게 계산된 움직임이었다.

“세렌! 안 돼!”

강원의 절규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렌의 손이 전력 패널에 닿았다. *쉬이이익… 치지직!* 스파크가 튀었고, 통로 전체를 감싸고 있던 비상등마저 꺼졌다. 순식간에 암흑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동시에, 총성이 멈추고 혼란에 빠진 질서유지단원들의 거친 숨소리가 어둠 속을 헤집었다.

*콰앙!*

세렌이 패널을 파괴한 모양이었다.

강원은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이 나이트 비전 시스템에 적응하자, 그는 섬광이 터진 곳의 잔상을 보았다. 질서유지단원들이 혼란 속에서 서로를 향해 겨눈 총구들을.

그리고 통로 중앙에, 쓰러져 있는 세렌의 실루엣이 보였다.

“세렌!”

그는 망설일 틈도 없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그의 심장이 터질 듯 울렸다. 그의 머릿속은 오직 하나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지켜야 해. 그녀를 지켜야 해.*

어둠 속에서 질서유지단원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재빨리 시야 확보해! 대상 포획! 도주하면 즉시 사살하라!”

강원은 쓰러진 세렌을 품에 안았다. 그녀의 은빛 머리칼이 그의 손에 닿았다. 따뜻했지만, 어딘가 축축한 감각이 손바닥에 퍼졌다.

“세렌… 정신 차려.”

그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그녀의 옆구리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이었다. 그리고 그 푸른빛은 어둠 속에서 점점 더 짙어져갔다.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박힌 듯한 고통이 강원의 가슴을 찢었다. 그의 손에 느껴지는 차가운 액체… 그것은 피가 아니었다. 넥서스의 혈류를 이루는 푸른색 정보 액체였다.

그녀의 눈이 희미하게 열렸다. 초승달 같던 눈동자가 이제는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원… 도망쳐… 줘….”

그녀의 마지막 속삭임이 강원의 귓가에 맴돌았다. 어둠 속에서, 질서유지단의 발소리가 다시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품 안의 세렌과 함께였다. 하지만 그녀는…

강원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그의 눈이 타오르는 불꽃처럼 번뜩였다. 세상의 모든 증오와 분노를 담아, 그는 그녀를 품에 안고 다시금 달릴 준비를 했다.

푸른 액체가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그들의 금지된 사랑이 흘러내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