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하 미궁: 첫 조우
김현의 손에 들린 탐사용 랜턴 불빛이 끈질기게 어둠을 찢었다. 묵직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이곳은 지하 수백 미터, 심지어 지도에도 존재하지 않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얼마 전 발생한 대규모 지진이 우연히 열어젖힌 심연의 입구. 그 문을 가장 먼저 비집고 들어온 이들이 바로 현과 그의 파트너, 이서진이었다.
“현 씨,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뒤따라오던 서진의 목소리는 경이로움과 전율로 가득했다. 그녀는 노트북과 스캐너가 담긴 백팩을 고쳐 메며 주위를 휘둘러 보았다. 고고학자이자 언어학자로서 평생을 고대 문명 연구에 바쳐온 그녀에게 이곳은 살아있는 전설, 아니, 그 이상의 것이었다.
현은 대답 없이 랜턴을 조금 더 멀리 비췄다. 흙과 바위로 이루어진 초기 진입로를 지나자, 그들은 곧 정교하게 다듬어진 거대한 통로에 들어서 있었다. 벽면은 매끄러운 검은 돌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그 재질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 비현실적인 광택을 띠고 있었다. 육안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미세한 문양들이 벽을 따라 흐르는 듯했다.
“믿을 수 없다는 건, 우리 세상에 이런 게 있었는데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겠지.” 현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냉소적인 어조가 섞여 있었다. 그는 이런 미스터리에 익숙했다. 어쩌면 너무나 익숙해서, 경이로움보다는 현실적인 위험을 먼저 감지하는 편이었다. “공기 흐름도 이상하고, 이 습도도 뭔가 부자연스러워. 자, 교수님. 여기도 지진 전에는 그냥 단단한 암반이었겠죠.”
“네, 시추 자료만 보면 그랬어요. 텅 비어있었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죠.” 서진은 벽면에 손을 얹었다. 차가움과 동시에 미약한 진동 같은 것이 느껴졌다. “이 벽돌들은… 어떤 기록에도 없어요. 이런 가공 기술도요. 심지어 접합부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들이 나아갈수록 통로의 폭은 점차 넓어졌고, 이따금 천장에서 은은하게 빛을 내는 정체불명의 결정체가 나타나 어둠 속을 밝히곤 했다. 빛은 희미했지만, 그들의 장비 없이도 주변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마치 이곳 자체가 살아 숨 쉬는 유기체인 양.
“여기서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현이 속삭였다. 그의 발은 이미 통로 바닥에 깔린 섬세한 문양 위를 지나고 있었다. “이런 곳에는 늘 함정이 따라오니까.”
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높이 십 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그 문은 통로의 검은 돌과는 다른, 은회색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문 중앙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과 함께 손바닥만 한 크기의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그 홈 주위로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아주 미약한 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아름다워.” 서진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문 가까이 다가갔다. “이건… 기존의 어떤 문자 체계와도 달라요. 하지만 분명히,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문자예요.”
현은 문 주위를 꼼꼼히 살폈다. 표면에 손가락으로 두드려보고, 열 감지기로 온도를 측정했다. “강제 개방은 어려울 것 같네요. 이 두께라면 핵폭탄도 간신히 뚫을걸.”
“핵폭탄이라니, 현 씨는 농담도 참.” 서진은 노트북을 열어 문자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기존 자료와 대조해도 매칭되는 게 없어요. 하지만 문자의 흐름이나 구성 방식은… 원시 고조선어의 어떤 흔적과 유사성이 있어요. 물론, 훨씬 더 진보된 형태지만.”
현은 문 옆의 벽면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거대한 문에 시선을 빼앗기기 쉬웠지만, 그는 전체를 보는 것에 익숙했다. ‘저 문이 열린다면, 그건 분명 이 벽면을 통해서 작동할 거야.’ 그의 눈이 번뜩였다. 벽면에 희미하게 돌출된, 손바닥 크기의 육각형 무늬들이 보였다. 총 여섯 개. 하지만 아무리 눌러봐도 반응은 없었다.
“교수님, 저 문자 중에 혹시 ‘열다’ 또는 ‘시작’과 관련된 의미를 가진 게 있을까요?” 현이 물었다.
서진은 미간을 찌푸린 채 노트북 화면에 몰두했다. “잠시만요… ‘흐르는 물이 길을 만들고, 태양이 씨앗을 깨우며, 별들이 어둠을 밝히나니…’. 이건 문자가 아니라 시(詩) 같아요. 그리고 그 아래에…” 그녀의 손가락이 화면 위를 빠르게 스크롤했다. “…이건 명령문이군요. ‘세 개의 눈이 깨어나면, 문은 비로소 잠에서 깨리라.’”
현은 그 말을 듣고 다시 육각형 무늬들을 바라봤다. ‘세 개의 눈….’ 그는 문득 천장에 박힌 수정체들을 떠올렸다. 그 수정체들 또한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현은 허리에 찬 도구 주머니에서 휴대용 레이저 포인터를 꺼냈다. 레이저 빔이 어둠 속을 가르며 천장의 수정체 중 하나에 닿자, 수정체가 순간적으로 밝게 빛났다. 동시에, 문 옆 벽면에 있던 육각형 무늬 중 하나도 푸른빛을 띠며 희미하게 진동했다.
“오오! 현 씨!” 서진이 놀라 외쳤다.
“‘세 개의 눈이 깨어나면’… 그렇다면 세 개의 수정체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뜻이겠죠.” 현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나머지 두 개의 수정체에도 레이저를 비췄다. 차례로 빛을 발하는 수정체들과 함께, 벽면의 육각형 무늬 두 개가 더 푸르게 빛났다. 이제 총 세 개의 육각형 무늬가 활성화된 것이다.
*웅—*
문득 거대한 문에서 묵직한 진동음이 울려 퍼졌다. 문을 둘러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은회색 금속 표면 위로 복잡한 선들이 마치 피가 흐르는 혈관처럼 돋아났고, 이윽고 문은 중앙에서부터 양옆으로 천천히 미끄러져 열리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지하 통로를 가득 채웠다. 문이 완전히 열리자, 그들 앞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돔형 공간. 그 중앙에는 기이한 형태의 제단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단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주변을 둘러싼 공기 자체가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돔의 가장자리, 무수한 크고 작은 격자형 창문 너머로는… 도시의 잔해가 펼쳐져 있었다.
아니, 도시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이질적인 풍경이었다. 기둥들이 하늘을 찌르고,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구조물들이 섬뜩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잿빛 먼지에 뒤덮여 있었고, 미약하게 빛나는 수정체들의 불빛 아래에서는 죽은 듯 고요했다.
“이건…” 서진의 목소리는 한없이 작아졌다. “지하에… 도시가 있었어?”
현의 눈동자는 경고등처럼 번뜩였다. 저것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완전히 다른 문명의 흔적. 그리고 저 도시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구조물 꼭대기에서, 수없이 많은 점들이 마치 살아있는 눈동자처럼 그들을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그것은 거대한 기계 장치인지, 아니면 생명체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한 건, 그 눈동자들이 수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침입자를 응시하고 있다는 섬뜩한 직감이었다.
“교수님… 우리가 찾은 건, 단순한 유적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의 등골을 차가운 전율이 훑고 지나갔다.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었다. 이 지하 도시의 심연에는 대체 어떤 비밀이 잠들어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 비밀이 깨어나면, 세상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