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나는 강하준, 스물하나. 대학교 2학년. 오늘 나의 일상은 ‘교양필수’라는 잔혹한 이름의 과목이 던져준 레포트 덕분에 도서관 열람실의 꿉꿉한 공기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특히 ‘고대 문명의 의례적 상징’이라는, 듣기만 해도 졸음이 쏟아지는 주제는 나를 극한의 인내심 시험대에 올려놓았다. 젠장, 이러다 내 머리가 진짜 고대 문명으로 퇴화할 지경이었다.

“하아… 하아….”

숨이 가빴다. 천장을 올려다보니 거미줄과 함께 미지의 먼지덩이가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이곳은 도서관 중에서도 인적이 드문, 속칭 ‘잊혀진 기록보관소’였다. 왜 하필 이런 곳에 와 있냐고? 평범한 자료는 이미 씨가 말랐고, 뭔가 ‘참신한’ 걸 찾아야 학점을 건질 수 있다는 담당 교수님의 으름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내 희망은 고색창연한 서가 틈 어딘가에 숨어있을 단 하나의 ‘비밀 문서’였다.

손가락으로 낡은 책등을 쓸어보았다. 거친 표지가 손끝에 닿았다. 먼지가 풀풀 날렸다. 쿨럭, 쿨럭. 코와 목이 동시에 괴로움을 호소했다. 젠장, 이건 학점 이전에 생존의 문제였다.

“이게 다 무슨 놈의 책들이야, 진짜….”

나는 한숨을 쉬며 맨 위 칸에 손을 뻗었다. 아무리 봐도 고서적 코너는 높이부터가 사람을 차별하는 것 같았다. 낑낑거리며 발꿈치를 들었지만 손끝은 허공만 갈랐다. 빌어먹을.

그때였다. 삐끗! 헛디딘 발에 중심을 잃으면서 옆에 쌓여있던 책 무더기가 와르르 무너졌다. 쿵, 쿵, 쿵. 마치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책더미 사이로, 유독 눈에 띄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다른 책들이 누렇게 바랜 가죽 표지인 데 반해, 이 책은 짙은 남색 벨벳 같았다. 테두리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금실 장식이 있었고, 정중앙에는 육각형의 알 수 없는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어… 이건 뭐야?”

나는 무심코 손을 뻗어 그 책을 주웠다. 낡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세련된, 그리고 묘하게 따뜻한 촉감이었다. 그냥 평범한 고서적은 아니었다. 그 육각형 문양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손끝에서 희미한 전류가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책에서 아주 미세하게, 정말 아주 미세하게 남색 빛이 스르륵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너무나 순식간이라 내 눈이 피곤해서 환각을 본 거라고 생각했다.

“젠장, 이런 특이한 책은 또 처음 보네.”

나는 허리에 손을 얹고 다시 맨 위 칸을 노려봤다. 아직 그놈의 ‘고대 문명 의례적 상징’ 책은 찾지도 못했다. ‘아, 좀 쉽게 잡히는 방법 없나? 진짜 누가 좀 저 책 좀 내려줬으면….’

그 순간이었다. 내가 주워든 남색 벨벳 책이 손안에서 쿵, 하고 한 번 더 맥박처럼 울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내가 올려다보고 있던 맨 위 칸의 책 한 권이 스르륵, 공중에서 떠오르더니 내 손으로 툭, 하고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응?”

나는 얼빠진 표정으로 방금 떨어진 책과 내 손에 들린 남색 벨벳 책을 번갈아 봤다. 뭐야, 방금 그게 뭐였지? 마술? 아니, 난 마술사도 아니고. 착각? 착각치고는 너무 생생했다. 혹시… 이 책 때문인가?

심장이 쿵쾅거렸다. 이거 뭔가 심상치 않았다. 그때,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하준.”

젠장. 듣기만 해도 오한이 드는 목소리였다. 이 도서관에서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나는 마치 불법 주차 딱지를 받은 차주처럼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완벽하게 정돈된 책상 위에서 수십 권의 참고서와 씨름 중이던 ‘학과 여신’ 서연희가 싸늘한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썹은 살짝 찌푸려져 있었고, 입술은 얇게 다물려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녀의 미모에 넋을 잃었겠지만, 지금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어… 어어, 연희야. 안녕?”

나는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는 내 시선이 향한 곳, 즉 내가 어지럽혀 놓은 책 무더기와 방금 내 손으로 떨어진 수상한 책을 훑어봤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평소에는 코빼기도 안 비치던 애가 웬일로 고서관에 다 왔어?” 그녀의 목소리에는 날카로운 비난이 담겨 있었다. “게다가 책은 왜 다 떨어뜨리고… 남에게 피해 주기 싫으면 조용히 좀 하면 안 돼?”

피해 주기 싫으면 조용히 좀 하면 안 되냐니. 마치 내 존재 자체가 민폐인 것처럼 말하는 저 싸늘함! 나는 순간 울컥했다. 하지만 그녀의 논리정연한 비난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내 손에 들린 남색 벨벳 책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책은 뭐야? 처음 보는 책인데. 혹시 개인 소장품 가져와서 도서관에 두고 다니는 건 아니겠지? 강하준, 너는 매번….”

잔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하필 이런 상황에 서연희라니. 안 그래도 기분 묘한데 잔소리까지 들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제발, 저 잔소리 좀 어떻게 안 되나? 아니, 그냥 이 상황 자체를 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저 골치 아픈 레포트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고, 서연희의 저 쏘아붙이는 눈빛도 그렇고… 그냥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내 머릿속에서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내 손에 들린 남색 벨벳 책이 다시 한번 쿵, 하고 힘찬 박동을 내뿜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남색 빛이 서가를 넘어, 서연희의 책상 쪽으로 번져가는 것이 보였다.

“어…?”

서연희도 눈치챈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책상으로 향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다.

서연희의 책상 위에 가지런히 쌓여있던 전공 서적들, 형형색색의 필기도구, 그리고 그녀가 며칠 밤을 새워가며 정리했던 ‘고대 문명 의례적 상징’ 레포트 초고 노트… 그 모든 것이 마치 환영처럼,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스르륵 사라져 버린 것이다.

“…뭐야?”

서연희의 목소리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녀의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텅 비어버린 책상 위를, 그제야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어… 어어? 연희야. 저… 저거, 그게….”

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내 손에 들린 남색 벨벳 책은 여전히 은은한 남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육각형 문양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마치 ‘내가 해냈어!’라고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것처럼.

“강하준!!!”

서연희의 비명 소리가 낡은 고서관의 정적을 갈랐다. 그 비명에는 분노, 황당함, 그리고 약간의 공포가 뒤섞여 있었다. 나는 그녀의 살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며 직감했다.

젠장. 내 대학 생활, 망했다. 그것도 아주 스펙터클하게, 미스터리하게 망했다. 이 빌어먹을 마법의 책 때문에.